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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검제-87화 (87/141)

#087화.

그전까지 장여진이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종무헌은 자리에 앉고 나서야 그녀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분은……?”

가백현과 똑같은 반응에 장여진은 웃음이 났지만, 꾹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여진이라고 합니다.”

“장여진이라 하면… 그 합산도문의…….”

“네, 그렇습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장여진이 합산도문의 장여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종무헌은 깜짝 놀랐다.

이번 회합은 합산도문을 제외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떡하니 합산도문 사람이 이 자리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당황해하는 종무헌에게 나군천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장 소저는 내가 모셔왔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이 자리에 합산도문의 사람을 데려오다니. 그래 놓고 걱정하지 말라?”

종무헌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장 소저는 합산도문에서 벌어진 일과 관련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한 증언을 해주기 위해 오신 것이오. 우리도 저쪽의 상황을 좀 더 명확하게 알아야 제대로 된 대비책을 세울 수 있을 것 아니겠소?”

나군천의 말에 종무헌은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자, 자! 다들 그만하십시오. 시작부터 살벌하게 왜들 그러시오?”

가백현의 말에 종무헌과 나군천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지들 마시고 좋은 경치 구경하면서 간단히 식사나 먼저 하십시다.”

가백현의 말이 끝나자 정자 위의 탁자에 음식들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쉽게 보기 어려운 음식들로 식탁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호위무사들에게도 좋은 음식들이 전해졌고, 잠시 떨떠름하던 분위기는 금방 사라졌다.

식사 분위기는 조용했다.

가백현의 주도하에 문주들끼리 담소를 나누기도 했지만 중요한 일 때문에 만났기 때문인지 식사를 하면서도 표정들이 썩 밝지는 않았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분위기의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차를 한 잔씩 마시는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 문주님들을 모신 이유는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되오.”

가백현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에 장여진은 잠시 가벼워졌던 마음이 다시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정자 위에는 세 명의 문주와 장여진, 그리고 각 문파의 군사들만 자리하고 있었고 호위들은 전부 정자 아래에서 그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지다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상천이나 여소정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닌 혼자 있는 것이 너무나 힘들기도 하고 외로운 장여진이었다.

“장 소저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례일 수도 있겠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합산도문에 사달이 벌어졌소. 그것이 자칫 사도련 전체에 피를 부를 수도 있고, 그것을 넘어 무림 전체에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대책을 마련하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하였소.”

가백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에서 파악하고 있는 내용만 가지고는 불확실한 부분이 많소. 그래서 내가 장 소저를 모셔온 것이오. 이렇게 된 거 우리끼리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장 소저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것이 좋지 않겠소?”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과 종무헌도 고개를 끄덕였다.

“장 소저,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게 하여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합산도문에서 있었던 일을 최대한 자세히 말씀해 주시길 바라오.”

나군천의 말에 장여진이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정확한 정황을 알지 못합니다. 사달이 벌어졌던 날 밤, 저는 수석장로이셨던 신건 할아버지의 거처에 가 있었지요.”

“신건 수석장로라면… 천하일도라 불리던?”

종무헌의 물음에 장여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께서 부르신다는 소식에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장여진이 다시 눈을 감으며 그날 밤 있었던 일을 더듬었다.

닫힌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모습에 목적을 떠나 가백현과 나군천, 종무헌 모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십 대의 꽃다운 나이에 큰일을 겪었으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죄송합니다만,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힘들어하는 장여진을 보다 못한 여소정이 나섰다.

“그대는 장 소저의 호위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합산도문에 있을 때부터 아가씨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습니다. 그날의 일에 대해서는 아가씨보다 제가 더 많이 알고 있을 겁니다.”

“좋네, 말해보게.”

가백현의 말에 고개를 숙인 여소정이 그날 밤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신건 장로님께서 제게 아가씨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그전에 있었던 일부터 말씀드리면, 아가씨의 둘째 오라버니인 장세진 뇌격대주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상한 느낌?”

“예. 신건 어르신께 가기 전, 아가씨와 뇌격대주가 잠시 만났습니다. 대화는 여느 남매의 대화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만 그의 눈빛은 달랐습니다. 음탕한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음탕한 기운? 오라비인 장세진이 장 소저에게 음심이라도 품었다는 뜻인가?”

여소정의 말에 종무헌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여소정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신건 어르신께서 아가씨를 데려오라 하신 것도 합산도문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어느 정도 느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장무진과 장세진은 장로들을 죽였고, 그 명령은 장우량에게서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 어떻게 이런 일이!”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백현은 물론이고 나군천과 종무헌 모두 정체를 알 수 없는 흉수들의 손에 장로들은 물론이고 장우량과 장무진, 장세진도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소정의 말은 그들의 판단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 소저는 신건 장로의 거처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만약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아가씨도 이 자리에 계시지 못했을 겁니다.”

여소정의 말에 세 명의 문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합산도문에 큰일이 벌어진 것도 그렇지만 그 흉수가 문주인 장우량과 두 아들이라는 것이 더 큰 충격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장여진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게 하신 말씀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오?”

가백현의 물음에 장여진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본산에 있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제가 알고 있는 그들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녀의 말에 세 문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해 버렸으니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문주와 달리 하신의 표정만은 조금 달랐다.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럼 신건 장로도… 목숨을 잃으셨나?”

“저희가 비밀 통로로 몸을 피한 후에 장로님의 거처로 그들이 들이닥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비밀 통로로 빠져나간 후에 그들이 들이닥쳤다면 장여진 일행은 신건의 생사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정황상 신건 역시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신건이 살아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몸을 빼내 장여진을 찾아왔을 것이다.

지금까지 장여진과 여소정에게 들은 이야기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먼저 칩시다, 합산도문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종무헌이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에 가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되오? 장 소저와 저 호위의 증언이 있었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명분이 서는 일 아니오?”

“안 된다는 게 아니오. 장우량과 장무진, 장세진이 살아 있다면 차라리 원래대로 두 달 후에 벌어질 회합 자리에 그들을 불러 제압을 하는 편이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오. 괜히 애꿎은 목숨만 잃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니.”

“아…….”

가백현의 말에 종무헌이 그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한참 동안 무언가를 떠올리던 하신이 나군천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하신의 말을 들은 나군천의 표정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과 종무헌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필요 이상으로 신중해 보이는 표정을 보며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아무래도 내가 말하는 것보다는 우리 군사가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소. 하신.”

“예. 아까 장 소저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무언가 뇌리에 스친 것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아 이제껏 생각을 하다가 겨우 떠올렸습니다.”

“무엇이오?”

가백현의 물음에 하신이 침을 한 번 삼키며 물었다.

“다들 유마환용술(幽魔換容術)이라는 것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유마환용술? 그건 백여 년 전에 사라진 유마궁(幽魔宮)의 무공이 아니오?”

하신의 말에 종무헌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유마궁의 무공이지요.”

“설마 장우량과 장무진, 장세진이 본래 다른 사람인데 그 무공을 이용해 지금껏 그들 행세를 해왔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신의 대답에 종무헌은 고개를 저었다.

백여 년 전에 사라진 문파의 무공이 지금까지 전해져 왔을 리 없다는 뜻이다.

“설령 맞다 칩시다. 백여 년 전에도 유마궁은 그리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소. 하물며 지금이라고 다르겠소?”

“유마궁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전 유마궁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신의 말에 종무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껏 유마환용술과 유마궁을 언급해 놓고는 무슨 딴소리란 말인가?

하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여 유마궁 혼자 벌인 일이라 해도 합산도문을 쥐도 새도 모르게 집어삼킬 정도면 충분히 경계를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유마궁 홀로 벌인 일이 아닙니다. 아니, 유마궁은 아예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신이 거기까지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가백현이 입을 열었다.

“혹시 군마성(群魔城)을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아까 장 소저께서 신건 장로가 ‘네가 아는 아버지와 오라비들이 맞는지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걸 듣고 떠올린 것입니다. 물론, 과한 우려 때문에 앞서 나간 것일 수도 있으나,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백현의 말에 하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군마성의 이름이 가백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순간 종무헌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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