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나무 밑으로 뛰어내린 상천은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적들이 달려오고 있는 골짜기를 막아섰다.
세 명이 나란히 서면 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좁은 길목이었다.
어차피 사방 중 삼면이 막힌 상황이니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적들만 상대하면 되는 지형이었다.
하지만 머릿수에서 너무나 차이가 났다.
기습이면 모르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아무리 지리적 이점이 있다고 해도 무모한 짓이었다.
그사이 비호와 화룡이 상천의 양옆에 나란히 섰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그때 어르신 옆에서 싸우고 죽을 걸 그랬네.”
“동감이야.”
비호의 말에 화룡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 상천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대신 상천이 앞으로 두어 걸음 나갔다.
사과 대신 먼저 적을 맞겠다는 뜻이다. 상천이 검을 비껴들었다.
달려오던 적들도 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달려오는 속도를 죽이지는 않았다. 세 명 정도는 그냥 그대로 밀고 지나가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이거 칼 맞아 죽는 게 아니라 깔려 죽을 판이군.”
비호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적과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오 장, 사 장, 삼 장.
거리가 삼 장까지 좁혀졌을 때 상천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는 부드럽게 천유보의 족적을 따르기 시작했고, 검은 날카롭게 단월검의 초식들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비호와의 비무 때보다는 훨씬 빠르고 날카롭게 적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천을 우습게 봤기 때문일까.
적들은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하물며 맨 앞에 있는 자들은 무기도 꺼내 들지 않고 있었다.
상천의 공격쯤은 몸으로 받아내도 된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쒜에에에엑!
상천의 검이 날카롭고 무게감 있는 파공음을 만들며 허공을 갈랐다.
쩍!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그의 검은 선두에서 달려오던 적의 목을 꿰뚫었다.
꿰뚫린 머리 위쪽은 그 상태로 멈추었는데 그 밑으로는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쪽으로 밀려왔다.
퍽!
상천은 검을 뽑음과 동시에 다가오는 적의 몸통을 강하게 발로 찼다.
목이 뚫린 적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면서 뒤쪽으로 밀렸고, 그에 뒤따르던 다른 적들의 진격에 제동이 걸렸다.
“우리도 가자!”
비호가 먼저 외치며 몸을 날렸고, 곧바로 화룡 역시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뽑은 상천은 어느새 신형을 낮추며 다른 적의 다리를 노리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퍽!
“……?!”
내력이 실린 검으로 다리를 베었음에도 잘리지는 않고 마치 몽둥이로 후려친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당황한 상천은 날카롭게 이어진 적의 반격을 천유보를 펼쳐 가까스로 피하면서 다시금 단월검의 초식들을 뿌렸다.
쩍!
이번에는 목.
퍽!
이번에는 어깨.
쩍!
다시 목.
“목이오! 목을 노리시오!”
상천이 좁은 골짜기라는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하고 협공을 통해 적들을 상대하고 있는 비호와 화룡에게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 역시 힐끗힐끗 상천의 공격을 보며 적들의 약점이 목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짧은 순간에 상천은 홀로 다섯 명의 목을 꿰뚫었고, 화룡과 비호는 세 명의 목을 꿰뚫은 상태였다.
셋이서 여덟 명의 적을 처치했으면 남는 장사였지만 남아 있는 적이 너무나 많았다.
쒜에엑!
순식간에 적의 검 세 개가 상천을 발기발기 찢어놓을 듯 날아들었다.
얼굴과 어깨, 가슴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
그 위력과 속도는 상당했지만 모두 정면에서 날아드는 단순한 찌르기에 불과했다.
상천의 다리가 천유보를 펼쳐 내기 시작했다.
첫 번째 검은 상처의 코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다른 검은 펄럭이는 옷깃을 살짝 찢어놓았고 마지막 남은 검은 상천의 가슴팍에 달려있는 단추 하나를 떨어뜨렸다.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세 개의 검.
빠르고 위력적이기는 했으나 극에 이른 천유보를 펼치는 상천의 몸에는 생채기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상천의 검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단월검 사 초식 운산(雲散)이 펼쳐졌다.
짙게 드리워진 구름을 흐트러뜨리듯 가볍게 허공을 그었다.
힘없이 허공을 가른 듯 보였지만 검끝에 실려 있는 힘은 그 위력이 상당했다.
상천의 검은 적들의 목을 꿰뚫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긋고 지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의 목은 그대로 몸통과 분리되어 허공을 날았다.
그가 펼치고 있는 단월검은 과거 천변색마를 잡을 때 보였던 것과 그 형(形)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력 면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났다.
전체적으로 검법의 위력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는 상태였다.
열양신단의 덕이 크기는 했지만 꼭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상천을 절정의 수준까지 올려놓은 깨달음이 단월검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만들었고, 그것이 검법의 위력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겁니까! 이러다가 결국 당하는 건 우립니다!”
화룡이 적의 수족을 묶어둔 사이 검으로 목을 꿰뚫은 비호가 상천을 향해 소리쳤다.
아직까지 그럭저럭 버티고는 있었지만 점차 머릿수로 밀고 오는 적들의 힘을 이겨내기가 버거웠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적들만 상대하면 되는 상황이긴 했지만 객관적인 힘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뒤로 물러서시오!”
그렇게 외치면서 상천이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적을 강하게 밀쳐 내면서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에 비호와 화룡이 서둘러 멀찌감치 물러났다.
상천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 하단전과 중단전을 빠져나온 진기는 힘차게 온몸을 휘돌아 검끝으로 몰려들었다.
“하압!”
상천이 우렁찬 기합성을 내뱉었다.
동시에 그의 검이 단월검 마지막 초식인 역천(逆天)을 펼쳐 냈다.
꽈릉!
흡사 번개가 내리꽂히는 것 같은 소리.
천지가 놀랄 만큼 거대한 소리가 사방을 뒤덮었다.
검끝에 응집되어 있던 내력이 정면의 적을 향해 폭발했고, 내력이 실린 검으로 베어도 베이지 않던 적들의 몸이 발기발기 찢겨나갔다.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화룡과 비호는 넋을 놓았다.
지금껏 상천이 펼쳐 내던 단월검은 이렇게 강맹한 위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히려 도가의 검법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유했다.
하지만 지금 펼친 초식은 전혀 달랐다.
태산도 베어버릴 듯한, 아니, 하늘도 가를 듯한 엄청난 위력이 전방을 향해 폭발했다.
비무를 하고 난 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진정 상천이 크게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헉! 헉!
상천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방을 응시했다.
‘머릿속에서 펼쳐 내는 것하고 실제하고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군.’
헐떡이면서 상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의식 불명 상태로 있는 동안 상천은 자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수련을 해왔다.
예전에는 연무장에 앉아 눈앞에 그려낸 환영을 통해 무공 수련을 해왔다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무의식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상천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무공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하면서 무공에 대한 깊이를 더했고, 죽을 고비를 두 차례 넘기면서 어린 나이에 나름대로 삶에 대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문주의 자리에 올라 한 문파의 명운을 짊어지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무학에 정진하는 삶.
결코 흔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되면서 그것들이 상천을 나이에 비해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런 것들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은 무학에 큰 도움이 되었고, 나름 깊이 접근했다고 생각했던 상천에게 그것이 얼마나 아둔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상천의 무학은 더욱 깊어졌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백룡문의 무공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상천이 펼쳐 낸 역천의 초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정면을 응시한 상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큼 내력 소모가 컸던 것도 있지만 겉으로 보인 위력에 비해 적의 숫자는 많이 줄어들지 않은 까닭이었다.
기껏해야 열 명 정도가 먼지로 화했을 뿐이다.
‘이럴 바에야 내력 소모가 큰 역천보다는 다른 초식으로 각개격파 하는 편이 낫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보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상천이었다.
“아무래도 적들의 화만 더 돋운 것 같습니다.”
넋을 놓고 있던 비호가 더욱 강해지는 적들의 살기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비호의 말처럼 아직도 적은 여든 명 가까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뿜어내는 살기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물러나는 것이 좋겠지요?”
비호가 다시 물었다.
어느덧 해도 저물 시간이 되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 정도 했으면 충분히 저들의 발목도 잡았고 예상 밖의 피해도 입혔다고 봐도 무방했다.
“합류할 때가 지났는데도 안 오기에 뭔 일이 있나 했더니 쥐새끼들한테 발목이 잡혀서는. 이래서 인형들은 안 돼.”
그때 세 사람의 등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목소리.
세 사람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장우량이 사나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씨익!
“다들 오랜만이군.”
장우량이 싸늘한 미소와 함께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보기만 해도 오싹해지는 미소와 인사였다.
옹안 지부장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 뒤로 옹안지부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역시나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었다.
적이 출몰했다는 보고를 받고 난 후 지부들이 박살 나고 있다는 새로운 보고를 받기까지 사흘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상태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본산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 본산에는 보고가 올라간 상태.
본산에서 주력 부대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이 다 죽는 한이 있어도 최대한 그들의 머릿수를 줄여야 했다.
앙다문 입술에서 그의 굳건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몰고 있는 말이 좁은 협곡으로 들어섰다.
웃으며 건넨 인사와 달리 장우량의 표정은 굉장히 차가웠다.
반면 비호와 화룡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합산도문에 있을 때도 장세진과 장무진이 모든 일에 직접 나섰지 장우량이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무위가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방금 싸웠던 적들보다 장우량 한 명이 더 버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장우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는 눈에 띄지도 않던 꼬맹이 녀석이 이렇게 변했을 줄은 몰랐군.”
“우리는 초면 아니오?”
비아냥거리는 장우량에게 상천이 물었다. 그러자 장우량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