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비호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상천은 절정의 경지에 든 것 같았다.
억울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믿기지도 않고 심지어 화도 났다.
고작 몇 달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천운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허무하게 놀아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절정은 아니라지만 자신도 절정을 바라보는 무인.
쉽게 패할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집중했다.
상천이 언제 검을 뻗을지, 어디에서 어떻게 뻗어 나올지.
그 모든 것을 포착하고 빠르게 반응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느리다. 막을 수 있어. 제대로, 한 번만 제대로 막으면 반격할 수 있다.’
비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무장 밖에서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는 화룡은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느리다고는 하지만 절묘한 곳을 찌르는 상천의 공격은 분명 막기 어려워 보였다. 비호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점이라면 모를까, 자신도 모르는 허점을 찌르는 공격을 무슨 수로 막아내겠는가?
역시나.
연이은 상천의 공격에 비호는 결국 전의를 상실하고 검을 늘어뜨렸다.
비호의 표정에는 암담함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추월? 당할 수 있다.
하지만 납득이 가는 선이 있는 법이다.
비호가 판단하길, 상천은 자신을 추월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성장할 수는 있겠지만 한계는 존재할 것이고, 그것은 기껏해야 현재 자신의 수준까지였다.
열양신단을 복용했다 한들 이 정도의 급성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 비호의 표정을 보며 상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 비무는 상천 스스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싶은 마음에 제안한 것이었다.
그런데 설마 비호가 이 정도로 허탈해하고 힘들어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불찰이다.
상천의 나이가 아직 이십대 초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문주라는 자리는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 자리이기도 했다.
문주는 문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문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닫게 된 상천이다.
“미안하오.”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축하드립니다.”
상천의 사과에 비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그대의 입장을 생각지 못하고 한 행동이었소.”
“…….”
상천의 말에 비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딱히 뭐라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고 할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천이 잘못을 한 것도 없으니 그저 혼자 속으로 삭여야 할 뿐이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그때 정문으로 녹엽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자마자 본 것이 비호와 상천이 연무장 위에서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습이었기에 한 말이다.
“뭐, 별일 아닙니다.”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녹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했다.
“뭐, 싸운 건 아닐 거고, 그럼 말 그대로 하극상이니……. 이보게, 문주. 괜히 비무하자고 하지 마. 그러다가 뼈도 못 추려.”
녹엽의 충고 아닌 충고에 상천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허! 섭섭하네. 날 손님 취급하다니.”
“아, 그런 건 아니었는데…….”
녹엽의 말에 상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농담이고, 맨날 서기종 그놈만 오잖아. 하도 좀이 쑤셔서 오늘은 내가 가겠다고 했지.”
“그렇습니까?”
녹엽의 말에 상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사단이 난 모양이야.”
녹엽이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그에 상천은 물론이고 표정이 좋지 않던 비호와 화룡도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움직였답니까?”
“그런 모양이야. 뭐, 귀주성이 아니라 광동성 쪽인 모양이지만.”
“음…….”
“정확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광동성 쪽에 사단이 났다는 건 이쪽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거니까 조심은 해야겠지?”
녹엽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죠?”
“그럼. 뭐, 동삼이 그 녀석이야 맨날 따라오겠다고 난리지만 다들 잘 지내고 있다네.”
녹엽의 말에 상천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다들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십시오. 위험할 수 있으니.”
“알겠네. 그럼 또 오지.”
용무를 마친 녹엽이 백룡문 밖으로 나갔다. 정문을 나서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조심스레 다른 문도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움직이는군요.”
화룡의 말에 상천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동성이면 천중도문인데, 정확한 상황을 모르니 답답하군.”
“적의 규모가 어느 정도이고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중도문도 사도련의 일익이니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겁니다.”
비호의 말에 화룡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합산도문도 집어삼킨 놈들이야.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
“하긴…….”
그에 비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합산도문도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건만 쥐도 새도 모르게 집어삼켰을 정도이니 천중도문이 무사할 것이라 장담하기는 일렀다.
“합산도문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까?”
그때 상천이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에 화룡과 비호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딱히 합산도문에 대한 복수라기보다는… 돌아가신 어르신의 복수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호가 신건을 언급하며 말했다. 그에 화룡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이나마 그분의 넋을 위로하러 가보시겠습니까?”
상천의 말에 비호와 화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상천은 비호와 화룡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고 앞장서 걷는 상천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비호와 화룡은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도대체 신건의 넋을 위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혹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화룡에게 비호가 전음을 보냈다. 그 역시도 상천의 말과 지금 이 상황을 놓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한 듯했다.
[혹시 뭐?]
[귀주성에 적들이 나타난 것 아닐까?]
비호의 전음에 화룡이 인상을 찌푸렸다. 비호가 세운 가설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일단 적이 출현했다면 반월도문에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지난번 일이 있고 난 후 정보력을 강화했을 테니.
게다가 적이 출현했다 하여도 셋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대로 가서 싸우면 말 그대로 개죽음일 뿐이다.
[말이 안 되잖아. 셋이서 뭘 할 수 있겠어?]
[아니면 달리 어르신의 넋을 위로할 방법이 있어?]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신건의 넋을 위로하는 방법은 적을 쳐부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도대체 어딜 가는 거지?’
화룡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 시각.
반월도문에 비상이 걸렸다.
광동성 쪽의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귀주성에도 적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인원도 제법 되고 파죽지세로 반월도문까지 치고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벌써 잿더미가 된 지부의 숫자가 상당한 듯했다.
그마나 정보력을 총동원한 상태라 알아차렸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난번처럼 눈 뜨고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본산에서 무사들이 대거 출진했다.
반월도문 삼대무력부대인 은갑대(銀甲隊), 참호대(斬虎隊), 광풍대(狂風隊) 전원이 출진했고, 그 외에도 천웅대(天雄隊) 두 개 조가 함께 본산을 나섰다.
그 인원만 이백을 훌쩍 넘는 대규모 출진이었다.
적의 무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처음부터 총력을 가하겠다는 나군천의 생각이었다.
반월도문을 나선 무인들의 행선지는 공교롭게도 상천이 향하는 곳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상천이 두 사람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백룡문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한 시진 정도 걸려 도착한 곳은 수풀이 우거지고 길이 좁은 골짜기였다. 산세가 험하기도 하고 제법 넓어 은신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여기는 왜 온 겁니까?”
높은 나무를 하나씩 골라 위에 올라간 후에야 비호가 상천에게 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제부터 기척을 죽여야 하오.]
상천의 전음에 비호와 화룡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서로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지금 우리한테 동시에 전음을 보낸 거야?]
[그런 것 같은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명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은 내력이 받쳐주고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전음을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상천은 그것을 너무나 쉽게 해내고 있었다.
상천은 그전까지 전음을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두 사람이 아는 한은 그랬다.
배우지도 않은 전음을 쉽게 사용하는 것도 놀라운데 동시에 두 사람에게 전음을 보내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여러 번 좌절하네.]
[그러게.]
그때 전음을 주고받는 두 사람에게 상천이 손짓을 했다. 그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고정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상천의 손짓에 그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굳이 상천에게 묻지 않아도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합산도문에 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느낌.
어둡고 무거우며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진짜였나?’
비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좋다. 적이 있다 치자. 저들을 처치해야 신건의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수로?
다가오는 인원은 족히 백 명에 가까웠다.
그런데 자신들은 고작 세 명.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 아닌가?
[부딪쳐 보겠소?]
상천이 전음으로 물었다. 이번에도 화룡과 비호가 동시에 반응했다.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다니? 미쳤어? 부딪쳤다가는 개죽음이야.]
비호의 물음에 화룡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지금 이 상태에서 부딪치는 건 ‘날 좀 죽여주시오’ 하는 것과 같았다.
적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길이 좁은 골짜기 지형이기 때문에 앞을 막아서서 상대한다면 어느 정도 성과는 있을 수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들의 무위가 저들에게 통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고민하고 있는데 돌연 상천이 움직였다.
“뭐야!”
비호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다. 그때 상천은 이미 땅에 착지하여 그들의 앞쪽으로 쏜살같이 나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지?”
당황한 비호가 그렇게 소리치며 나무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화룡도 마찬가지로 뛰어내리며 말했다.
“저건 자신감이 아니라 무모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