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살귀대주의 검을 보며 전마대주 역시 힘차게 도를 마주쳐 갔다.
까앙!
거친 쇳소리가 울렸다.
힘에서는 전마대주가 앞섰지만 유연함이나 빠르기는 살귀대주가 더 위였다.
깡! 깡! 깡! 깡! 깡!
살귀대주는 속도를 앞세워 전마대주를 압박해 갔다.
정신없이 움직이며 사방에서 뿌려대는 살귀대주의 검에 전마대주는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상대의 공격을 받아갔다.
하지만 전마대주의 힘을 살귀대주의 속도가 이기고 말았다.
쒜엑!
‘아뿔싸!’
집중에 집중을 했음에도 전마대주는 살귀대주의 움직임을 놓쳤고, 결국 자신의 목을 상대의 검에 무방비로 내어주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깡!
죽었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청아한 쇳소리와 함께 자신의 목이 멀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슬쩍 눈을 뜬 전마대주는 목을 찌르려던 검을 막고 상대로부터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낯선 청년을 보았다.
상천이었다.
“누구시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때가 아닌 것 같소! 얼른 대원들을 수습해 반월도문으로 가시오! 그곳이 위험하오!”
다급한 상천의 말에 전마대주는 그의 정체에 대해 고민할 틈도 없이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절이 조금 안 되는 전마대원들이 살아남았고, 적은 대부분이 쓰러져 있었다.
아까 들었던 비명 소리는 전마대원들의 것이 아닌 적의 것이었다.
‘이자가 한 것인가? 누구지? 믿어도 되는 자인가?’
전마대주는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상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얼른 반월도문으로 가시오!”
상천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전마대주가 남은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반월도문으로 돌아간다! 서둘러라!”
그의 명령에 자신들의 말을 지킨 몇 안 되는 전마대원 중 한 명이 말을 전마대주에게 내주었다.
“말을 지킨 대원들은 즉시 나를 따른다! 나머지 대원들도 최대한 빨리 따라 오도록!”
그렇게 말한 전마대주가 힘껏 말의 배를 차며 반월도문 쪽으로 달려나갔고, 여섯 명의 대원이 말을 달려 그의 뒤를 쫓았다.
나머지 대원들은 두 다리로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살귀대원들의 숫자는 다섯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세 명은 멀쩡한 듯 보였고, 두세 명 정도는 부상이 심해 거동하기가 어려웠다.
나머지는 모두 염라대왕 앞으로 불려간 모양이었다.
곁눈질로 그것을 확인한 살귀대주가 차가운 표정으로 상천을 노려보았다.
“네놈 짓이렷다?”
살벌하게 묻는 살귀대주를 보며 상천은 묵묵부답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검을 쓰는 것을 보니 반월도문 놈은 아닌 것 같고. 누구냐, 넌?”
“백룡문주다.”
“뭐?”
상천의 말에 살귀대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문파다.
“귀주성 백룡문 사십오대 문주 상천이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나타나서 영웅 행세를 하려 하는구나! 죽여주마!”
살귀대주가 빠르게 움직이며 상천을 향해 검을 뿌렸다.
상천 역시 그의 검에 맞서 단월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귀대주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상천이 망혼대주 공효를 죽인 그 상천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비호와 화룡이 이틀 동안 거의 쉬지 못하고 죽어라 달려 반월도문에 도착한 때는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반월도문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언뜻 보기에 서 있는 사람의 숫자보다 누워 있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은 것 같았다.
“늦었나?”
“몰라! 일단 뛰어들어!”
화룡의 말에 비호가 땅을 박차며 소리쳤다.
거의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많이 힘들고 지친 상태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적진에 뛰어든 비호와 화룡은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적들을 향해 검을 뿌렸다.
서걱!
“오호! 이놈들은 잘 잘리는데?”
지난번에 마주쳤던 적들만 생각하고 내력을 가득 담아 검을 휘두른 비호는 적의 몸이 베이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해볼 만하지!”
자신감이 생긴 비호가 더욱 힘차게 검을 뿌렸다.
비호와 화룡이 나타나 일순간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반월도문과 은남도문 무사들의 숫자는 반절 이상 줄어 있었고, 적은 아직도 많았다.
비호와 화룡이 갑자기 나타나 급습하여 쓰러뜨린 적의 숫자는 고작 열 명 남짓이었다.
은남도문의 고현과 조운겸 등이 분발하고는 있었지만 전력 자체가 워낙 약했다. 반월도문의 장로들도 대부분이 도균현에 가 있어 적을 강하게 몰아칠 수 있는 고수의 숫자가 모자랐다.
특히나 문주인 나군천이 적 한 명에게 붙잡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 치명적이었다.
초반 나군천이 종횡무진하며 적을 향해 도를 쳐갈 때까지만 해도 아군의 기세가 높았고 실제로 대등한 싸움을 가져갔지만, 나군천의 발이 묶이면서 급격히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만큼 나군천의 힘과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나군천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는 설렁설렁 하는 것 같으면서도 위력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자잘한 자상들은 나군천이 움직이는 데 상당히 방해가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계속해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상대의 표정이 제일 거슬렸다.
쾅! 쾅! 콰앙!
나군천이 자신의 독문 무공인 진천십팔도(振天十八刀)를 매섭게 몰아쳤다.
잔뜩 응축되어 있던 진기가 상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 폭발했고, 그 무엇도 나군천의 진천십팔도를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대는 여전히 한들거리는 검을 진천십팔도에 마주쳐 갔다.
누가 보더라도 나군천의 도가 상대의 검을 부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콰쾅!
상대의 검에도 상당한 진기가 응집되어 있었는지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이 울렸고, 나군천의 도는 상대의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한 채 멈추어야만 했다.
끼기기긱!
쒜에엑!
맞대고 있던 나군천의 도를 검을 살짝 비틂으로써 흘려 버린 상대는 날카롭게 검을 찔렀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던 나군천은 재빨리 도를 회수하며 뒤로 물러섬과 동시에 상대의 검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온몸의 상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갑작스럽게 무리한 움직임을 가져가다 보니 온몸에서 찌릿찌릿한 통증이 올라왔고, 아주 미세한 차이로 그의 움직임이 둔화되었다.
촤악!
“큭!”
나군천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충분히 그의 목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상대는 나군천의 허벅지에 깊은 자상을 남겼다.
제법 깊은 상처를 부여잡은 나군천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상대는 그 모습을 검을 늘어뜨린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군천은 급히 임시방편으로 혈도를 점해 지혈한 뒤 이를 악물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다리에 생긴 상처 때문에 보법을 펼치기가 힘들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체에 제대로 된 힘을 싣기가 어려워 위력적으로 도를 뿌리기도 어려웠다.
모든 면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
나군천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꼈다.
‘이게 군마성인가?’
말로만 들었던 군마성.
과거 중원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던 군마성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조금 여흥을 즐기다 보니 너무 오래 살려두었군요. 이제 그만 끝을 봐야겠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상대가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을 한 채 천천히 나군천에게로 다가갔다.
“그래도 박수를 쳐드리고 싶군요. 아무리 여흥을 즐겼다지만 이 나를 상대로 지금까지 살아 계시다니. 역시 나군천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오만한 말.
하지만 상대의 입에서 나오니 결코 그것이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스윽.
상대가 검을 들어 올렸다.
이제 진짜 끝을 보려는 듯했다.
나군천은 이를 악물고 진기를 끌어올리며 도를 움켜쥐었다.
임시방편으로 지혈을 했던 다리에서는 다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희망을 드리지요. 궁금하실 겁니다. 군마성의 장로가 이 정도로 강한가? 후후. 저는 군마성의 수석장로입니다. 그 말은 군마성 내에 저보다 강한 사람은 성주님밖에 없다는 뜻이지요. 반월도문의 문주님께서 저를 상대로 이 정도로 버티셨으니… 은남도문의 가 문주는 절 이길 수 있을까요?”
상대의 말에 나군천은 이를 악물었다.
가백현의 무위는 자신보다 한두 수 앞설 뿐이다. 물론 그 한두 수 앞서는 게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눈앞의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는 만들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이렇게 끝낼 순 없다. 팔 하나라도 가져가겠다!’
속으로 다짐한 나군천은 단전에 있던 진기를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끌어올렸다.
그간 자신이 갈고닦은 진천십팔식의 정수를 이 자리에서 모두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나군천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살귀대주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속도와 유연함은 상천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이고 유연함을 바탕으로 한 기묘한 공격을 해도 상천은 모두 막고 피했다.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격까지 해오니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겨우겨우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마치 자신의 공격을 모두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흐름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과장을 좀 더 보태면 자신의 무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살아남은 살귀대원들이 함께 협공에 나섰기에 아직까지 큰 부상 없이 상천과 마주하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살귀대주의 곁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대원이 없었다.
협공을 할 대원이 없다는 것.
그것은 자신 혼자 상천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살귀대주는 망연자실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상천의 몸에 생채기라도 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상천은 견고했고, 반격은 날카로웠다.
남아 있던 살귀대원을 모두 처치한 상천이 피 묻은 얼굴로 살귀대주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그의 눈빛에 살귀대주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상천이 그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살귀대주는 자신의 수명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상천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어 검을 뻗으면 닿을 정도가 되었을 때, 살귀대주가 이를 악물고 검을 뿌렸다.
수세에 몰려서는 승산이 없었다.
끊임없이 공격을 해서 없는 틈이라도 만들어내야 했다.
챙! 챙! 챙!
빠른 속도로 연달아 찌른 공격이 모두 상천의 검에 막혔다.
상대가 공격을 해오고 있음에도 상천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점점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쒜엑!
짧고 빠르게 찌른 살귀대주의 검이 상천의 목을 노렸다.
순식간에 지척에 다다른 그의 검은 금방이라도 상천의 목과 몸통을 갈라놓을 것 같았다.
‘됐다!’
살귀대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이렇게 빠른 공격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상천의 목을 꿰뚫는 감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순간 멍했다가 뒤늦게 손목 쪽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통증에 정신이 든 살귀대주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을 볼 수 있었다.
“끄악!”
자신의 손목이 잘렸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지독한 통증이 전신을 관통했고, 그의 입에서는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쒜엑!
그의 비명이 듣기 싫었을까?
빠르게 찌른 상천의 검이 그대로 살귀대주의 목을 찔렀다. 정확하게 성대가 있는 곳이었다.
성대를 꿰뚫린 살귀대주는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그를 지나친 상천은 땅을 박차고 신형을 날려 귀양으로 빠르게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