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혹시 아는 사람들인가?”
“예. 저희 문주님 일행입니다.”
“문주님? 문파가 어떻게 되시는가?”
“백룡문이라고 합니다.”
“백룡문?”
서기종의 대답에 노인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왠지 놀라는 듯한 그의 반응에 서기종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닐세. 들어본 적이 없는 곳 같아서…….”
노인의 대답에 서기종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할 겁니다. 이곳 강구 근방에 있는 자그마한 문파이니. 앞으로 크게 키울 겁니다.”
“그러시구먼. 셋 중에 누가 문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젊던데. 고생들이 많겠네그려.”
노인의 말에 서기종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술이랑 안주 가져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노인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점소이가 노인이 주문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한잔하겠는가?”
“좋지요.”
그렇게 서기종과 노인은 제법 얼큰해질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서기종과 노인은 자정이 넘어서야 주루에서 나왔다. 서기종이야 어느 정도 취기를 몰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노인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주량도 제법 되는지 크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딱히 정해진 곳이 없으시면 저희 문파에 가셔서 주무시고 가지요.”
주루에서 나온 후 서기종이 노인에게 말했다. 그에 노인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이고! 이 늦은 시간에 가는 건 실례 아니겠는가? 강구 쪽에 조카 녀석이 살고 있다네. 그 때문에 여기까지 피난 온 게지. 내 걱정은 마시고 얼른 들어가시게나.”
“그럼 제가 그곳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괜찮대두. 얼른 들어가시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서기종이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지만 노인은 한사코 거절했고, 결국에는 노인 혼자 약간씩 비틀거리며 조카 집으로 향했다.
그런 노인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던 서기종도 곧 백룡문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간밤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었던 서기종은 아침에 눈을 떠서는 문도들에게 전날 주루에서 만났던 노인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흘 전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소식을 들은 문도들은 일단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정오쯤 되었을 때, 서기종은 정문 쪽에서 배동삼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배동삼에 가려 상대가 누구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냥 아는 사람이겠거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 저기 있구만!”
그때, 배동삼과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손가락으로 서기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서기종이 정문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사람이 지난밤에 만났던 노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어르신?”
서기종이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어제 헤어진 후로 그를 다시 볼 것이란 생각은 전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백룡문에서.
“여긴 어쩐 일로…….”
“아시는 분입니까?”
배동삼의 물음에 서기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간밤에 문주님의 소식을 전해주셨던 분이다.”
“아!”
그 말에 배동삼이 손뼉을 딱 치며 아침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여긴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어떻게는,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알려주더구만. 허허!”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웃으며 대답하던 서기종은 노인의 등에 메어 있는 짐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 글쎄 조카 녀석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더군. 그래서 그리로 가려 하네. 그래도 이 동네 와서 아는 사람도 생겼는데 인사는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찾아왔다네. 허허!”
“그럼 간밤에 어디에서 주무셨습니까?”
“그 조카 살던 곳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딱하다고 하룻밤 재워주더군. 이곳 민심이 참 좋아.”
노인의 말에 서기종이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보였다.
“그럼 어디까지 가십니까?”
“좀 멀다네. 연하(沿河)까지 가야 해서 서둘러야 된다네.”
“아, 그러시군요.”
연하까지 간다는 노인의 말에 서기종의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왜 그러시는가?”
“아닙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서기종이 다시 웃는 낯으로 노인을 배웅했다.
“혹시나 연이 닿아 또 볼 수 있으면 그때 또 술 한잔 거하게 하세나.”
“그렇게 하지요.”
자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하는 노인에게 서기종도 밝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리고는 멀어지는 노인에게 서기종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백룡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노인을 보낸 서기종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노인이 가는 곳, 연하.
그곳은 바로 서기종의 사문인 천중문이 있는 곳이었다.
***
대치 상황은 스무 날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적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고, 반월도문 진영이 느끼는 불안감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적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된 상황에서 선공을 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귀주성 곳곳에서 여러 문파들이 모여들고 있었지만 겨우 머릿수가 비슷해졌을 뿐이다.
전력 면에서 차이가 나다 보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적들의 움직임만 보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천 일행도 대치 상황이 끝나기 전에 도균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소식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늦지 않아 다행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제 막 도착한 자신들도 그런데 처음부터 적들과 대치하고 있던 반월도문 진영은 어떻겠는가?
“정신적으로 피로가 많이 쌓였을 겁니다. 이런 상황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월도문 진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비호가 말했다. 상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이런 상황을 유도한 건 아니겠습니까?”
“그건 아닌 것 같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오.”
상천의 말에 비호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라리 선공을 하지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적들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오. 지난번에 대패했는데 이번에도 패한다면 반월도문은 말 그대로 끝장이오.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이대로 대치가 계속된다면 은남도문이나 천중도문 쪽에서도 뭔가 움직임이 있지 않겠소?”
상천의 말에 비호와 화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멀리서 반월도문의 진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간단한 목책으로 벽을 세우고 혹시 모를 적의 기습에 대비해 경계를 강화한 모습에서 현재 얼마나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이 목책으로 다가가자 경계 근무를 서던 반월도문 무사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강구에 있는 백룡문에서 온 문주 상천이오. 우리도 이번 싸움에 함께하려고 하오.”
상천의 말에 경비무사들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세 명이었고, 상천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 백룡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소?”
“증명?”
경비무사의 말에 상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백룡문 문주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소. 하지만 증명해 줄 사람은 있소. 앞서 온 사람들 중 여권문의 문주가 있을 것이오. 그자가 증명해 줄 수 있소.”
“잠시 기다리시오.”
그렇게 말한 경비무사가 목책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있던 다른 경비무사들은 세 사람을 철저히 감시했다.
비호와 화룡은 도와주러 온 사람들을 이리 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꾹 참고 있었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막천풍이 오면 끝날 상황이었다.
잠시 후,
목책 안으로 들어갔던 경비무사가 서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막천풍과 함께가 아니라 혼자 오는 그를 보며 상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권문은 이곳에 오지 않았소! 확실히 백룡문에서 온 사람이 맞소?”
“무슨 소리요? 분명 여권문의 문주와 살아남은 문도 스무 명 정도가 백룡문에 있다가 우리보다 이틀 먼저 이곳으로 떠났소. 오는 길에 만나지 못했으니 분명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오.”
“지난 며칠간 여권문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소!”
“그럴 리가…….”
경비무사의 말에 상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반월도문 옹안 지부장을 불러주시오. 그분도 우리를 증명해 줄 수 있소.”
상천을 대신해서 비호가 나섰다. 오는 길에 옹안지부에 들러 정보를 얻고자 했지만 지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경비무사는 고개를 저었다.
“옹안지부에서도 아무도 오지 않았소.”
“확실하오?”
“그렇소.”
세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없다면 이곳에서 자신들이 백룡문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반월도문 진영이 소란스러워졌다.
“적들이 움직인다! 모두 전투 준비!”
누군가의 외침.
하지만 세 사람을 막아선 경비무사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일단은 물러납시다.”
“예? 적들이 움직인다는데 그냥 물러납니까?”
상천의 말에 비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이곳에 우리가 합류한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옹안 지부장이나 여권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오. 그것을 알아봐야겠소. 서두릅시다.”
비호와 화룡은 과연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상천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천과 비호, 화룡이 물러가자 경비무사들도 그제야 서둘러 목책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불안해하던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적들은 일부러 대치하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자신들과 대치하고 있는 반월도문 진영에 불안감을 심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도균현 인근에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을 이끄는 이는 가릉과 장무진이었다.
규모 면에서나 전력 면에서 얼핏 그들이 반월도문을 치기 위한 주력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반월도문을 치기 위한 주력은 따로 있었다.
귀령대주가 이끄는 귀령대와 가릉을 제외한 군마성 장로 중 세 명이 직접 군마성 무인 오십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통해 은밀하게 반월도문 본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선을 도균현 쪽으로 집중시켜 놓기는 했지만 적어도 귀양과 이틀 거리에 있는 안순(安順)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반월도문에서 눈치를 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굉장히 은밀하면서도 천천히 이동을 하느라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결과적으로 가릉과 장무진이 이끄는 진영은 반월도문을 빈집으로 만들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은남도문에서 보낸 지원군이 반월도문에 도착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역시 존재했다.
망혼대와 흑혈대, 그리고 귀령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군마성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력을 지닌 살귀대(殺鬼隊) 백여 명이 도균현과 옹안의 중간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에 반월도문에 와 있던 철혈전마대가 나섰다.
은남도문 지원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철혈전마대가 반월도문을 벗어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도균현에서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