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서기종이 다녀간 다음날, 옹안 지부장이 백룡문을 찾았다.
백룡문에 도착하여 상천을 비롯한 세 사람만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무슨 사단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하여 깜짝 놀랐다.
“왜 세 분만 계시는지요? 혹여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놀라 묻는 옹안 지부장을 보며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으면 저희가 이렇게 멀쩡히 있겠습니까? 다른 문도들은 일단 미리 피신을 시켰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옹안 지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왜 문주님께서는 피하지 않으시고…….”
그의 물음에 상천이 백룡문을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곳은 갈 곳 없던 저를 데려다가 키워준 사부님과의 추억이 담긴 곳입니다. 사부님과 저 두 사람의 추억이 가득 담긴 곳이고 백룡문을 성장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버리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문주 된 입장에서 지키고 있어야지요.”
상천의 말에 옹안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들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뭐, 아직까지 이렇게 멀쩡하지 않습니까?”
상천의 농에 옹안 지부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사태가 심각합니다. 피해도 제법 되고. 더 늦게 알아차렸으면 귀주성에 있는 중소문파 중 절반 이상이 쥐도 새도 모르게 멸문지화를 입을 뻔했습니다.”
옹안 지부장의 말에 상천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상천의 물음에 옹안 지부장이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망설였다. 그에 상천이 괜찮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백룡문은 현재 전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문도의 숫자도 적고 그들의 수준도 떨어지고.”
“맞습니다. 사실 문파라 부르기에도 쑥스러운 수준이지요.”
상천이 그렇게 나오자 옹안 지부장도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차라리 피신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저희로서도 백룡문을 지켜 드리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본산의 인력을 총동원하고는 있지만 전시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저들은 아직 움직임이 없는 겁니까?”
“아직은 그렇습니다. 일단 기습에 성공을 했으니 여유롭게 준비를 하겠지요. 전면전이 되었든 기습이 되었든. 저희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른 문파들과 긴밀한 연락 체계를 구축 중입니다.”
옹안 지부장의 말에 상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알겠습니다. 혹여 저희 세 명이라도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찾아주십시오.”
상천의 말에 옹안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별일이 없으니 안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예. 조심히 가십시오.”
상천의 배웅을 받으며 정문을 나서던 옹안 지부장이 돌연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많이 달라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딱히 달라진 건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많이 예민해지셔서 그렇게 느끼시는 모양입니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말입니다.”
상천의 대답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옹안 지부장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정문을 나섰다.
“그럼 전 이만.”
“살펴 가십시오.”
그렇게 옹안 지부장이 떠나고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비호가 슬쩍 그에게 다가왔다.
“왜 달라진 게 없다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비호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상천이 열양신단을 복용하고 전보다 내력 하나만큼은 증가했다는 점이다.
“그 편이 앞으로 백룡문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서 더 유리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상천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뭐가 유리하다는 것인지 비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상천을 바라만 볼 뿐이다.
***
합산도문의 기습이 있고 한 달 후.
생각보다 조용한 나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기습과 관련된 소문은 이미 중원 전체에 퍼져 나간 상태이고, 이는 당연히 무림맹의 귀에도 들어간 상태였다.
그럼에도 무림맹은 이에 대해 그 어떤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마치 사도련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굳이 무림맹이 나서지 않아도 사도련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반응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사도련 내부에 균열이 생겼고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만큼 자기들끼리 치고받다가 자멸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무림맹에게 있어서 사도련은 계륵 같은 존재였고, 이참에 그들이 스스로 주저앉는다면 무림맹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렇듯 무림맹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사이, 은남도문과 반월도문, 천중도문은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선공을 취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결국 그 의견은 기각당하고 말았다.
저들의 정확한 전력이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르게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가 회생 불가 상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림맹의 의도를 모르지 않는 그들은 절대로 사도련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지금은 공격에 대비해 모든 전력을 끌어 모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초운학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있자면 재미있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번 들쑤셨더니 화들짝 놀라는 꼴이란. 후후.”
똑똑.
“들어오십시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장우량과 장세진, 장무진이 들어왔다. 장세진은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껍데기는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됩니까? 이젠 질리는데.”
장세진이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어차피 저들도 우리가 진짜 장무진, 장세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풀어도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장무진 역시 내심 그것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뭐, 상관은 없을 듯하군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초운학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무진의 얼굴이 변형을 일으켰다. 보기에 징그러울 정도로 일그러지던 그의 얼굴이 잠시 후 변화를 멈추고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장무진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얼굴은 더욱 갸름했고 더 하얀 피부에 전체적으로 미공자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큰 덩치에 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뭔가 조금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럴 줄 알았어. 장무진 노릇 한다고 억지로 몸을 불렸더니만…….”
장무진 역시 자신의 부자연스런 모습을 보며 툴툴거렸다. 얼굴 생김새에 어울리게 목소리 역시 바뀌어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가만히 있는 장세진을 보며 물었다.
“안 바꿀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은 바꿀 때가 아니야.”
그렇게 중얼거린 장세진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년에겐 이 얼굴이 더 익숙할 것 아냐? 나중에 내 손에 넣었을 때 그년이 보는 앞에서 바꿔야지. 얼마나 놀랄까? 엄청 충격 받겠지? 하하하!”
그런 장세진을 보며 장무진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나도 나중에 바꿔야겠다.”
장우량도 장세진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자 초운학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역시……. 그들 앞에서 바꾸실 생각이군요?”
그의 물음에 장우량이 대답 대신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고약한 취미를 가지고 계십니다. 후후.”
초운학이 그렇게 웃음을 흘릴 때 장세진이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 싸움은 또 안 합니까? 벌써 시간이 꽤나 흘렀는데.”
“아, 해야죠. 해야 하고말고요. 옆구리 한번 찔렀다고 허둥대는 꼴이 워낙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하하!”
초운학이 그렇게 말했지만 장우량과 장무진, 장세진 중 아무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그동안 저들을 공격할 비책을 분명 마련해 두었으리라.
“이번에는 압박을 좀 가해보려 합니다.”
초운학이 웃음기를 거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세 사람도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도움을 받을 겁니다.”
“도움?”
그 말에 장세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들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도움을 받는다니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너무 그렇게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주연은 우리가 될 테니까요.”
장세진의 심기를 읽은 초운학이 그를 달래듯 말했다.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본성의 도움입니다.”
장우량의 물음에 초운학이 짧게 대답했다.
“본성의 도움이라면…….”
“본성의 인원이 천중도문의 허를 찌를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찌르는 척이라고 하는 게 좋겠지요?”
“그럼 이번에는 천중도문을 치는 겁니까?”
장무진의 물음에 초운학이 검지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반월도문을 칩니다.”
“반월도문을?”
“저들은 긴밀한 연락 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사도련의 영역은 물론이고 그 주변 영역까지도 정보망을 넓히고 강화했죠. 본성의 인원이 마음먹고 은밀히 움직인다면 더 늦게 발각될 수는 있겠지만 일찍 발각되고 늦게 발각되고는 문제가 아니니 조금 드러내 놓고 움직일 겁니다.”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장세진이 말끝을 흐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천중도문을 공격하는 척하여 시선을 그리로 끌고 정작 반월도문을 친다. 하지만 장세진의 생각은 도리어 반월도문이 더 경계를 강화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평소 그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지만 그가 진짜 우려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반월도문이 경계를 강화한다 하여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다만 이번 작전으로 입지 않아도 될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였다.
쓸모없는 작전으로 전력 손실을 입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쯤은 장세진도 알고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세진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장무진이 물었다. 그러자 초운학이 미소를 지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 해서 전력 손실 위험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어차피 지금 저들은 혼란에 빠져 있다, 우리의 힘으로 정면 대결을 해도 이길 수 있다 이것 아닙니까?”
초운학의 말에 장세진과 장무진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길 싸움이면 유희를 즐겨도 되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웃고 떠들 정도의 여유는 가져도 된다고 봅니다.”
초운학은 이번 사도련과의 싸움을 전쟁이 아닌 유희로 보고 있었다.
무림 전체를 목표로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사도련은 작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고, 그렇다면 즐겨도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장무진은 어쩌면 자신 일행 중 가장 무서운 자는 초운학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본성에서는 누가…….”
“귀령대(鬼靈隊)가 나설 겁니다.”
초운학의 말에 장세진과 장무진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들… 마음에 안 드는데.”
장세진이 중얼거렸고, 장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성에서 장세진은 망혼대(亡魂隊)를 맡고 있었고, 장무진은 흑혈대(黑血隊)를 맡고 있다. 실제로 지금도 뇌격대는 망혼대가, 질풍대는 흑혈대가 대역을 하고 있었다.
비교적 망혼대와 흑혈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귀령대와는 정반대였다.
귀령대는 대주부터 대원들까지 모두가 차가웠다.
말도 없고 살가운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명에만 따르는 고지식함이 심해 다른 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때문에 본성에서는 함께 일하기 싫은 최고의 부대로 귀령대를 꼽고 있었다.
“후후, 걱정 마십시오. 어차피 그들이 우리와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이번 일 끝내면 그들은 다시 본성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장무진의 물음에 초운학이 고개를 저었다. 그에 장세진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래도 고생한 동료들인데 와서 좀 쉬다 가라고 할 생각입니다.”
“제발 그것만은!”
장세진이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초운학이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린다.
“나흘 뒤에 시작됩니다. 준비들 단단히 해두십시오.”
웃음기를 거둔 초운학의 말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초운학이 서늘한 표정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반월도문부터 지우는 겁니다. 차근차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