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막천풍은 백룡문에 온 지 나흘 만에 눈을 떴다.
처음 눈을 뜨자마자 낯선 천장이 보이자 눈을 껌뻑이며 한동안 멍하니 있었고,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온 상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좀 어떻소?”
“죽지 않은 걸 보니 죽지 않을 정도로 아픈 것 같군.”
“후후.”
막천풍의 실없는 농담에 상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농담도 하는 걸 보니 다 나은 것 같군.”
“매정하게 그런 소릴. 그런데 어떻게 된 건가?”
“기억 안 나시오? 하긴, 올 때부터 의식 불명 상태였으니. 난 죽은 줄 알았소.”
막천풍의 물음에 상천이 농을 던지며 말했다.
“수하 얘길 들어보니 적들과 싸우다가 겨우 몸을 빼내왔다고 하더이다. 도망치면서 백룡문으로 가자고 했다던데. 여기가 무슨 난민구호소도 아니고. 그러다가 여기까지 적이 밀고 오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상천의 말에 막천풍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던 모양이군. 뭐, 그래도 여기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안심일세.”
막천풍의 말에 상천이 정색하며 말했다.
“혹여나 적들이 쳐들어오면 막 형부터 앞장세울 것이니 각오하시오.”
“허! 환자를 그렇게 대하려는가?”
“다 나은 것 같구만, 뭘. 막 형이야 몸뚱어리 하나는 튼튼한 사람 아니오? 어지간한 상처엔 꿈쩍도 안 할 것 같이 생겨서는.”
상천의 말에 막천풍이 누운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오긴 했지만 그놈들은… 장난이 아니야. 세상에 괴물이 있다면 그런 놈들이겠지. 힘들이 장난 아니야. 물론 하나같이 무공도 상당하고. 그런 수준의 무인들이 즐비하다면 구파 중에서도 소림, 무당, 화산 정도 수준일 걸세. 사실 말이 사도련이지 사도련은 구파의 발밑도 못 따라가. 수준과 역사 자체가 다르니까.”
막천풍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놈들이 좀 강하긴 하더이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혹시 적들이 여기까지?”
놀라 묻는 막천풍을 보며 상천이 고개를 저었다.
“적들이 여기까지 쫓아왔으면 지금 막 형이 그리 편하게 누워서 나랑 이러고 있을 수 있겠소? 염라대왕하고 입씨름하고 있겠지.”
“자네 말주변이 많이 늘었어. 어쨌건 적들하고 만난 적 있나?”
“뭐, 잠깐.”
“허! 그런데 이리 멀쩡한가?”
막천풍이 놀라자 상천은 자세한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에 막천풍은 얼굴 한가득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자리 털고 일어나면 합시다. 얼른 일어나시오.”
“그러지.”
상천이 막천풍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등에 대고 막천풍이 한마디 했다.
“고맙네.”
막천풍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은 상천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대패를 한 후,
나군천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적들이 본산까지 치고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힘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비록 대패를 하기는 했지만 아예 득이 없었던 것은 아닌 만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보고에 따르면 귀주성 내에 있는 여러 문파들이 적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지만 그 문파들이 결사 항전의 자세로 적들과 부딪치다 보니 적들도 파죽지세로 본산까지 향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나군천은 처음으로 귀주성에 있는 문파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 문파들을 그저 반월도문의 아래에 있는, 자신들을 따라야 할 존재 정도로밖에는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무사히 위기를 넘긴다면 그들에게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귀주성의 중소문파들이야 자신들의 터전이 뭉개질 위험에 처했으니 항전하는 것은 당연했다.
반월도문을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겠다는 생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생각에서 행한 것이 반월도문에 큰 힘이 되고 있었다.
나군천은 자신의 집무실과 처소가 있는 전각 뒤편에 마련된 개인 연무장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이제는 뒤에만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직접 문도를 이끌고 앞장서서 적들을 맞이하겠노라 결심한 상태였다.
꾸준히 수련을 해오기는 했지만 실전에 나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러다 보니 긴장이 되기도 했고, 지금처럼 몸을 풀지 않으면 그 긴장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문주님.”
“끝날 때까지는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신의 등장에 나군천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뭔가?”
하신의 말에 나군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은남도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은남도문에서 사람? 누가?”
나군천이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한 명이 아닙니다. 지원군을 보낸 듯합니다.”
“지원군? 그런 연락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예. 기별 없이 왔습니다.”
하신의 말에 나군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원군을 요청한 적도 없을뿐더러 보내기 전에 기별을 넣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반월도문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아는군.”
나군천이 중얼거렸다.
반월도문에 지원군을 보내는 것 정도는 굳이 자신들의 의사를 묻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태도가 나군천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게다가 선심 쓰듯 지원군을 보낸 가백현의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리기까지 해 더욱 분통이 터졌다.
“일단 가지.”
그렇게 말한 나군천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대전에는 고현과 조운겸, 그리고 철혈전마대 대주인 여사민(呂射敏)과 광풍대(狂風隊) 대주 엽표(葉豹), 야수대(野獸隊) 대주 탁모위(卓模偉)가 나군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요청한 적도 없는 불청객의 등장에 반월도문 장로들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쾅!
나군천이 대전 문을 거칠게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은남도문 사람들이 길을 터주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나군천은 빠르게 그들 사이를 지나쳐 태사의에 앉았다.
“은남도문 수석장로 고현이 반월도문의 문주님께 인사드립니다.”
고현이 나군천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이미 심기가 불편해진 나군천은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쩐 일이시오?”
“은남도문에서 보내는 지원입니다.”
“청한 적이 없거늘.”
나군천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기에 고현 등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뭐, 어쨌든,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던 은남도문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지원군까지?”
“사태가 심각하게 흘러가는 듯하여 은남도문에서도 가만있을 수는 없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지금까지는 반월도문이나 천중도문에서 적의 예봉을 충분히 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가만히 있었으나 적의 힘을 너무 얕잡아보고 내린 판단에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리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고현의 말은 교묘했다.
겉으로 듣기에는 정중한 듯했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너희가 똑바로 처리하지 못하니 우리까지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할 나군천이 아니었다.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안 그래도 이제는 앉아서 적들이 오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려던 찰나에 이리 지원까지 보내주시다니, 가 문주께 감사의 인사라도 드려야겠소.”
이어진 나군천의 말에 고현이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현재 반월도문은 주력을 잃어 그 힘이 많이 떨어진 상태요. 그러니 이후 있을 전투에서는 미안하지만 은남도문에서 많은 힘을 써주셔야겠소. 보아하니 철혈전마대까지 온 모양인데…….”
그렇게 말하며 나군천이 여사민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군천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충분히 은남도문에서 적의 기세를 꺾어주실 것이라 믿겠소. 아무래도 우리가 은남도문을 보조하는 형세로 가야 할 것 같으니.”
나군천의 말에 고현은 속으로 당황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반월도문을 보조하기 위함이지 반월도문의 보조를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수세가 아닌 공세로 나서려던 찰나에 자신들이 찾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재 상황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소. 가서 쉬시오. 군사.”
“예. 자, 가시지요.”
하신이 앞장서서 은남도문 사람들을 데리고 대전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군천은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여기에 있으니 아무 일도 안 생기는군.”
곳곳에 붕대를 감은 막천풍이 대청에 앉아 중얼거렸다.
연무장 위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상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데는 다 다쳐도 입은 안 다치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
상천의 말에 막천풍이 입을 다물었다.
의식을 찾은 이후로 빠른 회복세를 보인 막천풍의 상처는 많이 아물어 있었다.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은 거의 다 아물어가는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감고 있는 것일 뿐 거동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른 여권문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오?”
상천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비록 상황이 급해 이곳까지 찾아오기는 했지만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돌아가긴 해야겠지.”
상천의 물음에 막천풍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많은 문도가 죽었다.
그리고 장로들은 몸을 빼내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졌다.
문파 역시 멀쩡한지 알 수 없었다.
불타 없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는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막천풍의 물음에 상천이 그의 옆에 앉았다.
“싸울 것이오.”
“싸워? 문도들은 다 피신시켜 놓고 고작 세 명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싸우려고?”
막천풍의 물음에 상천이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연공을 하는 비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있는 비호 보이시오?”
“눈 뜨고 있으니 당연히 보이지. 왜 그러나?”
“저 비호의 실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오?”
“글쎄. 나랑 비슷한 수준인가?”
“풉!”
“뭐야? 지금 나 무시하는 건가?”
자신의 말에 상천이 웃음을 터뜨리자 막천풍은 기분 나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시하는 것 맞소.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어떻게 비호랑 막 형을 비교하오?”
“뭐야?”
상천의 말에 막천풍이 눈을 부라리며 성을 냈다.
“진정하시오. 비호의 실력이라면… 저기 있는 여권문도 열 명은 혼자 너끈히 감당할 것이오.”
“엥?”
상천의 말에 성을 내던 막천풍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여권문도들과 비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기 있는 화룡은 비호와 비슷한 실력이오.”
“진짠가?”
놀라 묻는 막천풍을 향해 상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런데 저런 자들이 왜 자네 밑에 있는 건가?”
그 물음에 상천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묘하게 기분 나쁜 말이었다.
“저들은 원래 합산도문 사람이었소.”
“합산도문 사람이라고? 도가 아니라 검을 쓰는데?”
“뭐, 신건 어르신과의 인연으로 함께 있었을 뿐 문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상천의 말에 막천풍은 뭔가 사연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저들이 왜 여기에?”
“장 소저를 데리고 합산도문에서 도망쳐 왔소.”
“장 소저? 장 소저가 누구……. 설마……?”
“그렇소.”
그가 말하는 장 소저가 장여진을 말한다는 걸 알아차린 막천풍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