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사도련의 다른 세 문파와 달리 합산도문은, 특히 초운학은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형산에서의 일로 칼자루는 합산도문이 쥐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의 이 상황을 마음껏 즐기다가 일을 시작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사도련 장악의 칠 부 능선을 넘었군. 이제 엉덩이 무거운 무림맹만 조심하면 되겠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무림맹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미륵 같은 존재라 어쩌면 지금 사도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일들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지만 한 번 움직이면 엄청난 힘을 보이는 곳이 바로 무림맹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무림맹과 사도련의 힘을 비슷하게 보고 있지만 초운학의 생각은 달랐다.
사도련은 겉으로 드러난 힘이 칠 할이라면 무림맹은 겉으로 드러난 힘이 삼 할 내지 사 할에 불과했다.
“하지만 안주하는 자들은 세월이 흐르면 약해지게 마련이지. 후후.”
그렇게 중얼거린 초운학이 합산도문을 벗어나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초겨울에 들어서자 하루가 다르게 날이 추워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백룡문 보수를 맡은 인부들의 옷부터가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백룡문 보수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짓기 시작한 접객실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고, 여러 가지 업무를 볼 수 있는 전각과 거처가 모여 있는 전각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또한 모두가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는 주방과 식당도 새롭게 지어지고 있었다.
문도 모두가 변해가는 백룡문의 모습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바로 장여진 일행과 배동삼, 병목, 공혜였다.
장여진 일행이야 이곳 백룡문에 올 때부터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고, 이번에 은남도문에 다녀온 이후 좀 더 확실해졌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배동삼과 병목, 공혜의 경우는 상천이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듣지 못했으면 모르겠지만 들어버린 후라 언제가 될지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들을 보며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만 번져 있었다.
모두가 밖에서 움직이는 낮 시간.
상천은 여전히 누워 있었다.
어느 정도 시력도 돌아왔고 청력도 회복해 주변 사물을 분간하고 소리에 반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입에서 소리도 잘 나오지 않고 있었고 몸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고작해야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수준이었다.
의식은 있는데 움직이질 못하니 상천은 무료함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지금 이 순간 상천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진기를 들여다보는 것밖에는 없었다.
상천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장세진이 다녀간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제는 가끔 진눈개비가 흩날릴 정도로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상천은 여전히 누워 지낼 뿐이었다.
내상도 거의 다 나았고 정신도 말짱한데 왜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상천을 답답하게 만든 또 하나의 일이 며칠 전에 벌어졌다.
그동안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몸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진기가 최소한의 흐름을 유지한 채 하단전에 웅크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누워 있는 상태에서 규화공의 구결을 읊조리며 운기를 해보려 했지만 하단전에 머물고 있는 진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하단전에 모여 있는 진기의 겉으로 질기고 얇은 막이 씌워져 있어 단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차례 운기를 해봤지만 할 때마다 결과는 똑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하단전을 찔러보기를 며칠.
결국 상천은 포기하고 말았다.
왠지 지금 하단전의 상태가 자신의 몸 상태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잠에서 깨면 상천은 습관적으로 하단전을 한 번씩 툭툭 건드려 보았다.
어차피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그냥 심심한 마음에 한 번씩 건드려 보는 것이었다.
대신 상천은 서기종이 알려준 현기심법의 구결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미뤄두었던 것을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현기심법의 구결을 외우며 부지런히 호흡을 하는 상천은 머릿속으로 또 하나의 장면을 그렸다.
바로 예전에 환영을 불러놓고 시험해 보았던 중단전을 만드는 장면이었다.
물론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중단전에 대한 대략적인 개념이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잘만 하면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현기심법을 중단전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해보기 전에 미리 환영을 불러놓고 시험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드는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 곧장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현기심법의 구결을 외우며 호흡법을 하기 시작한 지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규화공을 처음 수련했을 때 하단전에 진기가 생긴 것이 석 달이 다 되어갈 때 즈음이었다.
그때는 구결의 의미도 모르면서 무작정 외우기만 했고, 종삼이 시키는 대로 호흡만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름대로 그동안 수련을 해오고 많은 것을 생각하고 경험하면서 이제는 구결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면서 수련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천은 보름 만에 진기가 느껴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언제나 뜻밖의 일이 벌어지곤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구결을 외우며 호흡을 하고 있는데 명치 부근이 뜨끔했다. 무언가 콕콕 찌르는 아픔이 아닌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음?’
상천이 구결 외우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명치 부근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뭐였을까?’
혹시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아닐 것이라 단정 지었다.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그럴 리가 없었다.
상천이 다시 구결을 외우며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명치 부근에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보름의 시간이 더 흘러 현기심법을 수련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처음 수련을 시작하고 보름째 되던 날 명치 부근에서 느껴졌던 꿈틀거림은 더 이상 없었다.
그 느낌 이후 며칠 동안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더욱 집중했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자 이제는 아예 그 일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그렇게 꼭 한 달째 되는 날.
상천은 명치 부근에서 그때와 똑같은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조금 더 확실하게 느낌이 왔다.
‘진짠가?’
못 믿을 일이었다.
한 달 만에 중단전에서 느낌이 왔다는 것 자체가 그랬다.
진기가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하단전이 아닌 중단전이기에 믿을 수가 없었다.
현기심법을 수련하며 항상 중단전을, 환영을 통해 시험을 해봤던 그 장면을 염두에 두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실제로 중단전에서 느낌이 올 것이라는 큰 기대를 하지는 않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 현재 규화공의 진기가 하단전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단전에 두 개의 진기를 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있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중단전에서 반응이 오자 상천은 얼떨떨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팔다리를 살짝 꿈틀거리는 정도였지만 최대한 움직일 수 있는 만큼 움직여 기쁨을 표시하기도 했다.
‘해보자! 할 수 있어!’
속으로 자신감을 북돋운 상천이 다시금 현기심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
겨울에 들어선 어느 날.
초운학은 자신의 집무실에 장우량과 장무진, 장세진을 모두 불러 모았다.
세 사람이 모이자 초운학이 하나의 표가 그려진 종이를 가운데에 펼쳐 놓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우리의 전력이지요.”
장우량의 물음에 초운학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종이에는 본산의 전력, 각 지부의 전력 등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이런 걸 알아야 합니까? 어차피 쓸어버리면 그만인데.”
장세진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그런 그를 초운학은 눈빛 하나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알아야지요. 우리의 목적은 사도련이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요? 암요! 알아야 하고말고요.”
장세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현재 본산에 있는 인원이 대략 이천 명입니다. 그리고 각 지부에 나가 있는 인원까지 합치면… 삼천오백 명 정도 되는군요.”
“생각보다 적은 것 같습니다.”
초운학의 설명을 들은 장우량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초운학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져 있었다.
“단순히 머릿수로만 따지면 안 되지요. 본산에 있는 이천 명은 고스란히 우리가 데려온 전력이고, 각 지부의 지부장도 새로 앉혀놓은 전력 아닙니까? 그 인형들의 위력은 잘 알고 계시니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초운학의 말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머릿수가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나머지 세 문파의 인원을 모두 합치면… 만 명이 넘는군요. 거의 세 배입니다.”
“거기다가 각 세력에 속한 문파들을 합치면…….”
이어진 장무진의 말에 초운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것, 일단 우리 세 사람이 천 명씩 베면 삼천 명이니 문파 하나는 끝장나는 거 아닙니까?”
장세진의 허세에 초운학은 미소만 지었다. 대신 장무진이 그를 흘겨보았다.
“거참, 흘겨보기는…….”
그렇게 말하며 장세진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초운학의 말에 장세진이 두 눈을 반짝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두 분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한판 뜨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 물음에 초운학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에 장세진은 지금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보였다.
초운학이 장무진과 장세진에게 각각 지도 하나씩을 건넸다.
“귀주성과 광동성에 있는 문파들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입니다.”
그의 말에 두 사람은 각기 지도를 펴보았다. 그의 말처럼 각 성에 있는 문파들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지도에 있는 문파들을 차례로 지우라는 뜻이었다.
“음? 광동성? 왜 내가 광동성입니까?”
장세진이 건네받은 지도는 귀주성이 아닌 광동성이었다. 지도를 받는 순간부터 오로지 백룡문만 생각하고 있던 장세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도 어지간하면 귀주성으로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세진 공자께서 광동성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리했습니다. 광동성 사람들도 바닷가에 인접해 있다 보니 뱃사람들의 영향으로 이곳 광서성 사람들만큼이나 굉장히 거칩니다. 그런 자들을 제압하는 데에는 세진 공자만 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의 대답에 장세진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초운학의 말은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높이 사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말이니 무작정 귀주성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장세진은 초운학이 아닌 장무진을 설득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넌 못하려나? 광동성 정리하는 거?”
“어디든 상관없다. 다만 이렇게 배정하신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겠지. 난 명령에 따를 뿐이다.”
“바꿔주면 안 되겠나?”
“말했을 텐데. 명령에 따를 뿐이라고.”
그 말은 초운학이 바꿔주라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쳇! 꽉 막힌 녀석 같으니라고.”
장세진이 투덜거렸다. 그러자 장무진이 한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깟 계집 때문에 일을 그르치려 하지 마라.”
“그르치긴 누가 그르쳐! 지금까지 그런 적 있나?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 그깟 계집?”
장세진이 눈에 불을 켜고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장무진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만!”
보다 못한 장우량이 장세진을 말리고 나섰다.
그러자 장세진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불만 가득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장여진 정도면 충분히 빠질 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지요. 같은 사내로서 인정합니다. 하하! 그래도 조금만 참으세요. 머지않았습니다. 시간은 많아요.”
“알았수다!”
장세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에 초운학은 미소만 지을 뿐 타박을 하지는 않았다.
“자, 내일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여기 있는 문파들을 다 지우면 됩니까?”
“다 지우면 좋겠지만, 일단 지우기 시작하면 반월도문이나 천중도문에서 눈치를 챌 겁니다. 그렇게 되면 충돌은 일으키지 마시고 후퇴해 오십시오.”
“후퇴?”
초운학의 말에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장세진이 물었다. 안 그래도 광동성으로 가야 돼서 짜증 나는데 마주치면 후퇴하라니 더욱 짜증이 났다.
“모르겠느냐? 이번 일의 목적은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지 우리 전력을 깎아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장우량의 말에 장세진은 또 한 번 입을 빼쭉 내민 채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바깥바람 좀 쐬고 오십시오. 돌아오실 때 즈음이면 대충 준비가 끝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장우량과 장무진, 장세진의 눈이 빛났다.
세 사람의 변화에 초운학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