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막천풍과 여권문도들이 떠나고 정확히 이틀이 지났다.
상천과 비호, 화룡은 도균현으로 떠날 채비를 마치고 정문을 나섰다.
문도 모두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그런 그들을 걱정 말라며 다독였지만 보내는 사람 마음은 또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공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문주님.”
상천의 당부에 서기종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문주님.”
“음?”
문도들을 한 번씩 훑어보고는 떠나려는 상천을 진지한 표정의 배동삼이 붙들었다.
“지난번에 해주신 말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꼭 성장해 있을 테니 돌아오셔서 확인해 주십시오.”
“그래. 그러마.”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세 사람이 백룡문에서 멀어졌다. 배웅을 나온 문도들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 같았던 도균현 인근은 아직까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근방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에 이미 도균현에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간 상태였다.
무림인들끼리 싸운다 하더라도 일반 사람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무림의 불문율로 통용되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사람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대일로 붙는 싸움도 아니고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데 의도치 않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때문에 기물 파손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인명 피해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월도문 쪽에서 미리 사람들을 피신시킨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까지 하고 전투에 임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건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적들은 대치만 하고 있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 덕에 귀주성 곳곳에 있는 문파들이 자발적으로 전선에 합류하여 반월도문의 전력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지만 심리적인 불안감은 그만큼 더 커져만 갔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반월도문 진영 곳곳으로 퍼져 가고 있었다.
백룡문이 있는 강구를 떠난 세 사람은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강구에서 귀양으로 이어지는 관도를 따라 달리던 세 사람은 반월도문의 지부가 있는 옹안에서 도균으로 이어지는 관도로 바꿔 타기로 했다.
백룡문을 떠난 지 이틀째 되는 날.
서두른다고 서둘렀음에도 여경현(余慶縣)을 지나 옹안에 도착하기 전에 해가 저물고 말았다.
저무는가 싶더니 금방 어두워져 결국 세 사람은 적당한 곳을 찾아 노숙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귀주성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지형이라 옹안 쪽으로 갈수록 적당한 구릉들이 보이고 있어 노숙할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적당한 구릉을 찾고 쉴 수 있는 편평한 곳에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은 모닥불을 피웠다.
초봄이라 낮에는 따뜻했지만 해가 지고 나면 겨울 못지않은 추위가 계속되고 있어 모닥불은 필수였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세 사람은 손을 모닥불 가까이 가져가며 추위를 몰아내고 있었다.
“늦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오. 아니, 도착해야만 하오.”
상천의 대답에 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여권문도 상당히 빨리 이동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우리도 상당히 빠르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틀 차이라고는 해도 지금쯤이면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러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도착해서는 막상 지쳐서 못 싸우면 아무 소용없는 건데.”
화룡의 말에 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상천은 그에 대해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짧은 시간이 흐른 후 세 사람이 동시에 검을 살짝 뽑으며 주변을 경계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후,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사람은 초로의 노인이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큰 짐을 등에 지고 힘겨워하며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반쯤 검을 뽑고 있는 세 사람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주저앉았다.
“누, 누구시오?”
깜짝 놀라 주저앉은 노인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에 세 사람은 작게 한숨을 쉬며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았다.
“그냥 지나가는 무림인입니다.”
비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노인이 세 사람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무, 무림인……. 나 죽일 겐가?”
노인이 바들바들 떨며 물었다. 그러자 비호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후…….”
비호의 대답에 노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낑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먼 길 가십니까?”
“피난 가는 길이라오. 살려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이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혹시 도균현 부근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대해서 뭔가 들은 게 있으십니까?”
“도균현? 설마 무사님들도 거기에 가는 길이시오? 어이쿠! 괜히 갔다가 목숨 잃지 마시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시구려. 듣자 하니 칼 든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여 있답디다.”
노인의 말에 비호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아직 싸움이 벌어진 건 아니지요?”
“글쎄, 모르지. 나도 도균현 근처에 사는 사람인데 도망친 지 벌써 꽤 되었으니……. 어쩌면 지금쯤 살벌하게 싸우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노인의 말에 비호가 웃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럼 난 이만.”
그렇게 말하며 노인이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때, 상천이 노인을 불러 세웠다.
“어르신.”
“음?”
상천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노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날도 많이 어두워졌는데 주무시고 가시지요. 괜히 지금 산길 가시다가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괘, 괜찮습니다. 이보다 더 험한 산길도 지금껏 다녔는데 이 정도쯤이야. 허허!”
노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상천의 질문이 다시 한 번 이어졌다.
“이런 험한 산길보다는 관도로 다니시는 게 더 안전할 텐데 굳이 이런 길로 다니십니까?”
“그거야 괜히 관도로 다니다가 칼 맞아 죽을까 봐…….”
노인의 대답에 세 사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난 이만.”
그렇게 말하며 노인이 서둘러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노인이 사라지고 비호가 슬쩍 상천에게 물었다.
“듣고 보니 조금 이상합니다. 굳이 산길로 다니다니.”
“게다가 피난 간다면서 가족들도 없이 혼자 가는 것도 좀 이상합니다.”
화룡이 비호의 말을 거들었다. 그에 상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익힌 듯했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예?”
상천의 말에 비호가 놀라 물었다. 자신이나 화룡은 그 노인이 무공을 익혔다는 흔적은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예민해지셔서 잘못 느끼신 것 아닙니까? 무공을 익혔다면 아까 우리를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비호의 말에 화룡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기를 한 것일 수도 있잖아.”
“연기치고는 너무 자연스럽던데? 진짜 놀란 것처럼 보였어.”
“하긴…….”
그렇게 말하며 화룡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상천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단정 짓는 듯했다.
하지만 상천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노인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상천과 비호, 화룡을 떠나보낸 후 백룡문도들은 하루하루를 걱정 속에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서기종과 녹엽, 낭호 등이 다독이고는 있었지만 그런다고 걱정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이 떠나고 삼 일째 되는 날.
해가 떨어지고 난 후 서기종은 백룡문을 나섰다.
만약에 대비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려면 뜬소문이라도 일단 수집해 둬야 하기 때문이다.
백룡문이 제대로 된 문파의 면모를 갖추고 어느 정도 정보망을 가동할 수 있다면야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지금은 직접 발품을 팔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백룡문을 나선 서기종은 저잣거리로 향했다.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봇짐장수나 상단의 움직임이 많이 위축된 상황이라 예전보다 더 최근의 상황에 대한 소문을 듣기가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눈과 귀를 닫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잣거리에 도착한 서기종은 주루를 찾아 들어갔다.
아무래도 마음 편하게 이 얘기 저 얘기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 주루이기 때문이다.
이런 난리통에도 주루 안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겨우 빈자리를 찾아 앉은 서기종은 간단하게 죽엽청과 교자를 시키고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약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주문한 죽엽청과 교자가 나왔음에도 서기종은 새로운 소문을 건지지 못했다.
‘실제로 별일이 없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사람들의 이동이 적은 건지…….’
“후…….”
서기종이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점소이 한 명이 다가왔다.
“저기…….”
“무슨 일이냐?”
“혹시 합석을 해도 괜찮겠는지 여쭙고자 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자리가 없어서… 간단히 술 한잔하고 가신다니 괜찮으시면…….”
점소이가 굉장히 미안하다는 듯 물었다.
서기종이 힐끗 시선을 돌려 점소이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뭐, 상관없다.”
“감사합니다!”
“고맙네, 젊은이.”
서기종이 합석을 승낙하자 점소이가 꾸벅 허리를 굽혔고, 노인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 인사를 했다.
그에 미소로 화답한 서기종은 다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점소이에게 간단히 술과 안주를 주문한 노인은 주루 안을 한 번 훑어보다가 서기종을 바라보았다.
“누굴 그렇게 보시는 겐가?”
“아닙니다. 그냥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나 듣고 있었습니다.”
서기종의 대답에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 사람들 얘기야 다 거기서 거기지. 먹고사는 얘기가 대부분 아니겠는가? 뭐, 요즘 같은 때에야 사느냐 죽느냐 얘기가 대부분일 테고.”
“그렇지요. 그런데 이곳 분이 아니신 모양입니다?”
“그렇다네. 안 죽으려고 여기까지 피난 온 노인네라네.”
서기종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피난 왔다는 노인의 말에 서기종이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지금 한창 떠들썩한 곳 있지 않은가? 도균현이라고.”
“도균현에서 오셨습니까?”
“그렇다네. 왜 그러는가?”
노인의 물음에 서기종이 나직이 물었다.
“혹시 그곳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허허! 이거 참. 며칠 전에도 그곳 상황 묻는 무사님들이 있었는데. 혹시 자네도 무림인인가?”
“그렇습니다.”
노인의 물음에 서기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피난 올 때까지만 해도 대치만 하고 있었네. 벌써 보름도 전 일이라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고. 삼 일 전에 그 무사님들한테도 했던 말이네. 보름이나 지났는데 벌써 한바탕 난리가 나지 않았겠는가?”
노인의 말에 서기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삼 일 전에 무사들을 만났다고 하셨습니까?”
“그러네만.”
“혹시 세 명이었습니까?”
서기종의 물음에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아니, 그걸 어찌 알았는가? 맞네. 세 명이었네. 남자 둘에 여자 한 명. 귀신일세그려.”
노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서기종이 다시 물었다.
“어디쯤에서 만나셨습니까?”
“어디 보자……. 내가 옹안을 지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옹안에 못 미쳐서겠지?”
노인의 말에 서기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만났다는 무사들은 상천 일행이 분명했다.
‘빨리도 갔군. 지금쯤이면 도균현에 거의 도착했을지도 모르겠어.’
도균현 쪽의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새로운 소식을 들은 것은 없지만 적어도 삼 일 전까지 상천 일행이 무사했다는 소식은 건질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