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준비를 마친 후 궁철형은 대주들을 불러 모았다.
한자리에 모인 대주들은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은갑대와 참호대는 이대로 본진에서 이탈한다.”
궁철형의 말에 남두강과 참호대주 담태수(譚太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힘을 한데 모아도 모자랄 판에 이탈이라니.
그런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궁철형이 말을 이었다.
“은갑대는 이탈하여 적의 좌측을, 참호대는 우측을 친다. 나머지는 나와 같이 정면을 뚫는다.”
“힘들지 않겠습니까?”
담태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궁철형이 병법에 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번 결정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괜찮다. 나와 광풍대, 그리고 천웅대 두 개 조면 적을 반으로 가를 수 있다. 갈라지면 나와 천웅대 두 개 조, 그리고 광풍대 두 개 조는 은갑대와 함께 좌측의 적을, 나머지는 참호대와 우측의 적을 치는 거다.”
“알겠습니다.”
천웅대주 마효찬(馬曉燦)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궁철형이 그런 결정을 내린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강한 적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은 기습이고 두 번째는 포위하는 것이다.
지리적 여건상 기습을 하기에는 어려우니 포위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있는 인원으로는 적 전체를 포위하기에는 어려웠다.
게다가 뭉쳐 있으면 그만큼 단단해져 포위를 한다고 해도 쉽게 이기기 어려웠다.
반면 적을 둘로 나누면 그만큼 포위하기가 쉬었다.
게다가 정면을 뚫어 반으로 가르면 그만큼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움직임을 보고 적들이 나뉜다면 그것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 가자.”
“예!”
궁철형의 명에 모두가 힘차게 대답했다.
“어라? 저놈들, 이상한 짓을 하네? 왜 저러는 거야?”
뚫어져라 반월도문의 진형을 살피던 장세진은 그들이 셋으로 갈라지자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에 가릉과 장무진도 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잔머리를 쓰는구나. 뭐, 저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것도 재밌겠지?”
그렇게 말한 가릉이 장무진과 장세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왼쪽!”
가릉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장세진이 쏜살같이 움직였다.
그에 피식 웃은 장무진은 말없이 흑혈대 쪽으로 움직였다.
“가자! 싸움이다! 다 쓸어버려!”
장세진이 망혼대원들을 이끌고 은갑대 쪽으로 향했고, 장무진은 흑혈대원들과 함께 참호대를 맞으러 갔다.
“오랜만에 힘 좀 쓰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가릉도 나머지 인원을 데리고 정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됐다!’
궁철형은 적들도 세 갈래로 나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되면 굳이 힘들게 정면을 뚫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속전속결로 간다! 움직여!”
궁철형이 앞서 달리며 소리쳤다. 그에 뒤따르는 반월도문 무사들도 속도를 높였다.
드드드드드!
수백의 무인들이 지면을 박차며 달리는 힘이 지축을 흔들었다.
반월도문의 무인들과 적의 간격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까가가가강!
양측 진형이 강하게 충돌하며 뒤엉켰다.
순식간에 병장기 소리와 비명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들이 휘두르는 도검은 눈앞에 보이는 적들을 향해 무참히 휘둘러졌다.
제대로 된 초식을 구현하며 무공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닥치는 대로 휘두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이렇게 대규모 무인들이 싸우는 전쟁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무공을 구현하기가 힘들다.
정신이 없어 적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수라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무공을 펼치다가는 자칫 근처에 있는 아군이 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그랬다.
내력을 실어 도검을 휘두른다는 점이 막싸움과의 유일한 차이일 뿐이었다.
“으하하하! 얼마든지 덤비거라!”
장세진이 광소를 뿜었다.
이렇게 맘껏 도를 휘둘러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도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합산도문의 일에 차출되고 난 후로는 이렇게 맘껏 도를 휘둘러 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로들을 죽이던 그 날을 제외하고 살육을 해본 적이 없다.
광소와 함께 터져 나오는 장세진의 기도에 은갑대 대원들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다가가지 못한다고 해서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세진은 말 그대로 전장을 휘젓고 다녔다.
부우웅!
쾅!
“오호!”
자신을 향해 힘차게 휘둘러진 도를 막아내며 장세진이 그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도를 휘두른 사람은 다름 아닌 은갑대주 남두강이었다.
그의 표정은 성난 호랑이처럼 잔뜩 구겨져 있었다.
애초에 장세진과 남두강의 위치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정신없이 도를 휘두르며 적들과 맞서고 있을 때 광소와 함께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찔렀고, 남두강은 지체하지 않고 그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장세진에게까지 오는 동안 많은 적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을 뿌리치고 도착한 것이다.
그 덕분에 남두강의 장삼은 시뻘건 핏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네놈이 대가리구나?”
“그러는 네놈도 대가리겠지?”
장세진의 물음에 남두강도 그와 똑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으하하하! 재밌는 놈이구나! 어디 실력도 재밌는지 한번 보자꾸나!”
그렇게 말하는 장세진을 노려보며 남두강이 근처에 있는 은갑대원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거리를 벌리고 떨어져라! 잔챙이들을 처리하는 데 주력하라! 반월도문 은갑대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이행하라!”
“예!”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마지막으로 내리는 명령 같은 느낌을 주는 외침에 은갑대원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쓸데없는 짓. 어차피 네놈들은 여기서 다 죽어.”
“다 죽어도 상관없다. 그렇게 해서 반월도문만 무사할 수 있다면.”
“멍청한 놈. 네놈들이 여기서 다 죽는다는 말은 반월도문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장세진이 묵직하게 도를 휘둘렀다.
단순 근력으로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일격이었다.
남두강은 이를 악물었다.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정면으로 부딪쳐 상대를 깨뜨릴 뿐이다.
“하압!”
쩌엉—!
기합과 함께 남두강의 도가 장세진의 도와 충돌했다.
묵직한 쇳소리가 울렸고, 남두강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겨우 막기는 했지만 장세진의 도에 실린 힘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까가가각!
장세진이 남두강의 도를 갉아먹기라도 하듯 날을 긁으며 도를 위로 올려쳤다.
그 힘이 상당하여 남두강은 하마터면 도를 놓칠 뻔했지만 손아귀에 힘을 잔뜩 주어 겨우 붙잡고 있었다.
도를 놓치지는 않았지만 남두강의 손아귀는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장세진의 힘은 강했다.
그것을 본 장세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약해서야 흥이 나질 않잖아!”
그렇게 중얼거린 장세진이 도를 내렸다. 그에 남두강의 오른쪽 눈썹이 움찔 했다.
“뭐지, 그 자세는?”
“지혈이라도 하라고.”
장세진의 말에 남두강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상대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단지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개무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한 수, 아니, 두 수 이상 아래로 보고 있었다.
선심 쓴다는 듯 말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더욱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목을 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이 차오르는 이 분노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죽는다면 저승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리라.
찌이익!
남두강이 자신의 옷자락을 길게 찢었다. 그리고는 아귀가 찢어진 손과 도를 한데 묶었다.
“후후.”
그것을 본 장세진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남두강의 결연한 의지도 그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무언가에 불과했다.
“하압!”
남두강이 내력을 끌어올리며 도를 휘둘렀다.
자신을 반월도문 삼대무력부대 중 하나인 은갑대의 대주 자리까지 오르게 만든 무공.
벽력십팔도(霹靂十八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장세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살짝 가셨다.
공격에 담긴 위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장세진이 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온몸의 근육에 힘이 들어갔고, 단전에서는 내력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의 손에서 괴력의 도법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멸사폭참(滅私爆斬).
과거 군마성의 삼대도법 중 하나였던 멸사폭참이 장세진의 손에서 재현되었다.
“음?”
참호대주 담태수와 도를 섞고 있던 장무진이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멀리 장세진이 있는 쪽이었다.
“멸사폭참인가?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난 모양이군.”
그가 중얼거렸다.
장무진이 자신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있음에도 담태수는 섣불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삼대무력부대 중 하나라는 참호대주인 자신이 이렇게나 일방적으로 당할 수는 없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건만 담태수의 상태는 처참했다.
왼팔은 거의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넝마가 되어 있었고, 다리와 몸 등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반면 장무진은 옷 몇 군데가 찢어진 것 빼고는 이렇다 할 상처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 정도로 장무진은 강했다.
방어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견고했고, 공격은 막기 어려울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게다가 절대로 흔들림이 없으니 더욱더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젠장! 빌어먹을! 저건 괴물이야, 괴물!’
담태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후우…….”
하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며 장무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은갑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멸사폭참이라……. 그럼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장무진이 다시 담태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어날 수 있겠지? 참호대주 되는 자가 이 정도로 쓰러지면 안 되지.”
그의 말에 담태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두 번의 공격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제대로 한 번, 제대로 한 번만 들어가면 저놈 모가지는 떨어진다.’
담태수는 자신 있었다.
자신의 도법인 광폭십식(狂暴十式)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력 있는 도법이었다.
“그래, 일어나야지. 그래야 나의 마령절도식(魔靈絶刀式)에 죽는 영광을 누릴 수 있지.”
‘마령절도식?’
처음 듣는 도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곧바로 장무진의 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네놈에게 펼치기는 아까운 도법이지만, 견식할 수 있는 영광을 주마!”
담태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내력을 끌어올리며 장무진의 마령절도식에 맞서 광폭십식을 펼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