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붉은빛이 감도는 석실.
따뜻함을 아니, 되레 덥게 느껴질 수 있는 빛깔이 감돌고 있음에도 석실에는 한기가 돌았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차가운 석실 한 가운데에 상의를 탈의한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겨울을 연상시키는 한기에도 그 사람, 서기종은 조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표정은 이 정도 한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한 명이 서 있었다.
서기종의 사부였다.
그의 표정 역시 덤덤했지만 눈빛에서만큼은 흡족함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서기종이 해낸 것을 생각하면 사부로서 충분히 그럴 만했다.
물론 그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서기종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성과를 보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목표를 위한 마지막 조각이 완성되고 있었다.
“후우…….”
서기종이 호흡을 갈무리하며 눈을 떴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하얀 입김이 허공에서 부서졌다.
“잘했다, 잘했어.”
“사부님.”
서기종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군마성주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은 어떠하느냐?”
“좋습니다, 아주.”
서기종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제로 자신의 몸 안에서 꿈틀대는 기운을 느끼며 굉장히 흥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정도라면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가 상천이라 하더라도.
“후후. 자, 이제 가자꾸나. 사부와 함께 세상을 활보해 보자꾸나.”
“예.”
서기종이 짧게 대답했다.
사부가 군마성의 성주이고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서기종이었다.
하지만 군마성주의 감언이설과 강해질 수 있다는 유혹은 결국 그를 군마성의 사람으로 바꿔 버렸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서기종의 기척을 느끼며 군마성주는 여전히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가릉과 장무진은 귀령대주의 명령에 따라 비밀통로의 출구가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모든 범위를 수색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말을 달렸다.
말을 모는 두 사람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령대주의 가설이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뻘짓을!’
가릉이 속으로 소리쳤다. 직접 들어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장무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번 임무의 모든 결정권은 귀령대주에게 있는데. 군마성 제 일 장로인 여상도 그의 말을 군말 없이 따르고 있지 않은가.
그런 데다가 지난 번 임무 때문에 성주의 질책까지 받았으니 더더욱 어쩔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짜증이 나도 따르는 수밖에.
“사소한 것도 놓치지 마라!”
포위망을 형성하며 퍼지고 있는 수하들을 향해 장무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귀령대주 때문에 솟구친 짜증을 애먼 수하들에게 풀고 있는 그였다.
“대충 거리가 얼마나 되지?”
“아직 오 리 정도밖에 안 됩니다.”
장무진의 대답에 가릉이 인상을 찌푸렸다. 인원은 한정적인데 어찌 그 넓은 범위를 수색한단 말인가?
“아주 엿 먹이려고 작정을 했군.”
가릉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적은 인원으로 그 넓은 범위를 수색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놓치게 되면 자신들에게 질책이 떨어질 것은 자명한 일. 그처럼 좋은 구실이 또 있겠는가.
가릉의 생각을 읽은 장무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지.”
“물론입니다.”
가릉과 장무진은 이를 갈았다.
하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적을 맡기 위해 되돌아간 나군천의 안위가 걱정이 됐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멀쩡히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비밀통로 밖의 상황이 어떨지, 그리고 뒤에서 쫓아오는 적들의 상황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뒤늦게 다시 합류한 상천의 존재는 하신에게 더 없이 큰 힘이 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고 문파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의 문주라고는 하지만 절정고수라는 위치가 가져다주는 무게감은 상당했다.
어디까지나 실력이 최우선인 무림에서 절정고수인 상천의 존재는 모든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정작 상천은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장 선두에 서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비밀통로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
한참을 걷던 상천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르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리둥절함과 불안감이 동시에 떠올랐다.
상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강한 위화감이 앞쪽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온다?’
아니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위화감은 가까워지지 않고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있었다.
‘통로 바깥이군.’
빛이 보이지는 않고 있지만 통로 바깥에 누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행인 것은 아직 통로의 출구를 찾지 못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만약 찾았다면 그리로 물 밀듯이 밀고 들어왔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상황은 아니었기에 상천은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신을 비롯한 은남도문과 반월도문의 수뇌들이 상천에게 다가왔다. 영문을 몰라 다가왔지만 굳이 상천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들 역시 통로 끝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금방 알아차렸다.
“나가야 합니다.”
하신이 짧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어떻게 뚫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통로의 출구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아무도 이렇다 할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을 때 상천이 하신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순히 위장이 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겁니다.”
“아…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 있습니다. 다만 그 시간이 짧지 않아 다시 닫히기까지는 일 각 정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하신의 대답에 상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나가지요. 적의 시선을 교란하여 혼란스럽게 만들 겁니다. 그 후, 다시 통로를 닫아주십시오.”
상천의 말에 하신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밖에 몇 명의 적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어찌 혼자서… 게다가 적의 시선을 일시적으로 끌 수는 있을지 몰라도 문이 닫히기 전에 발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신의 말대로였다. 성공할 가능성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은 작전이었다. 하지만 상천은 고집을 부렸다.
“걱정 마십시오. 죄송하지만 뒤쪽에 가서 비호와 화룡을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상천의 말에 하신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수하를 시켜 뒤쪽에 있는 비호와 화룡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상천이 부른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온 비호가 굳은 표정의 상천에게 물었다.
“지금부터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일?”
상천의 말에 화룡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바깥쪽에서 느껴지는 심각한 기운을 느끼고 있던 그녀였기에 상천의 말이 더욱 심각하게 느껴졌다.
“부디 지금 제 머릿속에 스쳐가는 그 생각이 맞지 않길 바랍니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비호가 상천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절대 그럴 리 없어’라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들어볼까요?”
상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왠지 자신의 생각이 맞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비호가 조심스레 말했다.
“미끼?”
“후후.”
“정말입니까?”
부정하지 않고 조용히 웃는 상천을 보며 비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룡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말도 안 됩니다. 밖에서 느껴지는 기세만 봐도 적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은데… 밖으로 나가면 인원이 증원될 겁니다. 벌떼처럼 달려들겠죠. 그런데…….”
“두 사람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겁니다. 장담컨대.”
자신만만한 상천의 말에 비호와 화룡은 말문이 막혔다. 죽어도 지금 이곳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뒤도 생각해야 하고요. 어차피 나가야 한다면 앞을 뚫을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겠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앞을 뚫는 방법이 꼭 이 방법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이 열리면 각각 양쪽으로 흩어지십시오. 최대한 시선을 분산시키는 겁니다. 할 수 있다면 기습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상천이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는 웃음기 가신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냥은 제가 합니다.”
오싹.
비호와 화룡은 처음으로 상천이 무섭게 느껴졌다. 절정에 올랐을 때에도, 그 많은 전투에 나설 때에도 이처럼 살벌한 살기를 토해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상천이 낯설게 느껴졌다.
상천은 상천 나름대로 어깨 위의 무게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뒤를 맡은 나군천의 부탁,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욱 독하게 마음먹을 수밖에 없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문주라는 자리의 무게감이 나군천의 행동과 말, 그리고 지금의 상황 때문에 점점 커져 이제는 제법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갑시다.”
그렇게 말한 상천이 하신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상기된 하신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그는 상천이 하려는 일이 자살행위처럼 보일 뿐이었다.
가릉과 장무진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입지가 좁아진 상황에서 이번 임무마저 실패하면 그야말로 끝장이라는 생각에 그야말로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파박!
세 개의 인영이 어느 곳에서 갑자기 튀어 나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들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은 상천과 화룡, 비호였다. 미리 당부한 대로 화룡과 비호는 출구로 나오자마자 양옆으로 빠르게 달렸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화룡과 비호가 흩어지자 적들의 시선이 분산되면서 포위망 역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됐다.’
그것을 본 상천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정면을 응시했다. 우왕좌왕하는 적들의 모습이 상천의 시야에 잡혔다.
‘시간을 끌면 안 된다.’
상천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진기를 머금은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간결하고 빠르게.
상천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전열을 다듬을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자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나, 둘.’
“끄악!”
‘셋, 넷, 다섯.’
“억!”
적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며 검을 뿌려대는 통에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하고 달려들려고 하면 어느새 상천의 검이 목을 꿰뚫고 있었다.
“저놈!”
장무진이 상천을 알아봤을 때에는 이미 열 명 이상이 주검으로 변한 후였다.
잔뜩 구겨진 표정의 장무진이 성큼성큼 상천을 향해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상천의 목을 칠 것 같은 사나운 기세였다.
상천 역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장무진의 기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검을 멈추지 않았다.
목적은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시간을 벌기 위함이지 힘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유인한다.’
파밧!
상천이 지면을 박찼다. 어느 정도 전열을 가다듬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들의 머리 위를 가뿐하게 뛰어 넘은 상천이 힐끗 그들을 바라보더니 정면으로 달려 나갔다.
“잡아!”
장무진이 상천의 뒤를 따라 달리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