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백룡문으로 향했던 장세진은 늦지 않게 장우량 일행에 합류했다.
합류하자마자 사고 친 것 아니냐는 장우량의 물음에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며 형산을 오르고 있었다.
형산을 얼마나 올랐을까.
장세진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 거 엄청 심어놨구만. 냄새가 아주 지독해.”
“그만큼 만반의 준비를 해놨다는 거겠지.”
장세진의 말을 장무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았다.
“심심한데 한두 놈 잡아볼까?”
그렇게 말하며 장세진이 슬쩍 장우량의 눈치를 보았다. 장소가 장소인만큼 그가 안 된다고 하면 조용히 오를 셈이었다.
“좀 놀다 올라올 테냐?”
“오잉?”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던 장우량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장세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그래도 됩니까?”
“싫어? 싫으면 말고.”
“아닙니다!”
행여 장우량이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얼른 대답한 장세진이 들뜬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너도 좀 놀다 와.”
“알겠습니다.”
장우량의 말에 장무진도 고개를 숙여 보이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장세진과 장무진이 사라지고 따라온 세 명의 호위만 대동한 채 장우량이 산을 올랐다.
세 문주가 장우량을 기다린 지 벌써 반 시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 사람은 조금씩 초조해져 갔고, 점점 더 긴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린 지 정확히 반 시진이 될 무렵.
세 명의 호위를 대동한 장우량의 모습이 보였다.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얼굴에는 환한 미소를 띤 채.
“늦으셨소이다, 장 문주!”
“죄송하오. 최대한 서두른다 했는데 시간 계산을 잘못한 듯하오. 다른 문주님들께도 미안하게 됐소.”
가백현의 말에 장우량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가 포권을 했다.
“다들 오래 기다리셨소?”
“아니외다. 얼마 안 되었소.”
장우량의 말에 종무헌이 괜찮다는 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자, 다들 앉읍시다.”
가백현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오랜만에 뵈니 정말 반갑소. 하하!”
가백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가백현의 주도로 분위기는 편안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정기 회동이기는 하지만 사실 평화가 지속되면서 딱히 회의를 할 것도 없고, 그냥 오랜만에 만나 그간 못 나눈 담소나 나누고자 이런 곳에 자리를 마련했는데, 어떠시오?”
“경치도 좋고 날도 맑은 것이 아주 좋소이다, 련주.”
가백현의 말에 종무헌이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장 문주.”
“왜 그러시오?”
“지금 본인을 비롯해 우리 세 사람이 가장 기다리는 게 뭔지 아시오?”
“무엇이오?”
장우량이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가백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의 그 일 말이오. 지부장 한 명이 여식을 상하게 할 뻔했다던 그 일.”
“아! 그 일 말씀이시오? 허허. 어차피 다 지난 일이고 어렵지 않게 해결한 일이라 본인도 잊고 있었소. 딱히 드릴 말씀이 없는데…….”
“그래도 해보시오. 이런 자리에서나 털어놓지 어디 가서 얘기하겠소?”
종무헌이 장우량을 부추겼다. 그러자 잠시 뜸을 들이던 장우량이 입을 열었다.
“뭐, 그럼 얘기하리다. 들으시고 나서 재미없다고 사람 무안 주기 없소이다. 하하하!”
장우량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도 웃음을 터뜨렸다.
“본인이 제법 좋은 술을 구해 나눠 마시려고 가져왔소. 이런 자리에 술이 빠지면 안 되지 않겠소?”
가백현의 말이 끝나자 호위무사 한 명이 술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마개를 열자 향긋한 주향이 사방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오〜 향이 좋소이다, 련주. 무슨 술이오?”
“이게 바로 팔대명주 중 하나라는 소흥가반주(紹興加飯酒)라는 것이오.”
“오〜 그 귀한 술을!”
종무헌이 굉장히 기뻐했다. 그에 가백현도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문주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문주들의 잔을 모두 채운 가백현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잔도 채우고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일단 한 잔씩 마시고 시작하십시다.”
그에 나머지 문주들도 모두 술잔을 들자 가백현이 크게 외쳤다.
“사도련의 번영을 위하여!”
“위하여!”
힘찬 구호와 함께 네 명이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은 장우량이 술을 마시는 걸 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산공독이 제대로 먹혀들려면 족히 반 시진은 지나야 하니 이제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되었다.
“자, 이제 얘기해 보시구려, 장 문주.”
가백현이 장우량에게 합산도문에서 있었던 사건을 물었다. 그러자 장우량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전양지부의 지부장이었던 고척방이 내 여식을 공격한 일이 있었소. 그 보고를 받고 어찌나 화가 치밀어 오르던지 분노를 주체하기가 어려웠소.”
장우량의 말에 모두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조사를 했는데 도저히 고척방이 왜 그랬는지 증거가 나오질 않았소. 아무리 봐도 고척방의 독단적인 범행이었소이다. 하지만 난 그걸 믿을 수가 없었소. 의심하고 또 의심을 했고, 배후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소이다.”
“그래서 어찌하셨소?”
“내부로 눈을 돌렸소. 본인의 여식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부터 의심하기 시작했고, 여식이 대주 자리에 앉은 청운대라는 신설 부대부터 조사를 하기 시작했소이다.”
“청운대? 들어본 적이 없는 부대요.”
종무헌의 말에 장우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외다.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전양지부에 보낸 것이 첫 임무였으니. 게다가 원래 내부에 있던 무인들을 차출하여 만든 것이 아닌 외부 낭인 중 출중한 자들을 뽑아 만든 부대였소.”
“그래서, 그들 중 누군가에게 혐의가 있었소?”
가백현의 물음에 장우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었소. 하마터면 여식을 내 손으로 저승에 보낼 뻔했다는 생각에 당장 그자를 독방에 넣고 친히 심문을 했소이다.”
장우량의 말에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은 점차 빠져들기 시작했다.
물론 철저하게 반 시진의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놈이 갇힌 지하 독방에 직접 찾아갔소. 그리고는 모두를 물리고 일대일로 그놈 앞에 앉아 물었소. 왜 그랬느냐고, 목적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뭐라 했소?”
종무헌이 물었다.
“그랬더니 그놈이……. 잠깐만.”
이야기를 잘 끌고 오던 장우량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그에 세 사람은 그가 눈치챈 것은 아닌가 하여 극도로 긴장했다.
“왜 그러시오?”
가백현이 얼른 뒷이야기를 하라는 듯 궁금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실은 오늘 두 자식 놈을 데리고 왔는데… 잠시 시간 좀 보내고 오라고 했는데 아직 안 오고 있소이다.”
그렇게 말하며 장우량이 자신이 올라온 길 쪽을 돌아보았다.
세 명의 문주는 지금 그를 처리를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장우량에 장무진, 장세진이라면 간단히 처리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산공독이 제대로 퍼지려면 아직 시작이 좀 남았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처리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아, 저기 올라오는구려.”
그렇게 말한 장우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아예 세 명의 문주를 등지고 서는 상태였다.
무방비 상태.
문주들의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련주? 지금이 기회인 듯하오!]
종무헌의 전음에 가백현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고민을 하고는 두 명의 문주에게 고갯짓을 했다.
처리하자는 신호.
그에 세 명의 문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른 올라오너라!”
장우량의 외침에 장무진과 장세진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장무진과 장세진은 각자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 머리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 머리를 각자 두세 개씩 들고 열심히 산을 오르는 모습에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들 그렇게 놀라시오? 두 아들 녀석 때문이오, 아니면 손에 들린 머리 때문이오?”
장우량이 미소를 지은 채 돌아서며 물었다.
그를 처치할 기회를 놓친 세 문주는 당황한 표정으로 살짝 뒤로 물러섰다.
“아〜 잘 놀다 왔다!”
회동 장소까지 올라온 장세진이 손에 들고 있던 머리를 술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술상에 부딪치고 튕긴 머리들이 바닥에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하나같이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재미는 좀 즐겼느냐?”
“속이 다 시원합니다. 하하! 좀 더 놀고 싶었는데 그만 올라가자는 통에…….”
장세진이 장무진을 흘겨보며 말했다.
“앞으로 즐길 일이 많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라.”
“네〜 네〜”
그래도 기분이 좋아진 장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 이 자리의 목적이 우리 머리를 이렇게 만들려는 것 아니었소?”
장우량의 물음에 세 명의 문주는 할 말을 잃었다.
돌변한 장우량은 완벽하게 세 사람의 기세를 압도하고 있었다. 물론 세 문주가 당황한 탓도 있긴 하지만 그만큼 장우량의 기세는 위력적이었다.
“우릴 너무 물로 봤구만?”
장세진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에 피식 웃은 장우량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깟 산공독으로 날 어찌하려 했겠느냐?”
그렇게 말하며 장우량이 손을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시커먼 액체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작 한다는 생각이 산공독이었어? 이거 예전에 내가 물처럼 마시던 건데!”
장세진이 과장을 보태어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듯 장우량에게는 산공독이 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있는 장무진이나 장세진에게도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차앙!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이 각기 도를 뽑아 들었고, 그들이 데려온 호위들도 무기를 손에 쥐었다.
세 명의 문주뿐만 아니라 그들이 데려온 정예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가히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장우량과 장무진, 장세진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괜히 죽기 싫으면 그 도 가만히 내려놓고 눈 내리까는 게 좋을 거야. 경고다.”
장세진이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러지 않았다.
“경고를 무시하면 이렇게 되오.”
장우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무진의 신형이 흩어졌다. 그러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타난 그의 손에는 또 다른 머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설마 이 정도 무위일 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다.
지금 보여준 한 수로 자신들과 비등한 수준이거나 그보다 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무진이 그 정도인데 장우량은 어떻겠는가?
비록 세 문주 쪽은 머릿수가 있다 하나 그것으로 절대 우위를 점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쫄았나?”
장세진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에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뒤섞여 나타난 결과였다.
“오늘은 죽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으니 그냥 가겠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두시오.”
그렇게 말한 장우량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긴장하는 게 좋을 것이오. 이제 곧 당신들 차례니까.”
그렇게 말한 장우량이 몸을 돌려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세 명의 문주를 노려보던 장무진과 장세진도 그 뒤를 따랐다.
완벽히 등을 보인 상태.
그것은 방심이 아닌 자신감이었다.
결국 세 명의 문주가 세웠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