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91화 (91/141)

#091화.

장세진이 다녀간 지 한 달 가까이 지났다.

아직도 상천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처음에 비해 호흡도 많이 안정되었고 창백했던 안색도 많이 좋아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진기의 흐름은 미약했다.

그 흐름이 너무 미약하여 마치 조금씩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힘든 것 같았다.

한 달 가까이 깨어나지 않는 상천을 보며 모든 사람들이 걱정했다.

이렇게 평생 누워 있을 것만 같아 두려워하기도 했다.

특히나 공혜는 상천 걱정에 제대로 된 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장여진은 상천에게 열양신단을 먹이자고 했다. 하지만 여소정과 비호, 화룡이 그녀를 말리고 나섰다.

지금처럼 진기의 흐름이 미약할 때에는 영약이 오히려 독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약을 복용하고 체내에 밀려드는 엄청난 기운을 본래 가지고 있는 진기로 다스리고 녹여내야 하는데 지금은 진기의 흐름도 미약할뿐더러 의식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장여진은 열양신단을 먹이지 못했다.

***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천은 계속 무의식 속을 헤매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곳.

어디인지 모를 공간에 상천은 혼자 웅크리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는 상천은 여전히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장세진이 보여준 한 수에 죽을 뻔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죽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

그것이 가져온 정신적 충격.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두렵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앞으로 벌어질 싸움이 떠올랐다.

도검이 난무하고 사람이 죽어가는 전쟁터.

실제 본 적은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눈앞에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

광기 어린 눈빛으로 무기를 휘둘러대는 사람들.

온몸에 피 칠을 하고 광소(狂笑)를 터뜨리는 사람들과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들.

막연하게만 다가왔던 그것들이 이번 일로 너무나 확 와 닿았다.

죽는다는 것.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가져다주는 공포에 상천은 고개를 숙인 채 들 수 없었다.

상천은 더욱더 웅크리기만 할 뿐이었다.

얼마가 지났는지 모른다.

상천은 계속 웅크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무슨 소리가 들이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그 소리에 신경 쓰고 집중하고 고개를 들면 살벌한 전장이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자신을 죽이러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상천은 웅크린 채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듣지 않으려 닫아놓은 그의 귀를 뚫고 한줄기 소리가 찾아들었다.

‘천아.’

상천이 웅크린 채 슬며시 눈을 떴다.

낯익은 목소리. 하지만 누구의 것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천아, 고개를 들어보아라.’

낯익음을 넘어 친숙한 목소리.

그리고 그리운 목소리.

상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꺼풀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뜨려고 하는데 열리지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치켜떠서 겨우 바늘구멍만 하게 열린 게 고작이었다.

‘힘들어……. 더 잘래.’

상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늘구멍만 하게 열렸던 그의 눈이 다시 닫혔다.

상천은 고개를 파묻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있어도 무서운 것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단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그리웠던 한 사람의 모습.

‘사부…….’

웃고 있는 종삼의 모습.

한 가득 공포가 드리워 있던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웅크리고 있는 상천을 보며 종삼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더니 한마디 던졌다.

‘한심스럽기는. 쫄았냐?’

‘사부…….’

‘왜 그러고 있어? 너 상천이잖아? 바락바락 대들기 잘하고 악으로 깡으로 버티던 상천이잖아?’

‘…….’

상천은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듯 아무런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고작 그깟 놈한테 한 방 맞고 이러고 있냐? 피 좀 나면 누가 죽어? 예끼! 못난 놈.’

‘…….’

‘마, 넌 백룡문의 문주야, 문주! 백룡문 사십오대 문주 상천!’

‘힘들어.’

겨우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종삼은 그런 상천을 더욱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힘들어, 너무 힘들어. 죽을 거 같아.’

‘마! 안 죽어!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줄 아냐? 너 이상해졌다?’

종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 상천은 다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왜 너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는 거냐?’

‘문주잖아.’

‘문주면 다 혼자 책임지고 짊어져야 되는 거야? 누가 그래?’

‘…….’

‘나야 혼자였으니까 그렇다 치고, 넌 그것도 아니잖아? 이 복 받은 놈아! 그러면서 힘들다고 엄살은!’

종삼의 말에 상천은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나눠 짊어져라.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면 두려운 게 없어질 게다. 함께니까. 나도 그랬어. 너랑 같이 지냈던 그 십 년. 두려울 게 없었다.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너랑 함께였으니까.’

종삼을 바라보는 상천의 시선에 조금씩 초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종삼의 모습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너도 한번 느껴봐, 그걸.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부…….’

‘그리고 약속은 꼭 지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볼 테니까!’

종삼이 완전히 사라지면서까지 상천에게 소리쳤다.

사라진 종삼이 서 있던 그 자리를 쳐다보며 상천이 말했다.

‘응!’

***

상천은 눈을 떴다.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에 최대한 힘을 주어 크게 떴다.

너무 오랫동안 감고 있었기 때문일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동자에 희뿌연 막이 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둡지 않고 밝은 것을 보니 밤은 아닌 듯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시야는 여전히 확보되지 않아 답답했다.

하지만 몸의 감각은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완전치 않아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아직은… 좀 더 쉬어야 하는 건가?’

상천이 다시 눈을 감았다.

“아…….”

상천이 다시 눈을 감자 공혜가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다.

눈을 떴지만 초점이 흐렸고, 옆에서 그렇게 불러도 안 들리는지 반응이 없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눈을 떴으니까.

비록 다시 감기는 했지만 또다시 뜰 거라는 희망을 보았으니까.

공혜의 눈가는 촉촉했지만 입가는 밝게 웃고 있었다.

상천이 처음 눈을 뜨고 닷새째 되는 날.

상천은 여전히 잠시 눈을 뜨면 초점 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쳐다보다가 눈을 감기를 반복했다.

듣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 옆에서 하는 소리에 반응하지 못했다.

대신 그동안 미약하기만 했던 규화공의 흐름이 눈에 띄게 좋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백룡문에는 활기가 돌고 있었다.

그만큼 상세가 호전된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시간.

상천의 체내에서는 규화공의 진기가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 남아 있는 내상을 치유하기 위해 부지런히 온몸의 혈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상천은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그리고 체내에 돌고 있는 진기의 흐름을 모두 보고 있었다.

의식은 있지만 아직 몸 전체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진기를 더욱 자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예전만 못하네. 매가리가 없어.’

상천이 받은 첫 번째 느낌은 진기의 흐름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한 달 가까이 의식을 찾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던 그다. 그나마 의식을 찾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예전만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느낌이 달라.’

진기의 흐름은 예전만 못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확실히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느낌이 있었다.

진기의 예전 느낌이 뭔가 구멍이 많은 엉성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 구멍들이 많이 채워진 것 같았다.

묵직한 느낌.

뭔가 단단해진 느낌.

그런 것들이 지금 상천의 체내에 흐르고 있는 진기에서 느껴졌다.

느낌은 묵직해졌는데 정작 진기의 양은 종전보다 줄어 있었다.

내상에서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가득 채워져 있던 진기가 줄어들다 보니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회복되겠지.’

상천은 좋게 생각하려 했다.

자신의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처럼 진기 역시 회복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에 가서는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진기의 흐름을 바라보던 상천은 잠에 빠져들었다.

상천은 잠이 들었지만 진기는 여전히 체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개척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가슴 철렁한 경우도 있었다.

기문혈(氣門穴)이나 당문혈(當門穴) 같은 사혈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의식을 차리고 있어도 위험한데 지금처럼 잠을 자고 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지면 말 그대로 비명횡사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규화공의 진기는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언제 사달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상천 자신은 물론이고 백룡문의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그가 괜찮아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상천의 몸 안에 숨겨져 있는지도 몰랐다.

***

형산에서의 일에 실패한 후,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은 긴밀한 연락 체계를 유지하며 합산도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날 본 장우량과 장무진, 장세진 세 사람의 힘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직접 부딪쳐 보지는 않았지만 쉽게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만약 하신의 예측대로 그들이 유마궁의 유마환용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실제로 백여 년 전의 군마성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면 사도련의 힘만으로는 버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군천이나 종무헌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종무헌의 입에서 선공을 하자는 이야기가 쏙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선공은 먼저 쳤을 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취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방어를 굳건히 하고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더 나은 일이다.

그 때문에 세 문파는 최대한 웅크린 채 합산도문의 사소한 움직임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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