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17화 (117/141)

#117화.

상천과 비호, 화룡이 떠난 후 백룡문은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축 처진 분위기에 다들 말없이 그저 자신들 할 일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배동삼만이 항상 활기차게 수련하며 모든 일에 임하고 있었다.

상천이 반월도문에 들어가 하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공혜는 연무장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난히 밝은 달이 연무장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안 자고 뭐 해요?”

그런 그녀의 곁에 장여진이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슬쩍 그녀를 한 번 쳐다 본 공혜가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요. 예전에는 오라버니가 왜 맨날 연무장 위에 앉아 있을까 싶었는데 이젠 좀 알 것 같아요.”

“이유가 뭔데요?”

“여기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하늘을 보게 돼요. 평소에는 하늘 한 번 볼 시간이 없는데 저렇게 예쁜 밤하늘을 볼 수 있으니까요.”

공혜의 말에 장여진도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말처럼 밤하늘이 정말 예뻤다.

“오라버니는 무사하겠죠?”

“그럼요. 무사할 거예요. 사도련 내에서도 상천을 이길 수 있는 고수는 많지 않아요.”

장여진이 걱정 말라는 듯 얘기했다.

“오라버니 좋아하죠?”

장여진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공혜가 불쑥 물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장여진은 당황하여 순간적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공혜는 애초에 그녀의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말을 이어갔다.

“저도 오라버니 많이 좋아해요. 그런데 오라버니는 절 그냥 동생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건 괜찮은데…….”

잠시 말을 끊은 공혜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안 괜찮은 건 오라버니가 장 소저는 여자로 보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게 참 슬퍼요. 등을 바라봐야 하니까요.”

공혜의 말에 장여진은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니가……. 언니라고 해도 되죠?”

“그럼요.”

공혜의 말에 장여진이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래서 언니가 참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해요. 그러다가도 또 언니보다는 오라버니가 야속하기도 하고요.”

장여진은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묵묵히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뿐.

장여진은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 후로도 공혜는 계속해서 안에 있는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놓았다.

저잣거리에서 술 한 잔하고 돌아오던 서기종은 정문 밖에서 공혜와 장여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왠지 지금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백룡문 주변을 좀 걷다가 들어가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저잣거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서기종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잘 지냈는가?”

“어르신?”

서기종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지난번 연하로 떠났던 그 노인이었다.

“아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연하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서기종이 놀람 반 반가움 반에 물으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갔다 왔지! 허허. 내 자네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발길 재촉해 왔다네.”

“무엇입니까?”

“잠깐만 기다리게나.”

그렇게 말한 노인이 등에 메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여기 있구나. 자, 이걸세.”

노인이 짐 속에서 꺼낸 것을 본 서기종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에 노인이 꺼낸 것을 들고 일어서며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가?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말하며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노인의 손에 들린 것을 보는 서기종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머리였다.

사람의 머리를 주겠다고 가져온 것도 놀랄 일인데 그 머리는 서기종도 아는 얼굴이었다.

사문이었던 천중문의 문주이자 사부님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은 사숙의 머리였다.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하는가? 대신 복수를 해주었는데.”

노인이 얼이 빠져 있는 서기종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그에 서기종은 뒤로 물러나며 날카롭게 물었다.

“누구냐.”

“알지 않은가? 지난번에 자네 문주 소식 알려주었던 그 늙은이지.”

“헛소리 말고.”

서기종이 차갑게 말하자 노인은 천천히 미소를 거두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머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가르쳐 준 건 잘 써먹고 있구나.”

“무슨 소리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하는 노인을 보며 서기종이 물었다.

여차하면 검을 뽑을 준비도 하고 있었다.

“지금 네 검으로 날 벨 수 있을 것 같더냐? 무례한 놈!”

“누구냐고 물었다.”

서기종의 말투는 날카로웠다. 그에 노인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눈썰미가 없구나. 이 얼굴을 하고 있어도 알아볼 줄 알았는데.”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징그러운 모습에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서기종의 두 눈이 어느 순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노인의 눈, 코, 입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확 변한 얼굴.

하지만 서기종은 그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사, 사부님?”

“이제야 알아보겠느냐?”

서기종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죽은 줄 알았던 그의 사부였다.

“잘 지냈느냐? 뭐, 나름대로 잘 지낸 것 같긴 하구나.”

“사부님은 돌아가셨는데…….”

넋이 나간 서기종은 사부의 물음에 대답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체는?”

“……?”

“내 시체를 직접 봤느냐 묻고 있다.”

사부의 물음에 서기종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천중문 밖으로 빼낸 노인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 직접 시신을 본 적은 없다.

“눈으로 직접 시신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단정 짓지 말아야지. 세상 모든 일은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가르쳤거늘. 쯧쯧.”

사부의 말에 서기종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사부님인가? 살아 계셨던 거야? 꿈인가? 아니면 현실?’

“얼굴 좀 보자꾸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부가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서기종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생각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꾸나.”

그 말에 서기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 노인과 마찬가지로 서기종의 얼굴도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징그러운 모습이었지만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 얼굴이지.”

서기종의 얼굴도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낭인들 세계에서 굴러먹기에는 아까운 미공자의 모습이다.

“궁금한 게 많겠구나. 일단, 그렇게 원망하고 또 원망했던, 우리 사제간을 생이별하게 만들었던 그 천중문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단다.”

사부의 말에 서기종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 혼자 한 일이다. 괘씸한 놈들 아니더냐? 내 손으로 직접 저승으로 보내줬다.”

믿을 수가 없었다.

천중문이 무슨 동네 무관도 아니고 어찌 혼자의 힘으로 무너뜨린단 말인가?

그때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가자꾸나. 이렇게 만났는데 떨어져 살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 말에 서기종은 머뭇거렸다.

백룡문 때문이다.

서기종의 머뭇거림에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곧바로 자신을 따라나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머뭇거리는 게냐? 백룡문 때문이더냐?”

“그렇… 습니다.”

“이제 그곳은 머릿속에서 지우거라. 넌 더 큰 물에서 활개 칠 수 있는 그릇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마.”

그 말에도 서기종은 선뜻 따라나서지 못했다.

그런 제자의 모습에 사부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정녕 백룡문도 세상에서 지워져야 따라나서겠느냐?”

“안 됩니다!”

사부의 말에 서기종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러니 함께 가자꾸나. 나도 네가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백룡문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구나.”

그렇게 말하며 사부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서기종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사부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사부의 표정도 다시 부드럽게 변했다.

“그래, 그래야지.”

사부가 자신에게 다가온 서기종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듣고 싶은 것도 많고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해주고 싶은 것도 많구나. 가서 회포를 풀자꾸나.”

그렇게 말하며 사부는 서기종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엉! 엉!”

그러자 서기종은 그의 품에서 나이에 맞지 않게 펑펑 울었다.

그간 가슴에 안고 살아왔던 죄책감과 여러 가지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온 까닭이었다.

그런 그의 등을 토닥여 주는 사부의 눈빛은 굉장히 차가웠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렇게 서기종은 아무 기별도 없이 백룡문을 떠났다.

***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면서 반월도문의 움직임은 분주해졌다.

다들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군천의 표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

사도련의 일익인 반월도문이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문주로서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문주님, 준비 다 되었습니다.”

하신이 다가와 말했다. 그에 나군천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가지.”

그렇게 말하며 나군천이 먼저 걸었다. 아직 허벅지가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던 비호가 말했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인데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소?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오. 이렇게 도망치는 게 좋을 리 없겠지.”

“그래도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왕 결정한 거 옆 사람 마음이라도 좀 편하게 해 주면 좋으련만.”

비호의 말에 화룡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리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소? 어서 갑시다.”

“우리도 은남도문으로 가는 건가요?”

비밀통로로 향하는 다른 무리에 섞여 걷는 상천에게 화룡이 물었다.

“아니오. 저 비밀통로가 옹안까지 이어져 있다고 하니 일단은 동행하다가 문파로 돌아갈 생각이오.”

“그냥 이대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요?”

화룡의 물음에 상천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상천에게는 반월도문이나 은남도문보다는 백룡문의 안위가 더욱 중요했다.

“일단은 돌아가서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다들 걱정하고 있을 텐데.”

상천의 말에 비호와 화룡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난장판인 시국이지만 그나마 백룡문은 그 풍파를 용케 비켜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 운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어느덧 백룡문이 내 집처럼 느껴지는구나.’

비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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