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85화 (85/141)

#085화.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여소정의 말대로 상천은 당분간 규화공을 보완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현기심법을 익히겠다는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어린 만큼 지금은 좀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무학을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장여진에게 받은 열양신단을 당장 복용하지는 않았다.

지금 복용을 해서 열양신단의 기운을 녹여내는 데 시간을 보내기에는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지금 규화공 수준으로 열양신단의 기운을 제대로 녹여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일상에 집중하고 있을 때, 반월도문의 하신이 다시 백룡문을 찾았다.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문이었기에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하신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상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방문이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좀 더 여유로운 말투로 인사를 받았다.

“예. 별일 없이 잘 지냈습니다.”

“일전에 왔을 때보다는 많이 바뀌었군요.”

하신이 그럴싸하게 변해가는 건물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원을 해주는 입장에서 그 성과가 눈에 보일 때만큼 기분 좋은 때는 없는 법이었다.

상천과 인사를 나누던 하신은 장여진과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장여진도 어색한 표정으로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드릴 말씀도 있고, 허락을 구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허락을 구할 일이요?”

“네, 그렇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자세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여기 서서 할 얘기는 아닌 듯합니다.”

“아, 네. 물론입니다.”

하신의 말에 상천이 그와 함께 안으로 향했다.

“아, 그리고 장 소저도 함께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합니다.”

하신의 말에 상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장여진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하신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 들어가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결국 상천과 장여진, 그리고 하신이 안으로 들어갔고, 여소정과 비호, 화룡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세 사람이 들어간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사람이 방으로 들어오고 공혜가 서둘러 차를 준비해 왔다.

세 사람의 잔에 차를 따라준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하신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장 소저에게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상천이 아닌 자신이 먼저 지목을 당하자 장여진은 조금 놀랐다.

아무래도 하신이 반월도문의 사람이고 자신의 처지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금 주눅이 드는 것도 같았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저희 반월도문을 비롯한 은남도문과 천중도문 사이에서 합산도문의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습니다.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사도련 전체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신의 말에 장여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부터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있는 상태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사도련을 유지하는 네 문파의 문주들은 이 년에 한 번씩 회합을 갖습니다. 항상 비슷한 시기에 해왔고 이번에도 그럴 예정이었으나 은남도문의 문주이자 사도련주인 가 문주님께서 두 달 정도 그 시기를 앞당겼습니다.”

하신의 말에 장여진은 도대체 그것과 자신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앞당겨진 회합에 합산도문은 제외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하신의 말에 장여진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회합의 주된 내용은 합산도문에서 벌어진 일을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과 사후 대책이 될 겁니다. 자신들의 문파와 세력을 위해서도, 그리고 사도련을 위해서도 이번 회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대비책을 확실히 세워놓아야 큰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인가요?”

하신의 말에 장여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하신의 입으로 확실한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인 목적으로 장 소저를 이용하거나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해놓고서는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굉장히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장 소저께서 알고 계신 것이 훨씬 더 정확하기에 이번 회합에 장 소저를 모시고 갔으면 합니다. 저희가 아는 것이 많아야 좀 더 확실한 대비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신의 말에 장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상 장여진이 가서 할 수 있는 증언은 많지 않았다.

하신이 그녀를 대동하려는 것은 이번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사도련 내에서 가백현이 문주로 있는 은남도문과 비등한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함이었다.

장여진이 우리에게 있다.

합산도문에 일이 터진 이상, 합산도문의 대표 자격은 그녀에게 있고 그녀가 반월도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장여진이나 상천이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장 소저의 의사를 묻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백룡문주께서 보호자의 역할을 하고 계시기에 문주님의 허락도 받아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하신의 말이 끝나고 상천과 장여진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상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장 소저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장여진이 고개를 저으며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 이제 백룡문 사람이니 문주님의 명에 따르는 게 맞겠지요.”

장여진의 말에 하신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렇게 되었군요. 그럼 문주님께 허락을 구하겠습니다. 이번 회담에 장 소저와 함께 가도 괜찮겠습니까? 장담컨대 무례하게 장 소저를 대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신의 물음에 상천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안의 중차대함을 따지자면 무조건 그녀가 함께 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왠지 그녀를 그 자리에 보내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상대는 한 문파의 수장들이다.

그들 앞에서 장여진이 과연 담대하게 행동하고 말할 수 있을까?

고압적인 태도는 없을 거라지만, 과연 그게 제대로 지켜질까?

이런 걱정들이 줄을 이었다.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장 소저 혼자 가야 합니까?”

“반월도문의 이름을 걸고 장 소저에게 어떤 해도 가지 않도록 보호할 것입니다만… 혹여 문주님께서 그래도 불안하시다면 호위를 붙이셔도 됩니다.”

하신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장여진을 슬쩍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와 여 소저가 함께 가지요.”

“문주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이 직접 가겠다는 말에 놀란 쪽은 하신이었다.

백룡문을 찾을 때 상천이 그녀에게 호위를 붙일 것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를 보호해 이곳까지 함께 온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까지는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처럼 상천이 직접 나서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음…….”

호위가 붙는 것과 문주인 상천이 가는 것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사도련의 문주들이 회합을 갖는 자리.

장여진은 합산도문에서의 일에 대한 증언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함께 가는 것이기도 했지만 합산도문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상천이 함께 가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말 그대로 사도련의 정상들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그 격이라는 것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백룡문과 상천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격의 차이는 분명 존재했고, 그에 따라 함께할 수 있는 자리와 함께할 수 없는 자리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상천의 제안을 예상하지 못했던 하신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지금까지 네 분의 문주님을 제외한 다른 문파의 문주가 참석한 적이 없는지라…….”

하신의 대답에 상천이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

“그곳에 가게 된다면 저는 백룡문주가 아닌, 철저히 장 소저의 호위로 갈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천의 말에 하신의 주름이 깊어진 듯 보였다.

“백룡문에 오면서 문주님께서 장 소저에게 호위를 붙일 것이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여 소저가 호위로 붙을 것도 예상했지요. 그런데 문주님까지 호위로 가시겠다고 하실 줄을 몰랐습니다. 여 소저 외에 한 명이 더 붙는다면 합산도문에서부터 함께 온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신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상천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들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저보다 무공도 뛰어나고 아는 것도 더 많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고 생각보다 전 한가합니다.”

그렇게 말한 상천이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경험을 해봐야 합니다. 문주라고는 하지만 문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부족한 것이 많다는 것을 최근 들어 여실히 깨닫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련의 세 문주님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공부가 될 것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상천에게 이번 회합은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거대한 문파를 이끄는 수장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느끼는 것이 많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값진 경험은 앞으로 백룡문을 이끌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문주님과 상의해서 기별을 넣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지 못해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미안해하는 하신을 보며 상천이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십시오.”

상천과 장여진은 떠나는 하신을 정문까지 배웅했다.

그가 떠나고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그런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느라 상천은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장여진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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