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신월파는 광동성에 있는 검파로서 문도 수 이백 명 정도의 제법 규모가 있는 문파다.
게다가 일류급 무사도 제법 배출한, 광동성에서는 꽤나 이름을 알리고 있는 문파였다.
그 때문인지 늦은 밤에도 신월파의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만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곳이 신월파였다.
그런 신월파의 정문으로 장세진이 앞장선 뇌격대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다가가고 있었다. 이런 때에는 은밀하게 접근하는 것이 보통이건만 대놓고 정문으로, 그것도 보란 듯이 기운까지 뿜어내며 다가가고 있었다.
그럴진대 어찌 알아차리지 못할까.
경비를 서고 있던 무인들은 물론이고 잠을 자고 있던 무인들까지 속히 검을 들고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신월파의 움직임을 포착한 장세진이 복면 안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뒤쪽에 따라오는 뇌격대원들에게 말했다.
“비명 소리 없게 가자.”
그렇게 말한 장세진이 빠른 속도로 앞으로 치고 나갔다.
뒤따르는 뇌격대원들 역시 눈밭을 헤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하얗게 쌓인 눈이 그 때문에 마구 헤집어졌다.
하지만 그 흔적을 새로 내리는 눈이 지워가고 있었다.
잠시 후, 장세진과 뇌격대원들이 신월파 안으로 들어가고 정문이 굳게 닫혔다.
그날 밤.
장세진은 자신이 귀주성이 아닌 광동성으로 오게 된 분풀이를 마음껏 했다.
***
눈이 오는 광동성 신의와 달리 귀주성 삼도(三都)의 하늘은 구름만 잔뜩 끼어 있었다.
달빛도 없어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삼도에는 나부문(奈斧門)이 있었다.
도끼를 사용하는 문파로 광동성의 신월파만큼은 아니지만 삼도 인근에서는 그래도 누구나 다 아는 문파였다.
대놓고 쳐들어간 장세진과 달리 장무진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나부문 인근에 매복하고 있으면서 척후를 보내 경계가 허술한 곳을 찾고 그곳을 공략하려는 심산이었다.
잠시 후,
앞서 보냈던 척후병 두 명이 돌아왔다.
뇌격대원들처럼 척후로 나갔던 질풍대원들은 말이 없었다. 전음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장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기척 없이. 최대한 빠르고 간결하게 가는 거다. 이 밤의 고요함을 깨뜨리지 말도록.”
그렇게 말한 장무진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함께 있던 질풍대원들 역시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들이 향한 곳.
나부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느 때처럼 평화롭고 고요하기만 했다.
나부문의 독문 무공인 제왕십칠부법(帝王十七斧法)은 굉장히 파괴적인 무공이다.
일반적인 무공이 공수의 조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반면 제왕십칠부법은 오로지 공격 일변도의 초식들로 이루어진 무공이었다.
그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무공이나 무인과의 싸움에서는 초반에 기세를 압도하며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수준 높은 무인이나 약점 파악에 능한 자, 혹은 그보다 좀 더 위력적인 무공을 만나게 되면 쉽게 무너질 수도 있는 위험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을 나부문의 문주인 우지환(于志還)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지환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지금껏 그런 상대나 무공을 만나본 적도 없고, 그 때문에 우지환은 패배를 모르고 살아왔고, 좌절이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하지만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아왔던 우지환이 지금 이 순간 극심한 좌절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찰나의 순간에 쓰러지는 문도들을 보며 분노가 치밀었지만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나부문의 문도들을 처참하게 살육하고 있었고, 그 사이를 유유히 걸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는 그들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부법이 먹힐 것인가?’ 하는 질문이 우지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확하게 내려졌다.
장무진이 그의 앞에 서는 순간, 우지환은 들고 있던 도를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쿵!
저절로 무릎이 구부러졌다.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없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런 우지환의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장무진이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무인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라. 그것도 하필이면 이곳 귀주성에서.”
서걱!
순식간에 우지환의 목이 떨어졌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지만 신기하게도 장무진의 옷에는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죽음을 맞이한 우지환을 뒤로하고 장무진이 돌아섰다.
그곳에는 나부문의 문도들을 모두 저승길로 보낸 질풍대원이 서 있었다.
“화골산(火骨酸)으로 모두 처리하고 뜬다. 일각 후 출발한다.”
장무진의 말에 질풍대원들이 신속히 나부문 문도들의 시체를 화골산으로 녹이기 시작했다.
장무진 역시 화골산을 꺼내 눈앞에 있는 우지환의 시체에 천천히 부었다.
치이이이〜!
그러자 우지환의 시체가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퀴퀴한 냄새와 함께 타들어갔다.
일각 후,
나부문에는 사방으로 흩어진 핏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
탁탁탁탁탁!
해가 저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
하신이 다급히 나군천의 집무실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천중도문의 군사인 구진기(丘眞基) 역시 종무헌의 집무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각기 다른 장소에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은 똑같았다.
경악과 다급함이 잔뜩 묻어 있는 표정.
각각 나군천과 종무헌의 집무실로 달려가는 두 사람의 손에는 한 장의 서찰이 쥐어져 있었다.
쾅!
“문주님!”
나군천과 종무헌의 집무실이 거칠게 열리며 하신과 구진기가 두 사람을 불렀다.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두 사람은 하신과 구진기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불안감에 휩싸였다.
“합산도문에서!”
“……!”
하신과 구진기의 입에서 흘러나온 합산도문이라는 말은 나군천과 종무헌의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합산도문에서 본 성의 중소 규모 문파들을 치고 있습니다! 이미 당한 곳이 상당합니다!”
“젠장!”
똑같은 보고와 똑같은 반응.
한날한시,
서로 다른 곳에 있는 나군천과 종무헌의 반응이었다.
그 시점이 질풍대와 뇌격대가 귀주성과 광동성에 입성하여 각각 네 곳과 다섯 곳을 처리한 이후였다.
***
상천은 꾸준히 운기를 했다.
하지만 열양신단의 기운을 흡수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하루 종일 운기에 매진해도 녹아드는 신단의 기운은 극소량에 불과했다.
아니, 신단의 기운에 규화공이 녹아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규화공의 진기에 신단의 기운을 녹여내고 있는 것인지 단정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금 현재 상천이 사용할 수 있는 진기의 양은 열양신단을 복용하기 전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다 보니 상천은 왠지 자신이 퇴보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사용할 수 있는 진기의 양은 훨씬 줄었지만 오감은 더욱더 발달해 있었다.
이전보다 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으며, 더 약한 향기나 냄새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촉감 역시 더욱 예민해져 있었다.
상천은 사용할 수 있는 진기의 양이 줄어 허무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지만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오감이 발달한 점으로 위안을 삼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반월도문과 천중도문이 각각 질풍대와 뇌격대에 의해 중소 규모 문파들이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시각.
상천은 연무장 한가운데에 앉아 운기를 하고 있었다.
지난 기간 동안 꾸준히 운기를 해온 덕에 규화공의 진기를 따라 움직이는 열양신단의 기운도 많이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양이 많지 않아 한시라도 빨리 모든 기운을 녹여내고 싶은 상천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급해한다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상천은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마음을 편히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단전에 자리 잡은 기운을 대주천의 경로로, 중단전에 자리 잡은 기운을 소주천의 경로로 각각 한 번씩 돌린 상천이 눈을 떴다.
처음에는 하단전의 진기만 움직이며 운기를 했지만 조금이라도 속도를 올리고 싶은 마음에 상천이 생각해 낸 것이 하단전의 진기와 중단전의 진기를 다른 경로로 돌리는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두 진기의 흐름 모두를 신경 써야 했기에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제법 익숙해져 무리없이 진기를 돌릴 수 있었다.
눈을 뜬 상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한동안 잡지 않았던 검을 쥐고 섰다.
아직 근력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아 무리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왠지 오늘 밤은 가능할 것만 같았다.
스윽.
상천이 가볍게 한 발을 내디뎠다.
오랜만에 펼쳐 보는 천유보.
운용할 수 있는 진기의 양은 줄었다지만 그 속도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규화공의 진기와 열양신단의 기운은 급이 달랐다.
일만큼의 양으로도 규화공의 진기 팔만큼의 위력을 충분히 낼 수 있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오랜만에 맛보는 바람의 느낌.
상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한동안 다리만 움직이던 상천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없이 다듬어온 단월검.
달을 쪼갠다는 단월검을 환한 달빛 아래에서 펼치고 있었다.
확실히 근력은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족한 근력을 몸속의 진기가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었다.
진기가 자신의 움직임에 맞춘다는 느낌.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진기는 철저히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뒤엎어 버리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었기 때문일까?
진기의 흐름이 더욱 활발해졌고, 굳이 상천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진기의 적절한 분배가 이뤄졌다.
사용할 수 있는 진기의 양이 줄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줄곧 자신은 퇴보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퇴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일보했다.
그런 생각이 상천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상천이 펼치는 단월검이 후반부로 넘어가고 있었다.
규화공의 진기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그 부분. 과연 지금 펼치면 어떨까 하는 기대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우웅!
상천의 검이 울음을 토했다.
충만하게 전해지는 진기에 기쁘다는 듯이.
상천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부족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오히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력적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천유보와 함께 단월검을 펼치는 상천의 움직임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허공에 흩날렸다.
상천이 펼쳐 내는 검법의 위력을 느꼈기 때문일까?
연무장 주변에 사람들이 한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호가, 다음에는 화룡이, 그리고 여소정과 서기종, 녹엽, 낭호까지.
연무장 주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탄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달빛이 가져다주는 신비감과 즐겁게 검을 휘두르는 상천의 표정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보는 사람에게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검은 살인을 위한 병기라고 했고, 무공은 효율적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한 방법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 상천이 펼쳐 내는 검법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참 기분 좋게 검법을 펼쳐 내던 상천이 돌연 검을 멈추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상천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바뀐 상천의 감정에 다들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다.
비호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중단전은 사람의 감정을 다스리는 부분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기 때문에 화가 나고 슬프면 가슴을 치게 되는 것이다.
중단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완벽하지 않은 상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도 그렇고 옆에 있는 화룡 역시 그런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비호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상천이 중얼거렸다.
“위험해.”
“네?”
장여진이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하늘을 올려다보던 상천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천과 눈이 마주친 장여진은 깜짝 놀랐다.
그의 두 눈동자가 너무나 슬프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천이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곧 큰일이 벌어질 거야. 위험해.”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것일까.
모두가 궁금했지만 상천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한없이 슬픈 눈으로.
상천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또 한 곳의 문파를 정리한 질풍대의 피해는 없었다.
온전한 전력으로 다시 다른 문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 명 한 명이 다른 경로로 움직여 정해진 장소에서 모였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이 정도면 반월도문에서도 눈치를 챘을 터.
그렇다면 괜히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빠르게 움직여 한 곳이라도 더 정리하는 것이 낫겠다는 장무진의 판단이었다.
귀주성 태강(台江)을 떠난 장무진과 질풍대는 북상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관도를 따라 시커먼 무복을 입은 질풍대가 빠르게 질주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다음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는 닷새 정도.
조금 더 속도를 올린다면 나흘 만에 당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무진과 질풍대가 달리고 있는 관도는 강구(江口)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