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01화 (101/141)

#101화.

“초면? 아니지. 초면이 아니지.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가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장우량의 얼굴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심하게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화룡과 비호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징그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상천은 일그러져 있던 장우량의 얼굴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면서부터 놀라기 시작했다.

자리를 찾은 장우량의 얼굴은 분명 상천이 아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동고동락했던 인물이다.

“가… 릉?”

“이제 알아보는군. 낭호에게 겁도 없이 들이대던 놈이 많이 컸어.”

가릉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수록 상천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죽었는데……. 당신은 죽었어!”

상천이 소리쳤다. 하지만 가릉은 여유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지. 죽은 건 장우량이다. 그동안 그놈 행세 하느라 고생깨나 했지.”

가릉의 말에 상천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죽은 건 가릉이 아니라 장우량이다?

어떻게?

“너희들은 어서 본대에 합류하도록.”

가릉이 세 사람의 뒤쪽에 있는 적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적들이 빠르게 그들을 지나쳐 어디론가 달렸다.

여든 명 이상 남은 적들이 골짜기를 빠져나가고 네 사람만 남았다.

가릉과 상천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상천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가릉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회포를 좀 풀어볼까?”

“…….”

가릉의 말에 상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해는 떨어져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다.

그나마 달이 밝아 칠흑 같은 어둠은 면한 상태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한번 붙어보고 싶은 모양이군. 그런데 그거 아나?”

가릉이 자신의 도를 어루만지며 상천에게 물었다. 그에 상천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그를 빤히 쳐다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회포를 풀면…….”

그렇게 말하며 잠시 하늘을 쳐다보던 가릉이 다시 시선을 상천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

“넌 죽어.”

오싹!

비호와 화룡은 몸을 떨었다.

장세진과 마주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두려움이 그들의 전신을 휘감았다.

서늘한 표정과 눈빛, 그리고 살벌한 말 한마디.

그것만으로도 비호와 화룡은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이라는 것은 가릉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어떻게 할 건가?”

[안 됩니다. 저자는 못 이깁니다.]

황급히 비호가 상천에게 전음을 날렸다. 하지만 상천은 여전히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두려운가? 두렵겠지. 어린 나이에 죽음이 코앞까지 왔는데.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 살날이 창창한 젊은이를 이 자리에서 죽이고 마음이 편하겠나? 그리고…….”

씨익!

가릉이 미소를 지었다. 흥미롭다는 표정과 함께.

“다음번에 만나면 더 재밌게 회포를 풀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단 말이지.”

두두두두두두!

그때 골짜기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레 들리기 시작했다.

“방해를 받는군. 좀 더 있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한 가릉이 몸을 돌렸다.

그가 등을 보였음에도 비호와 화룡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격한다 해도 성공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느꼈는지 가릉이 다시 한 번 조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상천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그대로 신형을 날렸다.

“아니, 백룡문주님 아닙니까?”

말을 타고 달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옹안 지부장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상천은 가릉이 멀어져 간 방향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상천과 비호, 화룡은 백룡문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풀려서인지 비호와 화룡은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힘들기는 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성에 차지는 않지만 조금이나마 신건의 복수를 한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자신들의 검이 무디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상천이었다.

장여진과 자신들은 백룡문의 사람이 되기로 하고 지금껏 생활해 왔다.

처음 이곳에 올 때에는 갈 곳이 이곳밖에 없어 온 것이지만 이제는 자신들이 믿고 따라야 할 곳이고, 백룡문은 자신들을 보듬어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문주인 상천이 굳건해야 했다.

문주로서의 자질은 물론이고 무위 역시 수준 이상이 되어야 했다.

물론 거대문파가 아닌 중소문파에 속하는 백룡문이기에 무위에 대한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문주의 무위라면 자신들 정도 수준까지는 올라와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상천이 여러 가지 질문을 해왔을 때 성심성의껏 대답도 해주었다.

그런데 문주인 상천이 자신들의 수준을 뛰어넘어 버렸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상천에게 찾아든 기연에 질투심이 일었지만 문도의 입장에서 보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문주로서의 자질은 냉정하게 말해 아직 못 미친다 할 수 있지만 그의 나이가 어린 만큼 그 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만났던 가릉 때문이다.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기도 했고, 그의 무위에 좌절감도 맛보았다.

물론 그의 무공을 보지는 못했지만 풍겨오는 기도만으로도 자신들을 압박했고, 등을 돌렸지만 공격을 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위기만 아니라면 백룡문의 앞에는 청사진이 그려졌겠지만 그런 적들 때문에 지금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는 상태다.

그 때문에 기쁨과 암담함이 동시에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백룡문으로 돌아온 상천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장우량의 정체가 죽은 줄 알았던 가릉이라는 사실과 귀주성과 광동성에 적이 출몰하여 시급을 다투는 상황이라는 점 때문이다.

단순히 그것 때문이라기보다는 백룡문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반월도문이 무너지든 사도련이 무너지든 그것은 상천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백룡문이 위험에 빠진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직은 미력한 힘이지만 백룡문을 지켜낼 수 있다면,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종삼과의 약속을 지키는 길이며 은혜를 갚는 길이다.

“후우…….”

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

종무헌은 백살대와 함께 정호산(鼎湖山)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바닷가에 인접한 광동성에서 그나마 산세가 제법 험한 곳은 정호산에서 인근 칠성암(七星岩)으로 연결되는 지역뿐이었다.

적의 이동 경로를 보면 분명 이곳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미리 도착하여 주둔을 하고 은신하여 적들에게 기습을 감행할 생각이었다.

어둠까지 깔려 있으니 기습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본산을 떠나올 때의 감정만 생각하면 기습이 아닌 정면 대결을 해도 성이 차지 않겠지만 종무헌은 문주였다.

좀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했고,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때문에 본산을 떠나오기 직전 군사인 정사청이 내놓은 의견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척후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느냐?”

“아직 없습니다.”

“이렇게 굼떠서야!”

척후로부터의 보고가 없다는 백살대주 우광무(禹狂舞)의 대답에 종무헌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러니 그런 치욕을 당하는 게지!’

지금껏 나름대로 천중도문을 잘 이끌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깨닫고 있는 종무헌이었다.

“모두 경계를 강화하고 사방을 예의 주시하라! 작은 기척도 놓쳐서는 안 된다!”

“예!”

종무헌의 명에 우광무가 힘차게 대답했다.

이번 싸움에 임하는 그의 결의도 남달랐다. 지난번 회합에서 장세진과 장무진에게 목숨을 잃은 대원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척후가 도착했습니다!”

잠시 후, 백살대원 한 명이 척후가 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빠르게 달려온 척후는 우광무에게 자신이 확인한 것을 보고했다.

척후의 보고를 들은 우광무가 곧장 종무헌에게 다가갔다.

“오 리 밖에 오고 있다고 합니다.”

“오 리라……. 애매하군.”

“예. 그래도 지금의 속도면 한 시진 안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합니다.”

“알았다. 반 시진 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알겠습니다.”

종무헌의 명령을 받은 우광무가 대원들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종무헌의 도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사아아아!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백살대원들은 적에 대한 분노를 가슴속에 갈무리하고 있었다.

동료들의 죽음.

그것은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할 업보였다.

또 한 가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천중도문을 만만하게 본 대가.

실제로 적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것이다.

고작 마흔 명이라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갚아줘야만 했다.

그 때문에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임에도 백살대원들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사사삭!

미세한 기척.

일부 백살대원들이 감각의 날을 세웠다.

숲은 온갖 기척을 쏟아낸다.

단순히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부터 온갖 동물들이 내는 기척까지.

하지만 감각을 예리하게 세우고 있는 백살대원들에게 그 기척이 사람의 것인지 동물들의 것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백살대원들과 우광무, 종무헌이 도를 들고 일어섰다.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지 반 시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준비는 필요없었다.

휴식 시간으로 주어진 반 시진 동안 모두가 휴식이 아닌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반짝이는 두 눈은 어둠 속 어느 한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촤악! 촤악!

“모두 죽여!”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검은 인영들을 향해 도를 흩뿌리며 소리쳤다.

어둠이 내리 깔린 숲 속에서 귀령대와 백살대가 충돌했다.

쩌저정!

고요하던 숲이 병장기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요란한 쇳소리가 귀를 어지럽혔고, 번뜩이는 도광과 검광이 눈을 어지럽혔다.

쒜에엑!

날카로운 파공음이 종무헌의 좌측에서 들려왔다.

도를 쥔 손에 힘을 준 종무헌은 자신의 독문 무공인 도룡십삼식(屠龍十三式)의 초식을 뿌렸다.

쩌엉!

강한 쇳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상당한 위력이 담긴 강한 일격이었음에도 상대의 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네놈이 대가리로구나!”

종무헌은 자신의 도에 검을 맞대고 있는 상대가 적장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우두머리를 제거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병법의 기본.

종무헌의 근육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반면 상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강하게 밀어내려는 종무헌의 힘을 힘으로써 버텨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호리호리한 몸을 지닌 상대는 종무헌의 힘을 대등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하압!”

종무헌이 기합을 내질렀다.

그러자 상대의 검이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상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차앙!

결국 종무헌의 도는 상대의 검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검이 밀리면서 상대 역시 뒤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먼저 기세를 잡은 쪽은 공간을 만들어낸 종무헌이었다.

공간이 생기자 곧바로 내력을 끌어올린 그는 태산 같은 기세로 도를 휘둘렀다.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한 위력적인 공격은 매섭게 상대를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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