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21화 (121/141)

#121화.

쒜엑!

“어이쿠!”

비호가 호들갑을 떨며 옆에서 날아드는 검을 재빨리 피했다. 상천이 워낙 강해졌고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크게 표가 나지는 않았지만 비호와 화룡 모두 합산도문 내에서 상위에 속하는 무공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군마성의 단주급이 아니라면 비호와 화룡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날랜 몸놀림으로 검을 피한 비호의 얼굴이 흑빛이 되었다.

정면에서 묵직한 도가 자신을 반으로 쪼갤 듯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헛!”

콰득!

짧은 기합과 함께 비호가 박찬 자리를 간발의 차이로 도가 강하게 내리 찍었다.

“쥐새끼 같은 놈!”

가릉이 사나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도를 움켜쥐고 비호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도를 가릉은 너무나 쉽게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검을 휘두르듯 빠른 공격에 비호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깡!

“정신 차려!”

어느새 다가온 화룡이 검으로 가릉의 도를 쳐내며 소리쳤다. 제법 충격이 컸는지 그녀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둘 다 죽어라!”

이대일의 양상이 되었지만 가릉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도를 휘둘렀다.

양팔을 모두 사용할 때만큼의 파괴력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한 팔로 펼쳐내는 무적패도의 위력은 둘이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긴장한 화룡과 비호는 가릉의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공격을 피하기 바빴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공격을 피하면서 간간이 들어오는 다른 적들의 공격을 피하기까지 하려니 두 사람의 심력 소모는 평소의 배 이상에 달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만큼 가릉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쌓였던 것들을 화룡과 비호에게 모두 쏟아내려 했는데 도리어 점점 짜증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한참 공격하던 가릉이 잔뜩 약이 오른 표정으로 화룡과 비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공격이 멈추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몰려든 적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저 연놈들을 합산도문에서 처리했어야 했는데…….”

가릉이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읊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두 사람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적들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으니 세 사람이 먼저 통로 밖으로 뛰어나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상태였다.

이제 최대한 멀리 출구에서 그들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 관건이었다. 상천과 비호, 화룡은 적과 검을 섞는 것은 뒤로 미루고 일단 그들을 유인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반 시진 후에 나오십시오.”

하신은 비밀통로 밖으로 나가기 전 상천이 한 말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 뒤쪽에서 쫓는 적들도 가까이 오지 못한 듯 했고, 밖에서 느껴지는 기세 역시 많이 줄어 있었다.

“열겠습니다.”

하신이 비밀통로 출구를 여는 장치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출구가 열리면 적들이 뛰어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상천을 믿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잠시 머뭇거리던 하신이 비밀통로의 문을 열었다.

드르륵!

한 식경 전에 열렸던 문이 다시 열렸다. 은남도문의 고현과 조운겸을 비롯한 은남도문의 무사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상천이 나간 이후로 통로 밖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위장을 위해 출구 바깥에 심어 놓은 덩굴들 사이사이로 보이는 바깥에서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군. 괜찮겠지?’

하신은 안도하면서도 밖으로 뛰쳐나간 상천과 비호, 화룡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다행이 괜찮은 것 같소이다. 백룡문주가 적들을 제대로 유인한 것 같습니다. 그럼 나가도록 하지요.”

조용히 밖의 기척을 살핀 고현이 말했다. 그에 은남도문과 반월도문의 무사들이 서둘러 통로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밖으로 빠져나간 무사들은 곧장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적들은 없었지만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서두르지요.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은남도문의 영역까지는 아직 거리가 멉니다.”

모든 사람이 통로를 빠져나오자 고현이 나서기 시작했다. 통로 안에서는 나군천도 있었고, 나군천이 적을 막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에는 하신이 전적으로 상천에게 의지하고 있던 터라 일단 지켜보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 나군천도, 상천도 없는 상황이니 주도권을 가져오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들은 은남도문으로 피난을 떠나고 있는 입장이니 그가 나선다 하여도 이상하게, 혹은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딱 한 명, 하신을 제외하고.

하신은 고현의 생각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야 적극적으로 나서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군천이 있는 자리에서야 당연하다 치지만, 문제는 나군천이 자리를 비운 후였다.

나군천과 상천 등 적과 비등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자 하신은 적지 않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심지어 자신이 내리는 모든 판단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고현과 조운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비밀통로 안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뒤쪽에서 적이 쫓아오고 있고 앞에도 적이 있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지원을 온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상천이 다시 돌아왔을 때 하신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문주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구색을 갖추지 못한 문파의 문주였다. 게다가 나이도 어렸다.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운 좋게 절정에 오른 무공 실력 하나뿐이었다.

물론 나이에 비해 침착하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상천이 돌아왔을 때 안도감이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힘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또다시 상천이 자리를 비웠다. 사실 상천이 밖으로 나가겠다고 했을 때 적어도 고현과 조운겸은 함께 나섰어야 했다.

자신보다 어리고 삼류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자그마한 문파의 문주가,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자신들과 관련 없는 문파의 일에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데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와서 나서는 꼴이라니.

너무 속 보이는 태도에 하신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저들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자신을 비롯한 반월도문의 생존자들은 은남도문에 몸을 의탁하러 가는 길이니까.

‘문주님이 계셨다면…….’

지금 이 순간 하신은 나군천의 빈자리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비밀통로를 빠져나온 시간은 노을이 지기 시작했을 시간이었다. 통로를 빠져나와 속도를 올려 이동한 지 반 시진 만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동하려고 마음먹으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칫 어둠을 틈타 적이 공격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었다.

결국 고현은 더 이상 이동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이를 하신에게 알렸다.

형식은 의사를 묻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통보’나 다름이 없는 그 의견에 하신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산이나 구릉이 아닌 평야라 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면서 노숙을 하기로 결정이 났고, 무인들은 서둘러 노숙 준비에 들어갔다.

사실 준비라고 해봤자 쪽잠이라도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땅을 고르는 정도뿐이었지만.

한기를 겨우 쫓을 수 있을 정도로만 작게 모닥불을 피운 무인들은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주변을 경계했다.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많이 쌓인 상태였지만 간단한 운기를 통해 겨우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하신의 자리는 고현, 조운겸 등과 가까운 곳에 마련되었다. 고현과 조운겸은 아무렇지 않은 듯 했지만 하신은 그 자리가 굉장히 불편했다.

차라리 반월도문 무인들과 가까운 곳, 혹은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문주님은 괜찮으실는지… 백룡문주는?’

하신은 지금 이 순간 나군천과 상천이 눈물 나게 보고 싶었다. 하지만 생사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 그 때문에 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외롭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축시에 막 접어든 시간이 되자 간간이 들리던 대화소리도 거의 줄어들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주변에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 정도였다.

고현과 조운겸도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듯했다. 하지만 하신은 누워서도 잠에 들지 못했다.

피로가 쌓여 눈은 충혈되고 시큼해 제대로 뜨고 있기도 어려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반월도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등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상념에 사로잡힌 채 얼마나 뒤척였을까.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석장로님!”

고현을 찾는 목소리. 그 말이 들리기도 전에 고현은 이미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선 상태였다.

“무슨 일이냐!”

날카롭게 곤두선 목소리로 고현이 물었다. 고요하던 주변 공기도 어느새 숨 막힐 정도로 삭막하게 변해 있었다.

하신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삼키고 있었다.

다급하게 고현을 찾은 은남도문의 무사는 대답 대신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고현과 조운겸, 그리고 하신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이 불빛을 받아 또렷해지자 하신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제왕무적대주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걸어오고 있는 나군천의 모습이었다.

“문주님!”

하신이 놀람과 반가움, 그리고 감격스러움이 고루 섞인 목소리로 나군천을 향해 달려갔다.

“죽어서나 다시 볼 줄 알았는데 살아서 보니 반갑군.”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나군천이었지만 하신을 보니 그 역시도 반가운 마음이 커 가벼운 농을 던졌다.

“문주님… 흐흑!”

결국 하신은 눈물을 보였다. 나군천의 모습을 보니 안도감과 함께 그간 했던 마음고생 등이 뒤섞여 복받쳤기 때문이었다.

하신이 우는 모습을 보니 나군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그간 하신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군사도 늙었군. 눈물을 다 보이고.”

그 말에 하신이 눈물을 훔치며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고현이 다가와 나군천에게 말했다.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지만 나군천은 그 안에서 다른 것을 읽어 내었다.

‘내가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겠지.’

나군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주도권을 쥐고 놓지 않으려는 은남도문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소.”

나군천의 뼈 있는 한마디에 고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지만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백룡문주는?”

“모르겠습니다.”

하신의 대답에 나군천이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작게 한숨을 쉰 하신이 비밀통로를 빠져나오기 전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제왕무적대주에게 부축을 받은 채로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은 나군천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좀 쉬어야겠다.”

그 말에 하신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축을 받으며 서둘러 준비된 자신의 자리로 발걸음을 떼던 나군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인물이 아니다. 백룡문주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거기에는 상천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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