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18화 (118/141)

#118화.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군마성도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 반월도문 처리의 총괄을 맡은 귀령대주는 반월도문을 살피기 위해 미리 척후를 보내놓은 상태였다.

대원들과 군마성 무인들이 또 한 번의 싸움을 위해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던 귀령대주는 척후가 돌아오는 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반월도문을 살피고 돌아온 척후가 귀령대주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정문을 굳게 닫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농성을 할 모양입니다.”

척후의 말에 귀령대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농성.

지금 상황에서 가장 상대하기 싫은 전술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반월도문이 농성을 하기로 했다면 시간이 더욱 오래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이도 나군천의 성격 덕분에 정면 대결을 펼칠 수 있었고, 반월도문을 톡 건드리면 쓰러질 정도까지 몰아붙일 수 있었다.

그런데 농성을 하기로 작정한 듯 보인다니 당연히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귀령대주의 주름이 펴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척후에게 명령을 내렸다.

“혹여 비밀통로가 있을지 모른다. 도균현에서 오고 있는 동료들에게 서신을 띄워 반월도문을 중심으로 이십 리 안을 철저히 감시하라 일러라. 명심해라. 이십 리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척후가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가까운 곳에 있던 군마성 수석장로 여상이 다가왔다.

“이십 리면 너무 넓지 않습니까? 그렇게 긴 비밀통로를 만들어놨으려고.”

여상은 자신보다 직급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귀령대주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그는 군마성 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저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 하나는 말 그대로 농성이고 다른 하나는 농성으로 위장하고 도망치는 것. 도망친다고 하면 은남도문으로 갈 것이 뻔하고 그러려면 비밀통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십 리면 너무 넓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짧은 비밀통로는 이용하나 마나입니다. 금방 덜미가 잡힐 수 있으니. 긴 것이 있을 겁니다. 반월도문에서 이십 리 밖으로 연결된 비밀통로라면 은남도문까지 가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겁니다. 만약 있다면 말입니다.”

귀령대주의 말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여상은 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는 듯했다.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귀령대주가 말을 이었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만약 없다면 그것도 우리에게는 나름대로 좋은 일이 될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요. 뭐, 이번 일의 전권은 귀령대주에게 있으니 전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여상이 자리를 피했다.

그에 귀령대주의 시선은 여상의 등을 넘어 반월도문이 있는 곳에 닿고 있었다.

도균현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가릉은 기분 좋게 반월도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 서신 한 장을 받았다.

귀령대로부터 날아든 그 서신을 받은 가릉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곧장 반월도문으로 오지 말고 비밀통로가 있을지 모르니 반월도문을 중심으로 이십 리를 수색하라는 ‘명령’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았다고는 하지만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귀령대주에게 명령을 받으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같은 말이라도 부탁하는 형식과 명령하는 형식이 다를진대 기분 나쁘게도 서신은 명령조로 쓰여 있었다.

서신을 다 읽은 가릉은 곧바로 구겨 버렸다. 그리고는 곁에 있는 장무진에게 말했다.

“인원을 셋으로 나눈다. 반월도문을 중심으로 동, 서, 북쪽 이십 리 이내를 샅샅이 탐색하라.”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장무진의 목소리 역시 좋지 않았다.

가릉이 일부러 가리고 보지 않았고, 까막눈이 아니라면 서신에 뭐라 쓰여 있었는지는 그도 읽을 수 있었다.

가릉과 장무진은 자신들의 왼쪽 어깻죽지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군마성주의 명령이었다고는 하지만 선처 한 번 부탁하지 않고 잘라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 두 사람은 귀령대주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 감정이 남아 있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이런 서신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쨌든 명령권자는 귀령대주이기 때문에 달갑지 않아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무진은 빠르게 가릉의 말을 전하며 일행을 세 무리로 나누었다.

그러자 가릉이 나서서 각각에게 임무를 정해주며 출발시켰다.

가릉과 장무진은 마지막으로 남은 일행들을 데리고 서둘러 북쪽으로 향했다.

반월도문을 떠나 도망친다면 은남도문으로 갈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

그렇다면 자신들이 직접 나서 그 일행들을 소탕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빠르게 달려 나갈 때마다 두 사람의 빈 소매가 거칠게 펄럭였다.

비밀통로는 생각보다 밝았다.

상당히 공을 많이 들였는지 야명주도 많이 박혀 있었고, 폭도 생각보다 넓었다. 게다가 길도 깔끔하게 잘 닦여 있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비밀통로를 지나가고 있었지만 불편함 없이 지날 수 있을 정도였다.

무리의 중간쯤에 섞여 걷고 있는 상천 일행은 비밀통로가 신기한지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딜 봐도 똑같은 모습이건만 그래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특히나 상천은 야명주도 처음 보기 때문에 더욱 신기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때 화룡이 상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얼마나 가야 할까요?]

[이 통로가 옹안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족히 사흘은 가야 하지 않겠소?]

[그렇군요.]

그것을 끝으로 화룡은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답답한 모양이었다.

중간중간에 공기가 통할 수 있게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지만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정작 화룡이 인상을 찌푸린 이유는 사흘이라는 시간 때문이었다. 생리 현상 같은 것도 해결을 해야 할 텐데 마땅치 않을 듯했고, 야명주가 있다고는 하나 어두운 통로를 걷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속도 좀 올리면 좋으련만.”

화룡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비호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는 하지만 누구 하나 입 여는 사람 없는 고요한 통로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크게 들렸다.

게다가 지하에 있는 통로이다 보니 목소리가 울렸고, 그 때문에 더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그의 말에 비밀통로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 중 일부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 비호가 재빨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 연기를 했고,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은 다시 앞을 보며 걸었다.

조용히 상황을 넘기자 비호는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룡은 그런 비호를 한심하다는 듯 째려보았다.

비호는 민망한 듯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애꿎은 허공만 바라보았다.

[조용히 따라 갑시다.]

[……예.]

이어진 상천의 전음에 비호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나마 천장에 뜨문뜨문 나 있는 구멍을 통해 빛이 들어왔다 사라지는 것을 보며 하루가 지나가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비밀통로에 들어오고 이틀이 지났다.

하지만 앞쪽에는 여전히 어둠만 있을 뿐, 출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통로가 아닌 밖에서 풍경을 보며 걸었다면 더없이 즐거웠을지 모를 이틀의 시간이 지금은 너무 지겹고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은 지금 현재 적들에게 쫓겨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망각해 가고 있었다.

그저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만 굴뚝같았다.

그런 마음은 상천이나 비호, 화룡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걷기만 했을 뿐인데 그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빛도 잘 들지 않는 비밀통로를 걷기만 하는 것도 지칠 일인데 먹는 것도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로 때우고 있어 더욱 지쳤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나아가는 속도도 느려졌고, 비밀통로를 빠져나가기까지 아직도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삼 일째 되는 날이 되었다.

화룡은 상천이 삼 일 정도를 예상하고 말했기 때문에 은근히 ‘오늘은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띄게 느려진 속도 때문에 나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은 여전했다.

“후우…….”

비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걷는 것도 자신의 힘으로 걷는 것인지 앞으로 걸어 나가는 관성 때문에 걷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비호, 앞으로 가서 군사에게 전하시오. 속도를 올리라고.]

때마침 들린 상천의 전음에 비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금까지 묵묵히 참고 걸어 온 상천도 드디어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화룡, 나를 따라 뒤쪽으로.]

상천의 전음에 화룡은 그와 함께 뒤쪽으로 처졌다.

그것을 본 비호는 자신만 놔두고 뒤로 빠지는 두 사람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서두르시오! 뒤쪽에 추격이 있소!]

이어진 상천의 전음에 화들짝 놀란 비호는 그제야 사람들을 제치고 앞쪽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상천과 화룡은 뒤쪽으로, 비호는 앞쪽으로 달려 나가자 비밀통로를 지나는 무인들은 별안간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속도를 올려야 합니다! 뒤쪽에 추격이 있습니다!”

비호가 앞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작은 소리도 울려 멀리까지 들리는 비밀통로였기에 그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들렸다.

비호의 말에 무인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이미 도망치는 순간부터 전의를 상실한 그들이었기에 적이 뒤쫓아 오고 있다는 소식에 서로 먼저 앞서나가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갈!”

그때 선두에 있던 나군천이 뒤쪽을 향해 일갈을 내질렀다. 그러자 우왕좌왕하던 무인들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심한!”

나군천은 진심으로 그들을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반월도문과 은남도문의 무인이었다.

물론 무공을 모르는 일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사도련의 수위를 다투는 두 문파의 무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나군천은 한심스러움과 함께 절망을 맛보았다.

“저도 뒤쪽으로 가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쪽에 있던 전마대주가 나군천에게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자신의 도를 든 채 뒤쪽으로 달려갔다.

앞쪽에 당도한 비호는 뒤쪽으로 달려 나가는 전마대주를 보고는 나군천이 있는 쪽을 힐끗 한 번 바라보았다.

“젠장! 똥개 훈련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한 비호도 곧장 뒤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내가 가겠다.”

“안 됩니다.”

적이 쫓아오고 있다는 말에 그리로 가려는 나군천의 앞을 하신이 막아섰다.

그에 나군천이 두 눈에 불꽃을 만들어내며 하신을 노려보았다.

“비키게.”

“절대 안 됩니다.”

하신이 나군천의 눈을 피하지 않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