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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검제-86화 (86/141)

#086화.

며칠 뒤.

반월도문 옹안지부장이 한 장의 서찰을 들고 백룡문을 찾아왔다.

하신의 서찰이었는데, 상천이 이번 회합에 동행해도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때부터 상천은 은남도문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채비라고 할 것은 없었지만 자리가 자리인만큼 겉치장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일단은 장포를 급히 새로 맞춰야 했다.

지난번 반월도문에 입고 갔던 장포는 백룡이 수놓아져 있는 등 너무 화려해서 호위무사 수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수수한 장포로 새로 맞추었다.

또한 검 역시 바꾸었다.

상천이 가지고 있는 검은 누구나 흔히 들고 다닐 수 있는 평범한 청강검이었다.

그것을 대신해서 이번 회합에는 비호가 들고 다니는 좀 더 고급스러운 검을 들고 가기로 했다.

반월도문에서 은남도문까지 가는 길목에 백룡문이 있기 때문에 나군천을 비롯한 반월도문의 사람들과 중간에 합류하기로 해놓은 상태였다.

시간이 흐르고 날짜가 가까워 오자 장여진과 상천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장여진 입장에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자리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긴장의 정도는 상천과 거의 비슷했다.

그리고 드디어 당일이 되었다.

장여진과 상천, 여소정은 아침 일찍부터 백룡문을 떠날 채비를 했다.

과거 반월도문의 연회에 초대되어 갈 때보다 훨씬 더 긴장하는 듯했다.

그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초대되어 가는 것이기에 들뜬 마음이 앞섰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참석하는 자리의 무게감부터가 달랐다.

상천이야 별말 없이 호위하듯 서 있기만 하면 된다지만 그 자리에서 직접, 그것도 아픈 기억을 꺼내야 하는 장여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고 있네.”

미리 정문 밖에 나가서 반월도문의 행렬을 기다리고 있던 서기종이 달려들어 오면서 말했다.

그 한마디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세 사람에게 짐을 들어 챙겨주었다.

짐을 받아 든 세 사람은 서둘러 정문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가장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는 나군천과 그 옆에 하신, 그리고 그 뒤로 다섯 명 정도의 호위무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백룡문 앞에 도착하자 상천이 포권과 함께 살짝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이오, 백룡문주. 그간 잘 지내셨소?”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상천의 인사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나군천이 백룡문을 한 번 쓱 훑어보았다.

말로만 들었지 백룡문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인 나군천은 정문과 담벼락을 보며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때에는 잘 몰랐는데, 생각보다 그럴싸한 것 같소이다, 백룡문주. 하하하!”

“도움을 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천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나군천이 상천의 옆에 서 있는 장여진을 바라보았다.

“장 소저이시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장여진입니다.”

장여진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에 나군천이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힘든 일을 겪었을 텐데… 같은 사도련의 일익으로서 도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오.”

“괜찮습니다. 백룡문주님 덕분에 충격을 많이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차분한 장여진의 대답에 나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발걸음을 하게 하여 미안한 마음이오. 하지만 무림의 평화를 위해, 최소한의 피해를 위해 조금만 수고해 주시오.”

“물론입니다.”

나군천의 말에 장여진이 다시 한 번 살짝 허리를 굽혔다.

“자, 이제 출발하시지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신이 나군천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나군천이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말을 내드려라!”

“예!”

뒤쪽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호위무사 세 명이 말 세 필을 상천과 장여진, 여소정 쪽으로 몰고 왔다.

과연 반월도문에서 준비한 말이라 그런지 상당히 좋아 보였다.

“특별히 좋은 놈으로 골라왔소. 타는 데 불편함은 없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상천이 말에 오르며 다시 한 번 나군천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출발한다!”

세 사람이 모두 말에 오르자 나군천이 크게 외치고는 선두에 서서 말을 몰았다.

회합 날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반월도문 일행은 물론이고 천중도문 일행도 속속 호남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귀주성에서 호남성으로 넘어오는 기간 동안 상천과 장여진, 여소정은 반월도문의 무사들과 거의 접촉을 하지 않았다.

낯설음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더 큰 이유는 위화감에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작아지는 세 사람이었다.

이동하다가 휴식을 취할 때에도 세 사람만 따로 뭉쳐 휴식을 취했다.

그런 그들에게 반월도문의 무인들도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나군천과 하신은 틈만 나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호위무사들도 자신들끼리 모여 휴식을 취할 뿐이었다.

가장 곤욕스러웠던 때는 객잔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그때는 식탁을 따로 잡아 식사를 할 수가 없었기에 함께 식사를 해야 했다.

나군천과 하신이 나름 분위기를 가볍게 가져가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것이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호남성에 입성하자 상천 일행은 어서 은남도문에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세 사람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질 테니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호남성에 도착했다고 해서 은남도문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은남도문이 있는 형산까지 남은 기간은 닷새.

한숨 쉬며 가야 할 날이 아직도 닷새나 남아 있었다.

은남도문은 반월도문만큼 웅장한 맛은 없었다.

실제로 크기 자체는 반월도문이 은남도문보다 더 컸다.

그 때문인지 은남도문에 들어서면서도 상천은 큰 감흥을 받지 않았다. 안에 들어서서 보인 건물들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은남도문에 도착한 반월도문 일행은 일단 접객실로 안내되었다. 다행히도 반월도문 일행과 상천 일행은 각기 다른 방을 쓸 수 있었다.

일행 중 유일한 남자인 상천에게 다른 방을 주겠다는 것을 장여진이 괜찮다며 상천까지 한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아…….”

방에 들어오자마자 장여진이 한숨과 함께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소?”

상천이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그에 장여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보다 심력 소모가 크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오겠다고 할 걸 그랬어요.”

장여진의 말에 곁에 앉은 여소정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왜? 너는 편하게 온 모양이지?”

“아닙니다.”

장여진의 물음에 여소정이 미소를 지우며 대답했다.

“그래, 너도 힘들었겠지. 좀 쉬자, 쉬어.”

“네.”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나가던 세 사람은 밖에서 들려온 시녀의 목소리에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모시라는 명입니다.”

“벌써?”

앉아서 쉰 지 일각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장여진의 표정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자신들은 좀 더 쉬겠다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을.

장여진이 작은 한숨과 함께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천과 여소정 역시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가자 곱상한 시녀 한 명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시녀가 천천히 앞서 걸었다. 접객실 밖에는 나군천과 하신, 그리고 그들의 호위무사들이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하실 텐데 쉴 시간이 없으셨겠습니다.”

다가오는 장여진을 보며 하신이 살갑게 말을 건넸다. 장여진은 마음 같아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저희가 조금 늦게 도착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었으니…….”

“그렇군요.”

하신의 말에 장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지요. 문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녀의 말에 반월도문 일행과 상천 일행은 입술을 굳게 닫고 그 뒤를 따랐다.

은남도문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가백현의 거처에서도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정자.

가백현이 휴식을 취할 때면 항상 찾는 그곳에 반월도문의 나군천이 먼저 도착했다.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보이자 정자 앞에서 뒷짐을 진 채 서성이던 가백현이 웃는 낯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오, 나 문주.”

“오랜만이오.”

반가워하는 가백현과 달리 나군천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가백현은 전혀 기분 나빠하거나 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나군천을 뒤로하고 하신과 짧게 인사를 나눈 가백현의 시선이 장여진에게 닿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장여진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느낌을 받았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정도로 눈빛은 강렬했다.

“그런데 이분은…….”

“아, 합산도문의 장여진 소저입니다.”

가백현의 말에 하신이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가백현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포권을 했다.

“장 소저이시구려. 은남도문의 가백현이라 하오. 처음 뵙는 자리가 이런 자리라 유감이오.”

가백현의 인사에 장여진도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장여진입니다.”

“오실 줄 알았으면 그에 맞춰 미리 준비라도 해두는 것인데 미흡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백현의 말은 거짓이었다.

장여진이 나군천과 함께 호남성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그였다.

나군천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가백현이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하지만 살짝 인상만 찌푸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불편한 것은 없었습니다.”

접객실에 들어가 편히 앉아 쉬려던 찰나에 불려 나왔기에 불편한 것을 느낄 틈이 없었던 장여진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백현은 미소를 지었다.

“자, 정자에 오르시오.”

“알겠습니다.”

장여진이 가백현의 안내를 받아 정자에 오르자 여소정과 상천은 그녀가 앉는 곳과 가장 가까운 정자 바깥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잠시 후,

천중도문의 문주인 종무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뚱뚱해 보이는 몸매였지만 키가 크고 단단한 근육이 박혀 있다.

얼굴은 작았지만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 때문에 날카로워 보이기도 하고 강해 보이기도 하는 인상이다.

종무헌이 군사로 보이는 사람 한 명과 호위 두 명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시오, 종 문주.”

“오랜만이외다, 련주.”

그제야 종무헌이 환하게 웃으며 가백현과 인사를 나누었다. 무표정일 때에는 차갑고 화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웃으니 굉장히 인상이 좋아 보였다.

“나 문주도 오랜만이오. 잘 지내셨소?”

“뭐, 그럭저럭.”

나군천이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과 말투로 종무헌의 인사를 받았다.

매번 회합을 할 때마다 나군천은 심기가 불편했다.

특히나 종무헌이 자신보다 늦게 도착할 때면 더욱 그랬다. 가백현에게는 꼬박꼬박 련주라는 호칭을 붙이고 자신에게는 문주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 자체가 그의 속을 긁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군천의 반응을 종무헌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무헌이 정자로 올라가 비어 있는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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