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군마성은 백여 년 전 마교를 대신해 마도를 이끌던 곳이었다.
단일 문파였지만 마도의 길을 걸었고, 세력을 키워가며 마도의 길을 걷는 문파들을 끌어안았다.
반면 유마궁은 조금 길을 달리했다.
마교의 정신을 이어받은 정통 마도인 군마성과 달리 유마궁은 배교의 후예였다.
흔히 사람들이 배교와 마교를 같은 곳이라 생각하지만 두 곳은 가는 길이 달랐다.
그러나 어쨌든 군마성과 유마궁은 같은 마도의 길을 걷는 문파였고, 정도와 맞서기 위해 연합을 맺었다.
다른 마도의 문파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유마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은 다른 마도의 문파들과 달리 유마궁은 군마성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연합을 맺었기 때문이다.
비록 유마궁이 군마성만큼의 무력은 없었다고 하지만 독자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될 수 있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오.”
가백현의 말에 하신이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과거 군마성은 모두가 회생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패하기는 했습니다만 전멸하지 않았습니다. 잔존 세력이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유마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인원을 백 명이라 봤을 때 유마궁의 환술이나 무공을 제대로 아는 사람 한두 명만 살아 있어도 명맥은 이을 수 있습니다.”
“그럼 군사의 생각은 군마성의 잔존 세력이 몇 안 남은 유마궁의 후예들을 끌어안았다는 것이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 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저력이 있는 문파가 음지에 틀어박혀 와신상담하기에는 충분한 세월이지요.”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정자 밖에서 호위를 서고 있는 상천마저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자 위에서 오가는 이야기의 대부분을 상천은 알아듣지 못했다. 특히나 군마성과 유마궁의 이야기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천은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빠르게 분위기를 수습하는 것, 그리고 냉철하게 판단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 점 등 상천이 배워야 할 부분들이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만약 저들이 군마성이라면… 확실히 조심할 필요가 있소.”
가백현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종무헌이 다시 한 번 선제공격을 제안했다.
“그들이 군마성이라면 더욱더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외다. 자칫 저들이 채비를 할 시간을 준다면 부담스러워지는 것은 우리 쪽이 아니겠소? 안 그렇소, 련주?”
“나 문주의 생각은 어떠시오?”
종무헌의 말에 대한 대답을 유보한 채 가백현이 나군천의 의견을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군천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가 문주의 생각처럼 두 달 후 있을 회합에서 장우량과 장무진, 장세진을 제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정황상 그들이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으니 그들을 그 자리에서 제압할 수만 있다면 향후 벌어질 싸움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고.”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결정은 련주인 가백현의 몫이었다. 나군천의 의견과 종무헌의 의견을 모두 수렴하고 고민한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두 달 후 뵙겠소.”
결국 가백현은 두 달 후 회합 자리에서 거사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어지간하면 가백현의 의견을 따르는 편인 종무헌은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표정이었다.
“두 달 후 그들의 잔에 미리 산공독을 발라놓을 것이오. 그때 확실히 제압을 합시다.”
“알겠소.”
“그러겠소이다.”
가백현의 말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은남도문에서 있었던 회담은 끝이 났다.
***
지부장들과의 일이 있은 후 초운학은 더욱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부장들을 한자리에 모아 처리하여 합산도문의 세력을 온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거의 끝나감에 따라 이제는 앞을 바라봐야 할 때였다.
바쁘기는 했지만 초운학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힘들어도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면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부르셨습니까?”
장우량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초운학이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제 곧 사도련의 정기 회동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물론입니다.”
장우량의 대답에 초운학이 미소를 거두고 대답했다.
“저들은 합산도문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습니다. 장여진이 있으니 생각보다 훨씬 더 상세하게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분명 이번 회동에서 손을 쓰려 할 겁니다.”
“그래 봤자입니다.”
장우량이 자신감이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을 너무 얕보는 것 같군요.”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초운학의 표정에서도 여유가 한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저들은 죽기 살기로 나올 겁니다.”
“그럼 역으로 그들이 죽을 겁니다.”
장우량의 대답에 초운학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냥 겁만 주도록 하세요. 팔 하나 자르는 것까지는 허용해 드립니다.”
초운학의 말에 장우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안 됩니까?”
“아직은 장난감들이 상하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초운학은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을 장난감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것도 ‘그분’의 명입니까?”
“아닙니다. 제 독단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 모든 의견은 어떻게 하면 그분에게 만족을 드릴 수 있을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초운학의 대답에 장우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못마땅한 것이 사실이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이제 곧 시작입니다. 올 겨울, 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그에 장우량의 두 눈에 살짝 기대감이 비춰졌다.
“그럼 ‘그분’께서도 곧 이곳으로 오시는 겁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사도련이 아니니까요. ‘그분’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는 우리가 사도련을 장악한 후가 될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등장하는 ‘그분’을 장우량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오직 초운학만 본 적이 있을 뿐이다.
간혹 ‘그분’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도 했지만 초운학의 이야기를 들으면 없는 존재도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가실 때 두 사람도 데려가세요.”
이어진 초운학의 말에 장우량이 한 번 더 인상을 찌푸렸다. 장무진은 몰라도 장세진은 더더욱 날뛰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를 통제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야 합니다.”
초운학의 말에 장우량이 그 이유를 듣고 싶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초운학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적어도 쪽수는 맞춰야겠지요?”
***
은남도문에 다녀온 후 장여진은 계속해서 힘이 없어 보였다.
그곳에 가기 전까지 억지로 아픈 기억을 묻어두고 지냈는데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기에 그때의 그 아픔과 충격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여소정이 곁에서 성심성의껏 보살피고 있었다.
함께 은남도문에 다녀온 상천은 그 자리에서 장여진이 얼마나 가슴 아파하고 힘들어했는지를 지켜본 터라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상천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상천은 은남도문에 다녀온 후 더욱 바빠졌다.
사도련의 회합 자리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접 느낀 상천은 당장 문도들의 안위를 생각해야 했다.
두 달 후 또 한 번 있을 사도련의 회동에서 사달이 벌어진다면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큰 전쟁으로 번질 것이 분명했다.
지금 현재 문도들의 수준으로는 그런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문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 때문에 상천은 매일같이 장고를 거듭하고 있었다.
은남도문에서 돌아오고 보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상천이 고민을 거듭하여 내린 결론은 피신이었다.
백룡문 내에 비밀 통로 같은 지하에 숨을 공간이 있다면야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날 밤.
상천은 배동삼과 병목, 그리고 공혜를 잠시 밖으로 불러냈다.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자신들을 불러내자 의아해하며 밖으로 나간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상천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형, 무슨 일 있는 거야? 요 며칠 계속 표정이 어둡던데…….”
병목과 배동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상천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한동안 다른 곳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
“다른 곳에서 지내야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상천의 말에 병목과 배동삼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에 곁에서 잠자코 있던 공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용히 좀 해봐! 오라버니가 알아서 다 설명하겠지. 왜들 그렇게 보채?”
공혜의 핀잔에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큰일이 벌어질 거야.”
“큰일? 싸움?”
그새를 못 참고 묻는 배동삼을 향해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다른 곳에 가서 지내? 싸워야지.”
“그럴 수 없어.”
“왜?”
배동삼의 물음에 상천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싸움이 아니야. 수백, 수천 명이 죽을지도 모를 엄청나게 큰 싸움이야. 전쟁이지.”
상천의 말에 배동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간 자신의 무공 실력이 많이 늘어 자신감도 있었고, 싸움이라고 해서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싸움을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상상이 잘 안 가긴 하지만 그 정도 싸움이면 우리 목숨도 장담할 수가 없긴 하겠지.”
병목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피해야 돼. 죽으면 안 되잖아.”
“오라버니는?”
상천의 입에서 죽음이라는 말이 나오자 공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아무래도 난 싸워야겠지?”
죽을지도 모르는 싸움을 하겠다는 상천의 말에 공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해야 돼.”
“왜? 왜 그래야 하는데?”
공혜의 물음에 상천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난 문주니까.”
상천의 말에 공혜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문주 하지 마. 다른 사람보고 하라고 해. 그리고 오라버니는 싸우지 마.”
공혜의 말에 상천은 미소만 지을 뿐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이어갔다.
“당장 오늘내일 중으로 피하라는 건 아니야. 정확히 언제 싸움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상천의 말에 세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시작되어도 백룡문에 큰 피해가 없을 것 같으면 이곳에 있어도 상관은 없어. 하지만 혹시나 이곳까지 위험해질 것 같으면 피하라는 거야. 알겠지? 형, 부탁해.”
“그래, 알았어.”
병목이 대답했다.
분위기가 상당히 무거워졌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백룡문에도 피해가 갈지 모르며 상천은 죽을지도 모를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가슴속에 묵직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었다.
“후……. 내가 말을 잘못했네. 지금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피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까 알고 있으라고 미리 말한 것뿐인데.”
상천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세 사람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라버니가 싸우러 가야 되잖아.”
“싸운다고 해서 다 죽는 건 아니야. 알잖아? 나 강한 거.”
상천이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혜는 여전히 울상이었다.
“으이그, 이 녀석아. 그렇게 눈물이 많아서 시집은 어떻게 갈래? 데려갈 사람이나 있으려나?”
“시집 안 가!”
상천의 말에 빽 소리를 지른 공혜가 몸을 홱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상천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