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백룡문에 사람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상천과 장여진 일행만 남아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피해 있으라는 상천의 말에 서기종이 해가 뜨자마자 모두 데리고 백룡문을 빠져나갔다.
상천은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연무장 한가운데에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모두가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지금 상천이 풍기는 분위기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게 했다.
“이제 얘기해 줘도 되지 않나요?”
장여진이 조심스럽게 상천에게 물었다. 간밤에 위험하다는 말 한마디 내뱉은 이후로 입을 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피바람이 불 것이오.”
상천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을 못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바람? 싸움이 벌어진단 말입니까?”
비호의 물음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전쟁에 가까운 싸움이 벌어질 것이오.”
상천의 말에 모두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것이, 상천은 지난번 장세진에게 당해 부상을 입은 이후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그가 돌연 하늘을 올려다보며 위험하다 하고 전쟁에 필적할 만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는데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사이 신기(神氣)가 생겼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혹시 아프고 나더니 어떻게 되신 건 아닐까?]
[설마…….]
비호와 화룡이 전음으로 상천의 정신 상태를 걱정했다. 그만큼 상천의 말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을 피신시킨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가요?”
“그렇소.”
“그럼 문주님과 저희는요?”
장여진의 물음에 상천이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언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공허한 눈빛에 장여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들은 싸울 사람들이 아니오. 남아 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드오.”
“문주님과 저희는 가능하단 말인가요?”
장여진의 물음에 상천이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상천의 대답에 장여진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밖에 한 번도 나가지 않고 싸움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이번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니 혼란스러웠다.
“싸움이 벌어질 것은 알면서 그건 모르시나요?”
“그건 바람의 냄새, 움직임을 통해 안 것이오. 바람에 실려 진한 살기가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알아듣지 못할 상천의 말에 장여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비호와 화룡은 달랐다. 상당히 놀란 듯했다.
[뭐야? 절정이야?]
비호가 화룡에게 보낸 전음에는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말을 이해하긴 어렵지. 자연과 동화되고 있다는 뜻이니까. 열양신단의 기운 때문인가?]
[그게 결정적이지는 않을 거야. 도움이 되기는 했겠지만 절정은 단순히 내력이 많아진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깨달음이 동반되지 않으면 오를 수 없어.]
[깨달음이 있었다는 건가?]
[한동안 정상이 아니셨잖아. 그때 뭔가 있지 않았을까? 무림기사(武林奇事)를 들어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잖아.]
[그런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감이 잘 안 오네. 아무리 그래도 겨우 일급을 넘어선 사람이 단박에 절정에 오르다니 이건 뭔가 불공평한데?]
그렇게 두 사람이 전음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장여진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다가오고 있었다는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요?”
“그렇소.”
상천의 대답에 장여진이 여소정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러자 여소정이 상천에게 물었다.
“그럼 일단 위험은 모면한 것 아닌가요? 피신한 문도들을 다시 불러와야…….”
“아니.”
상천이 여소정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폭풍전야의 고요일 뿐이오. 이제 곧 큰 사단이 벌어질 것이오.”
“백룡문에 말인가요?”
“아니. 사도련 전체에. 어쩌면 무림 전체에까지도.”
상천의 말에 다들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
은남도문과 반월도문, 천중도문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본산에 있는 정예 무인들까지도 고르게 나눠 각 지부에 배치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그런가 하면 멸문지화를 당한 중소문파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상황 파악에 나섰다.
워낙 급박하게 진행되는 상황이라 인원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렇게 되다 보니 각 문파의 군사들만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만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곧 엄청난 폭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
장무진과 장세진은 합산도문으로 복귀해 있었다.
장세진은 진작 복귀를 한 상태였고, 장무진은 그보다 이틀 늦게 복귀했다.
장무진이 돌아오고 초운학의 집무실에 장우량과 장세진까지 모두 모였다. 모이자마자 장세진이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장여진과 관련된 것이었다.
“혹여 그놈들이 그년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는 않았겠지?”
장세진의 물음에 장무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백룡문에는 가지 못했다.”
“못했다니?”
장무진의 대답에 장세진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내가 귀주성으로 가야 했어’라고 투덜거렸다.
“명령을 받았다.”
“명령?”
이어진 장무진의 말에 이번에는 초운학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신은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때에 빠지라는 말을 출발 전에 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각각 귀주성과 광동성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명령을 내렸단 말인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초운학이 장무진에게 뭔가 물으려는 찰나 장무진이 먼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엇입니까?”
“그분 수족 중에 십삼령(十三靈)이라고 있습니까?”
“십삼령?”
초운학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나름 스스로 그분의 최측근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었는데 십삼령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십삼령이라는 자가 찾아왔습니까?”
“예. 십삼령 중 사령이라고 했습니다.”
“음…….”
초운학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장세진이 말했다.
“그거 구라 아냐? 저놈들이 눈치채고 수를 쓴 거지.”
그 말에 장우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그때까지는 아직까지 그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을 때니까. 알았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머리를 쓸 정신은 없을 게다.”
장우량의 말에 장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십삼령이 그분의 수족이고, 실제로 그분께서 명을 내리신 것이라면…….”
“아마도 그분께서 마음을 굳히신 모양입니다. 움직이시기로.”
초운학의 말에 장우량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은 우리가 사도련을 차지한 후라도 늦지 않습니다.”
“제가 그분의 속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분께서 그리 마음을 정하셨다면 그리하시겠지요.”
초운학의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실까?’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할 뿐이었다.
***
며칠 동안 백룡문에서 아무런 기별이 없자 서기종이 조심스레 백룡문을 찾았다. 배동삼 등 몇몇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통에 떼어놓느라 애를 먹은 그다.
백룡문에 도착한 서기종은 겉보기에 아무 일이 없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상천과 장여진 일행은 무탈했다.
“오셨습니까?”
“어떻게 된 건가?”
상천의 인사에 서기종이 질문부터 했다.
“아직까지는 별 탈 없습니다.”
“아직까지라……. 그렇긴 하겠지. 지금 소문이 파다하네. 이곳 귀주성은 물론이고 광동성에서도 며칠간 쥐도 새도 모르게 중소문파 몇 곳이 멸문의 화를 입었다는군.”
서기종이 백룡문으로 오면서 주워들은 소문을 상천과 장여진 일행에게 전달했다.
상천은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장여진 일행은 깜짝 놀라고 있었다.
상천의 말대로 큰일이 있을 뻔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소행이겠지?”
“그럴 겁니다. 아마도 기습을 한 듯한데, 그때 보았던 장세진의 무위라면, 그리고 그런 괴물들이 꽤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닌 듯합니다. 아마도 반월도문과 천중도문에서 알아차렸기 때문에 물러선 것이겠지요.”
상천의 말에 서기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에요? 정말로 그들의 기습에 멸문의 화를 입은 중소문파들이 있다고요?”
장여진의 물음에 서기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제법 되는 모양이오.”
“그런……. 그 정도라면 제법 큰 규모의 인원이 움직였을 텐데 반월도문과 천중도문에서는 전혀 몰랐다고요?”
장여진의 물음에 이번에는 상천이 입을 열었다.
“큰 규모는 아닐 것이오. 압도적인 무위를 지닌 이십 명 정도의 인원이 재빠르게 움직였을 것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앞마당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 사도련의 일익이라는 곳에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소.”
상천의 말처럼 좀 더 큰 규모의 인원이 움직였다면 반월도문이나 천중도문에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비록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는 하지만 귀주성과 광동성에서의 두 문파의 정보력은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다.
“조만간 큰 사단이 벌어지겠군.”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른 문도들에 대해 물었다.
“다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일단 예전에 살던 곳에 있다네.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살 수 있었는지…….”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파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런 곳에서 버티는 것이 오히려 더욱 안전할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지금 당장 저희가 알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반월도문에서 뭔가 행동을 취하겠지요. 그럼 저희는 그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제대로 힘을 기르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하늘도 무심하군.”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미소를 지었다.
“힘들겠지만 이번을 기회로 삼는다면 더욱 빨리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상천의 말에 서기종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말이야 쉽지, 전쟁통에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가? 특히나 우린 무력도 약하고 머릿수도 적어.”
서기종의 대답에 상천은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당분간 문도들은 그곳에서 지내는 게 좋겠네. 손봐야 할 곳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추위를 피할 수는 있겠어.”
“예, 알겠습니다.”
“문주는 여기서 계속 있을 셈인가?”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상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서기종이 이번에는 장여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 소저도 계속 이곳에 계실 생각이오?”
“문주님의 명에 따라야겠지요. 이곳에 있으라면 있고 다른 문도들이 있는 곳으로 가라면 가고요.”
장여진의 대답에 서기종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오. 비록 백룡문의 문도를 자처한다고는 하나 장 소저가 합산도문의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서 이곳보다는 반월도문 본산에 도움을 청해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물은 것이오.”
서기종의 물음에 장여진은 미소를 지은 채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기로는 이곳이나 그곳이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물론 이곳이 좀 더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문도인 이상 특권 같은 건 챙길 생각 없어요. 아까 말했듯 문주님의 뜻에 따를 겁니다.”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상천을 바라보았다.
“장 소저와 여 소저는 다른 문도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편이 좋을 듯싶소. 생활하기에 불편하겠지만 그곳이 이곳이나 반월도문보다 훨씬 더 안전할 수 있으니. 그리고 비호와 화룡은 미안하지만 이곳에 남아주었으면 하오. 그대들의 무력이면 큰 도움이 될 듯하여 하는 말이오.”
상천의 말에 비호와 화룡이 시선을 맞추었다. 고민할 법한 부탁이었지만 두 사람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진 빚은 갚아야겠지요.”
장세진이 찾아왔을 때를 떠올리며 화룡이 이를 갈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상천은 미소를 지었다.
“서 형은 종종 돌아가는 상황을 좀 전해주십시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소문이라도 괜찮습니다.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아야 저희도 뭔가 행동을 할 테니 말입니다.”
“알겠네. 그렇게 하겠네. 자, 갑시다.”
서기종이 상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장여진을 향해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얼른 짐 챙겨서 나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여소정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왔다. 짧은 시간에 제대로 짐을 쌌는지 짐 보따리가 제법 컸다.
“조심하세요.”
장여진의 말에 상천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일 뿐 역시나 다른 말은 없었다.
서기종이 장여진과 여소정을 데리고 백룡문을 떠났다.
“이제 우린 뭘 하면 됩니까?”
세 사람이 떠나고 비호가 상천에게 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짧게 답했다.
“기다리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