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상천의 입안으로 들어간 열양신단은 마치 얼음 녹듯이 녹아 체내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열양신단에서부터 시작된 엄청난 기운이 상천의 혈도로 스며들었고,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살짝 상천의 입을 열어 열양신단이 모두 녹은 것을 확인한 비호가 서둘러 상천의 등 뒤로 돌아가 장심을 명문혈(命門穴)에 가져다 대었다.
그곳을 통해 내력을 불어넣어 안쪽을 확인한 비호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천의 체내는 난장판이었다.
좁은 혈도를 두 개의 진기가 뒤엉켜 흐르다 보니 무리가 가고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혈도가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린 비호가 서둘러 자신의 진기를 이용해 거대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열양신단의 진기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억지로 움직이려 하는 게 아닌 살짝살짝 방향만 바꿔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유도한 열양신단의 진기가 드디어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두 진기와 가까워졌다.
‘가라!’
비호가 진기를 이용해 열양신단의 진기를 그쪽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마치 홍수가 일어나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가듯 뒤엉켜 싸우고 있는 두 진기가 열양신단의 진기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충돌하고 있는 두 진기의 기세가 거세기는 했지만, 열양신단의 거대한 기운을 감당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된 건가?’
이대로 열양신단의 진기가 문제없이 체내를 돈다면 생각보다 쉽게 안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바라는 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두 진기를 휩쓸고 지나간 열양신단의 기운이 더욱 거친 기세로 체내를 돌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규화공의 진기와 현기심법의 진기가 뒤엉켜 싸우면서 울퉁불퉁해진 혈도를 반듯하게 펴놓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좁은 혈도를 더욱 넓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문제는 열양신단의 기운이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기만 했고, 그에 휩쓸린 규화공과 현기심법의 기운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폭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젠장! 그럼 그렇지!’
비호가 이를 악물고 자신의 진기를 움직여 열양신단의 기운을 제어하려 했다.
하지만 비호의 진기가 열양신단의 기운과 닿은 순간 심하게 튕겨져 버렸다.
‘큭!’
규화공의 진기와 현기심법의 기운을 그대로 흡수하듯 끌고 간 것과 달리 비호의 진기를 튕겨 버린 것이다.
그 힘이 너무 강해 비호는 약간의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한 번 실패했다고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이를 악물고 자신의 진기를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큰 반발력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쿨럭!”
비호가 피를 토했다.
이미 내상을 입고 있었기에 이번 반발력으로 더 심하게 번진 것이다.
결국 비호는 장심을 상천의 명문혈에서 뗄 수밖에 없었다.
내상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진 비호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더니 이내 가부좌를 틀고 운기에 들어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상천에게 닿았다.
아까처럼 창백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얼굴은 여러 가지 색깔로 변하고 있었다.
“폭주만 아니기를…….”
서기종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서기종의 바람대로 상천의 체내를 빠르게 돌고 있는 열양신단의 기운은 폭주를 하진 않았다.
다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운이 강해 비호가 제대로 통제를 하지 못했을 뿐이다.
열양신단의 기운은 다행히도 대주천의 경로를 따르고 있었다.
두 기운의 충돌로 상한 혈도를 다스리고 넓히면서 내상도 치료하고 있었다.
대주천의 경로로 한 바퀴 돈 열양신단의 기운이 하단전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래도 세 개의 기운이 뒤엉켜 있는 상황이다 보니 상천의 하단전만 가지고는 그 양을 감당키가 어려웠다.
결국 하단전에 머무르지 못한 나머지 기운은 그대로 하단전을 통과했다.
하단전을 통과한 기운은 곧장 상천의 중단전 쪽으로 향했다.
하단전에 많은 양의 기운이 머물렀다고는 하지만 중단전으로 이동하는 진기의 양이 상당했다.
하단전을 통과하면서 속도가 많이 줄어든 열양신단의 진기는 정확하게 중단전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는 마치 하루 종일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가장처럼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단전에 들어간 진기 역시 움직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진기의 흐름이 안정을 찾자, 창백하던 상천의 안색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내상이 심각했기에 아무리 열양신단의 효능이 뛰어나다 해도 단번에 모두 치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심각한 고비는 넘긴 셈이기에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도 상천의 안색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몸을 떨지도 않자 안도하기 시작했다.
풀썩.
상천이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그에 배동삼이 얼른 달려가 그를 부축하며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상천의 몸은 무거웠다.
상천을 안고 발걸음을 옮기는 배동삼은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배동삼이 따뜻한 자리에 상천을 눕혔다.
그러자 화룡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화룡은 비호의 운기가 끝날 때까지 곁에 있기로 하고 밖에 남았다.
방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상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또다시 이런 일을 겪었으니 그 걱정의 깊이는 처음보다 훨씬 더 컸다.
모두가 그렇게 상천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간단히 운기를 끝낸 비호가 화룡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문주님은 좀 어떠십니까?”
“안색은 많이 나아졌어요. 고생했어요.”
장여진의 말에 비호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맥문으로 진기를 흘려 잠시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할게. 내상이 심하잖아.”
비호를 대신해서 화룡이 나섰다.
상천의 옆에 앉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천의 팔목을 잡고는 살짝 진기를 불어넣었다.
비호가 내상 입는 것을 본지라 그녀는 모든 행동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하고 있었다.
다행히 상천의 몸 안에 있는 열양신단의 진기가 화룡의 진기를 튕겨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극소량이기는 했지만 체내에 투입된 그녀의 진기에 하단전과 중단전에 자리 잡은 진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혈도를 따라 몸 구석구석을 살핀 화룡은 자신의 진기를 거둬들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진기가 하단전과 중단전에 자리를 잘 잡았어요. 지난번처럼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거나 할 일은 없을 것 같네요.”
화룡의 말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나 한쪽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배동삼은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배동삼만큼은 아니지만 모두가 그만큼 걱정도 하고 안도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천은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다.
오래 잠들어 있지 않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상천은 사흘 후에 깨어났다.
하지만 일전에 의식을 잃고 지냈던 기간에 비하면 말 그대로 잠깐 자고 일어난 수준에 불과했다.
상천이 의식을 찾자 모두가 진심으로 안도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제는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있게 되어 더욱 기쁘기까지 했다.
그간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기 때문에 아직 근력이 채 회복되지 않아 이전처럼 걷고 뛰는 것은 어려웠지만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여 일어서는 것도 가능했다.
이 모든 것이 열양신단의 진기가 혈도를 어루만짐과 동시에 상한 신체 곳곳에도 기를 불어넣어 치유했기 때문이었다.
내상의 여파 때문에 움직임에 제약이 있기는 했지만 걸을 수 있고 두 다리로 설 수 있다는 사실에 상천은 마냥 기뻤다.
그렇다고 상천은 무리를 하지는 않았다.
천천히 걷고 서고 앉았다가 일어서며 하체 근력을 회복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는 시간에는 항상 운기에 몰두했다.
그런데 이 운기가 문제였다.
하단전과 중단전에 있는 열양신단의 기운을 규화공의 구결에 따라 운기를 하면 따라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량에 불과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전에 존재하던 규화공의 진기와 현기심법의 진기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부분에 대한 궁금증은 비호의 증언에 의해 해결이 되기는 했다.
자신이 주화입마 위기에 빠져 열양신단을 먹었고, 그 기운에 뒤엉켜 싸우던 두 기운이 휩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부분은 비호로서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보통 영약을 먹으면 혈도를 따라 자유롭게 흐르는 기운을 기존의 진기로 유도하고 어루만지며 흡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존의 진기가 없다면 아무리 구결에 따라 영약의 기운을 운기해 보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상천의 경우는 그와 달랐다.
규화공의 구결대로 운기를 하면 열양신단의 기운이 반응하고 있었다.
그 원인을 고심한 끝에 비호와 상천이 내린 결론은 열양신단의 기운 안에 규화공의 진기가 완전히 섞이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규화공의 구결에 따라 운기를 하면 규화공의 진기가 움직이면서 그에 달라붙어 있는 열양신단의 기운을 끌고 다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규화공의 진기가 남아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꾸준한 운기를 통해 열양신단의 기운만 온전히 흡수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었다.
상천은 최대한 마음을 편히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운기로 나날을 보냈다.
***
한겨울의 늦은 밤.
초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 때문에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조용히 내리고 있는 눈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내리는 눈만큼이나 주변은 조용했다.
늦은 밤에 눈까지 내리니 밖을 오가는 사람들을 다른 날보다 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다.
뽀드득뽀드득.
사박사박.
고요함을 깨는 발걸음 소리가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스무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모두가 검은 무복에 복면을 쓴 채 무섭게 치켜뜬 눈만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앞에 장세진이 나타났다.
“이런 날은 별론데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모여든 스무 명의 뇌격대원들을 바라보며 장세진이 말을 이었다.
“조용히 처리하자. 쥐도 새도 모르게. 한 식경이면 충분할 거다. 손속에 사정 따위는 두지 말도록.”
대원들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마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대원들을 한차례 훑어본 장세진이 돌아서면서 목까지 내렸던 복면을 올려 썼다.
그의 앞에는 광동성 신의(信宜)에 있는 신월파(新月派)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