#122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상천과 비호, 화룡이 적을 최대한 멀리 데리고 도망쳤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상천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 하신은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젊은 나이기에 지금은 호랑이 새끼에 불과할지 몰라도 좀 더 나이를 먹고 경험을 쌓으면 중원무림에서 큰 역할을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자신이 말리지 못하고 사지로 몬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들었다.
하신의 어두운 기색을 읽은 나군천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옆에서는 제왕무적대주가 임시방편으로 처치해 놓은 나군천의 상처 부위를 살피고 있었다.
“자네도 힘들 텐데. 좀 더 수고 해줘야겠어.”
“괜찮습니다.”
제왕무적대주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군천과 제왕무적대주 둘만 살아남았을 정도로 치열했던 싸움이었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 역시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군천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돌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왕무적대주가 그의 상처를 모두 살피자 나군천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고현에게 말했다.
“서둘러야 하지 않겠소?”
“그래야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고현의 물음에 나군천은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문주님.”
떠날 채비를 하는 그에게 하신이 다가왔다. 상천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냥 이대로 떠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걱정 말게. 살아 돌아올 거다. 백룡문주는. 지금은 은남도문에 도착하는 게 우선이다.”
나군천의 말에 하신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은남도문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상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큰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그의 주변에는 여러 구의 시체가 있었다. 지금까지 상천의 검에 목숨을 잃은 적의 숫자만 해도 오십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혼자서 그 많은 적을 베어 넘기고 멀리 유인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체력 소모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잘 탈출했겠지?’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 상천은 통로 안에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부디 그들이 무사히 탈출해 은남도문으로 향하고 있길 바랐다.
‘두 사람도 멀쩡하겠지?’
상천은 자신과 함께 적들을 유인한 비호와 화룡의 안위도 걱정이 되었다.
***
가릉이 비호와 화룡을 압박하는 모습을 본 것은 우연이었다.
장무진의 추격을 피해가며 적들을 쓰러뜨려 가던 상천의 눈에 고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지체하지 않고 그 쪽으로 몸을 날린 상천의 검이 비호의 어깻죽지 언저리까지 다가간 가릉의 도를 겨우 막아냈다.
이대로 팔 하나를 잃게 생겼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던 비호는 때마침 나타난 상천을 보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군.”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도를 막아섰지만 가릉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은 채 상천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하지만 상천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거 오랜만에 만났는데 표정이 왜 그렇지? 너무 살벌한데.”
가릉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상천은 거기에 대꾸도 하지 않고 비호와 화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서둘러 이 자리를 피하시오. 적당한 때가 되면 곧장 은남도문으로 합류하고.]
상천의 전음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본 후 자리를 박찼다.
“제가 쫓지요.”
파박!
비호와 화룡이 자리를 뜨자 장무진이 두 사람을 쫓으려 했다. 하지만 상천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하하하!”
가릉이 재밌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우리 둘을 막겠다?”
“저 혼자 상대하겠습니다.”
장무진이 먼저 나섰다. 상천이 공효를 죽였을 만큼 강하다고는 하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상천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다급한 상황이라 일단 앞을 막아서기는 했지만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장세진의 경우 스스로 자멸한 부분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장무진과 가릉을 상대할 때 그와 같은 운이 또 찾아올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두 사람이 작정하고 상천에게 한꺼번에 달려들면 상천으로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후…….”
상천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검을 들어 장무진에게 겨누었다.
그런 상천을 장무진은 살벌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은 있지만 방심은 없는 상태.
스윽.
장무진이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곧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장무진의 공격은 거침이 없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 선공을 내주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침착하게 위력적인 공격을 펼치는 장무진을 맞아 상천은 고전했다.
쾅! 쾅! 쾅!
빠르고 강하게 연달아 내리치는 그의 공격을 상천은 이를 악물고 막아냈다. 검이 버틴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상천은 최대한 침착하게 장무진의 공격을 막아내며 기회를 기다렸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한들 자그마한 틈은 분명히 보일 것이었다.
그 단 한 번의 틈.
상천은 웅크리며 그 틈을 기다렸다.
반면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는 가릉의 표정은 편안했다.
누가 봐도 장무진이 유리한 상황.
게다가 유리하다고 방심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침착하고 냉철하게 상천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가릉이 봤을 때 지금 이 상황을 상천이 역전 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 볼 것도 없군. 쥐새끼 두 마리나 잡으러 가야겠어.”
그렇게 말한 가릉이 그 자리를 떠났다.
가릉이 떠나는 것을 본 상천의 마음이 급해졌다.
비호와 화룡의 경공 실력이라면 적들을 따돌리고 멀리 도망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가릉이 뒤를 쫓기 시작했다면 무사할 것이라 장담할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해지자 움직임에도 변화가 왔다.
침착하게 장무진의 공격을 막아가며 기회를 엿보던 그의 움직임이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
뻑!
“크흡!”
결국 상천은 일격을 얻어맞았다. 뒤늦게 장무진의 도를 검으로 막아 비틀어 도면으로 늑골을 맞은 것이다.
날로 맞았다면 그대로 몸이 반으로 쪼개졌을지도 모를 일격이었기에 면으로 맞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검으로 막아 위력을 반감시키기는 했지만 워낙 기본적으로 위력이 강했기에 맞는 순간 늑골에 금이 가며 숨이 턱 막혔다.
지독한 통증이 온 몸을 휘감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공격을 성공시키고 상천이 휘청거리는 것을 본 장무진이 더욱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윽!’
움직일 때마다 늑골이 욱신거렸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대로 주저앉아 움직이지도 못했을 정도의 고통이었지만 상천은 이를 악물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통증 때문에 제대로 힘을 싣기 어려운 상황이라 상천의 몸 곳곳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작은 상처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후욱! 후욱!”
호흡이 눈에 띄게 가빠진 상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에 장무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천천히 상천의 숨통을 끊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녀석한테 당했다니. 공효, 그놈도 참.”
장무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공격을 멈추고 비틀거리는 상천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기대를 좀 했다. 군마성 삼 대 도법 중 하나를 깬 놈이라 한가락 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실망이군.”
상천은 그의 말에 대꾸를 할 힘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장무진이 공격을 멈추고 시간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상천은 힘겹게 호흡을 고르며 빠르게 진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늑골에서부터 퍼지던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힘들다.’
상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을까? 무엇 때문에?
처음 종삼을 따라 백룡문에 들어가고 무공을 배울 때까지만 해도 이런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거지 패에 끼어 생활하면서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를 따라나섰을 때에는 그저 끔찍한 그 생활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배울 때에는 그저 내 한 몸 지킬 수 있는 수준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종삼과 헤어지던 날.
백룡문을 일으키겠다는 약속을 했을 때에도 그 약속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씨앗을 함께 생활하던 이들에게 뿌렸고,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피식.
상천이 살짝 웃었다. 배동삼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독하리만치 수련에 몰두한 배동삼은 제법 실력도 쑥쑥 늘었다. 뿌린 씨앗에 싹이 트고 있는 것이다.
문파의 이름을 알릴 방법을 찾다가 무투대회에 참가하게 되고, 합산도문에 들어가게 되고.
비호와 화룡, 장여진 등을 만나게 되었다.
낭호와 서기종, 녹엽도.
소중한 인연을 만났지만 상천 본인은 너무나도 큰 세상에 발을 들여 놓았고, 그 결과가 지금 이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종삼과 만나 무림에 한 걸음 다가간 순간부터 이럴 운명이었는지도 몰랐다.
‘사부.’
상념의 끝에 종삼의 모습이 떠올랐다.
과거 장세진에게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나타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너무 보고 싶었다.
부모 없이 혼자 살던 그에게 있어서 종삼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처음으로 의지라는 것을 했던 사람이고, 든든함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쉬고 싶다.’
‘쉬긴 뭘 쉬어, 이놈아!’
‘사부…….’
‘여기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이 좋은 곳에서 나 혼자 좀 더 편히 있으련다. 넌 아직 오지 마! 너 오면 귀찮아.’
피식.
상천이 다시 한 번 웃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종삼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장가도 가고, 네 새끼들도 보고. 네 새끼들이 또 새끼 낳는 것까지 본 다음에 와!’
그렇게 말한 종삼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데 목소리도 안 나오고 움직일 힘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피식거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저승으로 가라.”
그렇게 말한 장무진이 천천히 상천에게 다가왔다. 고작 한 걸음 거리. 그가 도를 한 번 휘두르면 상천의 목숨은 끊어질 상황이었다.
“…말래.”
“뭐?”
중얼거리는 소리가 워낙 작아 제대로 듣지 못한 장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힘겹게 고개를 들고 다시 말했다.
“아직 오지 말래, 사부가.”
“뭐라는 거야? 헛소리 그만하고 가라!”
부웅!
장무진이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상천이 빨랐다.
푸욱!
한 걸음 거리.
강자도 약자에게 언제든 당할 수 있는 거리였다. 끝이라 생각한 장무진은 무방비 상태였고, 그랬기에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그의 동작도 컸다.
그 작은 틈.
상천이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였고, 그것을 상천은 놓치지 않았다.
검을 들고 있는 힘껏 앞으로 찔렀다.
그리고 검의 끝은 그의 하복부를 관통해 등 뒤로 빠져나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억!”
단말마 비명이 장무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도를 휘두르던 그의 동작도 그대로 멈춰 버렸다.
상천의 마지막 공격은 그대로 장무진의 하단전을 깨뜨려 버렸다. 지독한 통증과 함께 진기가 흩어지는 것을 고스란히 느낀 장무진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후우…….”
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물어진 장무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상천은 그의 복부에서 힘주어 검을 뽑았다.
털썩.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는 장무진.
너무나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그였다.
검을 든 채 상천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적들 대부분은 가릉과 함께 비호와 화룡을 쫓고 있는 중이었고, 소수만 남아 두 사람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장무진이 쓰러지자 그들도 적지 않게 당황한 듯했다.
상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그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상천이 땅을 박차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이 장무진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제법 시간이 흐른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