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문주님은 반월도문의 정점에 계신 분입니다. 몸이 멀쩡하시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위험한 곳에 가시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후우…….”
하신의 말에 나군천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하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신.”
“예.”
“자네가 뭔가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나군천의 말에 하신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문주이기 전에 한 사람의 무인이야. 치욕을 당하고 되갚아주지 않으면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가지.”
“문주님께서 잘못 알고 계십니다.”
“뭐?”
하신의 반박에 나군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인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문주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문주님은 무인이지만 반월도문의 문주이십니다. 반월도문이라는 이름이 결코 가볍지 않다면 문주님의 어깨에 그 무게가 매달려 있는 겁니다.”
“하아…….”
하신의 말에 나군천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저 멀리 적들이 쫓아오고 있을 어두컴컴한 곳을 바라보았다.
“연비산”
“예.”
나군천이 직속 회위대인 제왕무적대 대주 연비산을 불렀다.
“가서 막아라. 한 놈도 통과시키지 말고.”
“…….”
나군천의 명에 연비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에 나군천이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뭐지?”
“제왕무적대의 임무는 문주님의 곁에서 호위하는 것입니다. 멀어질 수 없습니다.”
“내 명령이다. 제왕무적대는 내 직속이고. 지금 같은 시국에서 명령불복종은 중죄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명령, 받을 수 없습니다.”
연비산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에 나군천이 하신을 보며 물었다.
“군사도 내 말을 안 듣고 내 직속이라는 제왕무적대의 대주도 내 말을 안 듣는다. 내가 문주인가?”
그 물음에 하신과 연비산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에 그들에게서 눈길을 거둔 나군천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나치며 말했다.
“난 문주가 아니다. 무인이다.”
상천과 화룡은 자신들의 뒤로 반월도문과 은남도문의 무인들을 보내고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걸어왔던 통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확실히 적들이 쫓아오고 있기는 한지 미약한 진동과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점점 적들이 가까워지는 것 같자 상천이 세 걸음 정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 뒤로 넘어가는 적들만 확실하게 처리해 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화룡이 당황스러워하며 대답했다.
뒤쪽으로 빠져 나가는 적들을 처리해 달라고는 했지만 왠지 상천의 등을 보고 있으면 아무도 보내지 않을 것 같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도망치고 있는 일행들 쪽에서 두 사람이 빠르게 다가왔다.
전마대주와 비호였다.
조금 앞에 나가 서 있는 상천을 보며 비호가 무슨 상황이냐는 듯 턱짓으로 물었다.
“뒤로 넘어가는 적들만 확실하게 처리해 달라고 하셨어.”
“뭐?”
비호가 놀라며 물었다.
그 말은 상천 혼자 적들을 맞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전마대주가 두 사람을 지나쳐 상천의 옆에 섰다.
자신의 옆에 와서 서는 전마대주를 힐끗 쳐다본 상천이 다시 어두컴컴한 통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는 감사했소.”
“아니오.”
“혹여 짐이 되지는 않을지 모르겠소.”
전마대주의 말에 상천이 살짝 미소를 짓고는 대답했다.
“천하의 철혈전마대주께서 그런 말씀을.”
“예전엔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 들어 착각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던 참이오.”
담소를 나누듯 말하는 두 사람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물을 것이 있소. 그건 이 통로를 나가거든 묻겠소.”
“후후.”
상천의 말에 전마대주가 살짝 웃었다.
자신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을 했지만 쉽게 말하면 죽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럼, 내가 먼저.”
그렇게 말한 상천이 먼저 앞으로 한 발 내딛으며 검을 뿌렸다.
어두운 통로에 비추던 한 줄기 빛에 상천의 검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쒜엑!
상천의 검이 한들거렸다.
굉장히 날카롭게.
스멀스멀 날아드는 상천의 검을 보며 앞서 튀어나오던 귀령대원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귀령대라 하면 군마성 내에서 살귀대보다 더 빠르고 잔인한 부대였다.
그런 그들이 한들거리며 날아드는 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던가?
무림은 상식과 비상식이 공존하는 세계라고.
지금 귀령대의 눈앞에서 그것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냥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나갈 수 없었다.
마치 한들거리는 상천의 검으로 귀령대원들이 달려드는 것 같았다.
상천의 뒤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귀령대원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상천의 검이 자신들의 목 언저리에 닿는 순간까지도 검 한 번 휘두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은 천유보에 있었다.
상천은 극에 다다른 천유보를 응용해 미끄러지듯 바닥을 훑고 있었다.
그것이 워낙 좁은 범위에서 간결하게 이뤄지는 통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넓다고는 하나 공간이 제한적인 비밀 통로 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걱! 서걱! 서걱!
앞선 세 명의 귀령대원 목이 날아갔다.
그에 탄력을 받은 상천은 좀 더 앞으로 나아가며 먼저 적을 맞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상천의 앞으로 치고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전마대주였다.
콰앙!
위력적인 일격에 두 명의 귀령대원이 강한 기파에 휩쓸리며 걸레 조각처럼 변했다.
자신의 앞을 막고 선 그의 등을 보며 상천이 피식 웃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진 빚을 갚는다.’
지난번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적어도 이번 수고만큼은 자신이 나서서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전마대주의 도가 무겁게 허공을 갈랐다.
비록 그가 기마대를 이끌고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 없다 하여 무위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번 살귀대주와의 싸움에서는 고전을 했지만 그때는 철혈전마대 특유의 철갑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움직이기 편한 무복 상태.
그때만큼 상대의 빠른 속도에 고전할 일은 없었다.
전마대주의 도에 귀령대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해갔다. 상천이 나설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전마대주와 상천이 앞에 버티고 있으니 뒤쪽으로 넘어오는 적들이 없었다.
만에 하나 그럴 일에 대비해 뒤쪽에서 검을 들고 대비하던 화룡과 비호는 천천히 검을 내리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때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대원들을 먼저 보내고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던 귀령대주가 전면에 나선 것이다.
꽈앙!
전마대주의 도와 귀령대주의 검이 강하게 부딪쳤다.
대원들이 그렇게 죽어 나갔음에도 귀령대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반면 전마대주의 표정은 사나웠다.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맞부딪친 살귀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군마성을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부숴 버리겠다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귀령대가 나타났으니 이제는 그간 갈아온 이로 깨물어야 할 때였다.
“네놈이 대가리구나.”
전마대주가 귀령대주의 검과 맞댄 도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하지만 귀령대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전마대주는 자신과 검을 맞대고 있는 상대가 종무헌을 쓰러뜨린 귀령대주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전마대주는 지금처럼 그와 검을 맞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귀령대주의 검에 전마대주의 도가 막히자 귀령대원들과 군마성의 무인들이 그를 지나쳐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그 뒤에 상천이 있음을 그들은 간과했다.
쒜엑!
상천의 검이 짧고 빠르게 휘둘러졌다.
천유보를 밟으며 종횡무진 하는 상천의 검은 정확하게 적들의 목을 찌르고 빠졌다.
초식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간결하고 날카로운 검격에 군마성 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런. 여기서 이런 피해를 입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말이죠.”
어둠 속에서 군마성 수석장로 여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면서도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의 등장에 상천은 긴장한 듯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만큼 여상의 존재감이 컸던 까닭이다.
“저자가 나 문주님을 그리 만든 놈이오! 피하시오!”
여상을 알아본 전마대주가 귀령대주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소리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일.
상천은 똑바로 여상을 바라보았다.
전마대주와 상천의 검이 멈추자 군마성 무인들이 물 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통에 비호와 화룡은 정신이 없었다.
적들에게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악물고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고는 있었지만 그 많은 숫자의 적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젠장!”
비호가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화룡은 그 짧은 말 한마디도 내뱉을 정신이 없는지 잔득 찡그린 표정으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퍽! 퍽! 퍽! 퍼퍼퍽!
그때, 두 사람의 뒤쪽에서 호박처럼 단단한 무언가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나군천의 등장이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나직한 한마디였지만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이기도 했다.
나군천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며 도를 휘둘렀다.
다리에 힘을 주며 도를 휘둘렀기 때문에 봉해놓은 다리 쪽 상처가 다시 터져 절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군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지나쳐 가려는 적들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나군천이 가까이 다가오자 눈빛을 교환한 비호와 화룡은 그가 자신들이 지나쳐 감과 동시에 그의 뒤쪽으로 빠져 주었다.
그 편이 훨씬 더 부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군천의 기세 때문일까.
적들이 쉽게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여유를 가진 나군천이 여상과 대치하고 있는 상천에게 말했다.
“그자를 내게 양보해 주시겠소, 백룡문주?”
“괜찮으시겠습니까?”
상천이 물었다.
여느 때 같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나군천이다.
감히 자신에게 백룡문의 문주 따위가 안위를 걱정한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상천이 절정에 들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은 상태였고, 자신이 질 것을 염려한다기보다는 자신의 부상을 걱정하여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소. 이 자리에서 죽어도 저놈 목은 내 손으로 따야겠소.”
“문주님.”
동귀어진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나군천의 말에 상천이 걱정스러운 듯 그를 불렀다.
그러자 나군천이 걱정 말라는 듯 상천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난 문주가 아니라오. 이제는 그저 한 사람의 무인일 뿐이오.”
그렇게 말한 나군천이 상천을 지나쳐 여상과 대치했다.
“오랜만이군요. 한동안 못 걸을 줄 알았는데, 대단하십니다.”
여상이 특유의 웃는 낯으로 나군천을 맞았다. 그에 나군천 역시 싸늘한 미소로 그의 말을 받았다.
“죽일 놈이 있으니 저절로 움직이더군.”
“후후.”
나군천의 서늘한 한마디에 여상은 살짝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군천이 여상과 대치하자 군마성 무인들이 다시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룡문주, 뒤를 부탁하오.]
나군천이 상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상천이 절정에 올랐다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무위를 가졌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앞서 간 이들을 통틀어 상천보다 강한 무위를 가진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현재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상천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군천의 전음을 받은 상천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은 이제 고작 스물두 살의 어린 청년이다.
백룡문의 문주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문파의 문주도 아니다. 경험이 일천하다는 뜻이다.
단순히 무공으로 사람들을 지키고 위험을 막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백룡문의 안위로 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군천의 전음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군천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신은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반월도문과 은남도문의 무인들이 적들의 손에 죽어가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천에게 부탁한다고 한 것은 그 이상을 부탁한다는 뜻이리라.
앞서 간 이들을 통제하고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하신이나 장로들이 도맡아 하겠지만 어느 정도 상천이 의견을 개진해 달라는 의미였다.
나군천과 전마대주가 길을 막았다.
지금도 적들은 계속해서 앞서 간 이들을 쫓아 밀려오고 있었다.
“갑시다.”
상천이 비호, 화룡과 함께 앞서 간 이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한참 따라 가던 상천은 빠르게 적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는 제왕무적대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