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83화 (83/141)

#083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에 상천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떴다.

한참을 감고 있다가 떴기 때문에 초점이 잘 맞지 않아 눈앞이 흐릿하게 보였다.

몇 번을 감았다 떴다 하여 초점을 맞춘 상천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녹엽과 공혜, 배동삼 등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좋은 아침이지?”

상천이 어색하게 웃으며 잠긴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세 사람은 상천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자신들끼리 중얼거렸다.

“몽유병이라도 있는 거 아냐?”

녹엽의 말을,

“그런 걸까요?”

배동삼이 냉큼 받았다. 그러자 공혜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오라버니 불쌍해서 어떡해.”

세 사람은 상천을 완전히 환자 취급하고 있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선 상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 환자 아니거든!”

“그런데 왜 이런 데서 자고 있어?”

“수련하다가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잠든 거야.”

공혜의 물음에 상천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어제 자다 깨서 뒷간 가려고 잠깐 밖에 나왔는데 형이 연무장에 주저앉아서 뭔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더라고.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련하는 건 아닌 것 같았는데…….”

배동삼이 쐐기를 박았다.

그러자 상천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자신이 연무장에 앉아 했던 것을 상세하게 설명을 한다 해도 세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환자처럼 취급할 것 같았다.

눈앞에 환영을 불러내 이것저것을 해본다고 하면 그것을 누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주겠는가?

“하……. 아무튼 나 어젯밤에 수련한 거 맞고, 몽유병도 없어. 알았지? 그러니까 정신병자 취급은 그만〜!”

그렇게 말한 상천이 연무장에서 자느라 옷에 덕지덕지 붙은 먼지를 털어냈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됐어?”

상천의 물음에 배동삼이 대답 대신 연무장 바닥을 가리켰다. 그림자가 가장 짧은 시간.

“벌써 정오야?”

“응. 점심 먹을 시간.”

공혜의 말에 상천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배가 더 고픈 것 같았다.

“얼른 들어와서 밥 먹어!”

녹엽이 먼저 연무장을 내려가며 말했다. 그리고 그 뒤를 배동삼이 따르며 말했다.

“형 때문에 오전에 수련 하나도 못했으니까 이따가 나 좀 도와줘! 알았지?”

배동삼의 말에 상천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문주 체면이 말이 아니네. 하하!”

그 말에 공혜가 그를 흘겨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그걸 아는 사람이 이런 데서 자고 있어? 남들 보기 창피해. 얼른 씻고 들어와서 밥 먹어.”

그렇게 말한 공혜가 종종걸음으로 연무장을 내려갔다.

잠시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던 상천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연무장을 내려갔다.

***

은남도문의 가백현은 명실상부한 사도련의 일인자다.

가공할 무위와 인품, 무엇 하나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냉철한 판단력 역시 그 어느 문파의 군사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

물론 은남도문에도 군사라는 직위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은남도문 내에서 하는 일은 문주인 가백현의 명을 받아 실무를 보거나 총괄하는 자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백현이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거나 결정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군사의 의견을 듣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가백현의 판단대로 흘러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은남도문 내에 있는 자그마한 개울가에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곳은 문주인 가백현의 거처와 가까운 곳에 있었고, 주로 가백현이 여흥을 즐기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 가백현은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정자에 앉아 있었다.

대문파인 은남도문의 문주이자 사도련의 련주라면 고상하게 앉아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게 마련이겠지만 예상과 달리 가백현은 정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맨발을 개울에 담그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런 가백현의 뒤쪽으로 은남도문의 군사인 풍신현(馮宸玄)이 다가왔다.

풍신현은 이제 갓 마흔 줄에 들어선 사람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학식이 뛰어났다. 물론 다른 문파의 군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는 했지만 가백현의 존재는 풍신현의 그러한 부족함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학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대신 풍신현은 다른 문파의 군사들과 다른 것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절정의 무위였다.

은남도문의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과거 가백현의 부친인 가운성(可雲成)의 최대 경쟁자였던 권절(拳絶) 맹우림(孟祐琳)의 제자로 천강분형권(天|分形拳)이라는 고절한 무공을 지닌 고수였다.

그 때문에 풍신현은 은남도문의 군사 직 외에도 맹주인 가백현을 호위하는 비밀호위대 대주 직도 겸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은남도문 내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비밀호위대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 대주가 풍신현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은남도문의 군사로 오게 된 후로 풍신현이 단 한 번도 자신이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네도 좀 앉지. 물이 시원한데.”

“아닙니다.”

가백현의 말에 풍신현이 정중히 사양했다.

“가끔은 이렇게 여유를 즐겨도 좋을 텐데, 자네는 항상 보면 너무 경직되어 있어.”

가백현의 말에 풍신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닌 듯합니다.”

“알지, 잘 알지. 그래도 지금 당장 큰일이 터진 건 아니지 않은가?”

가백현의 말에 풍신현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어색하게 변했다.

합산도문에 벌어진 일을 모르지 않을 터.

사도련의 일익 중 한 곳에 사달이 벌어졌는데 당장 큰일이 터진 것이 아니라는 가백현의 말은 엄청난 자신감의 발로이거나 오만함의 극치이거나 둘 중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제 곧 문주들끼리의 회합이 있지?”

“네. 넉 달 후입니다.”

“넉 달 후라……. 너무 쌀쌀하지 않겠나?”

가백현의 물음에 풍신현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 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문주들의 회합은 언제나 그 시기에 했기 때문이다.

“두어 달 정도 앞당겨 보게. 겨울이 오기 전에 하자고. 셋이서 얘기 좀 해야겠어.”

넷이 아니라 셋이란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풍신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기별을 넣겠습니다.”

“기왕이면 이리로 오라고 하는 게 좋겠어. 여기 경치도 좋은데. 아, 나 문주가 싫어하려나? 쨌든 그건 군사가 잘 구슬려 보고.”

“예, 알겠습니다.”

풍신현의 대답에 가백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발을 개울물에 담근 채로 정자에 벌러덩 누웠다.

“낮잠 한숨 잘 터이니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해주게나.”

“예.”

그렇게 대답한 풍신현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정자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가백현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썅!”

나군천은 자신에게 전달된 서찰을 읽은 후 분통을 터뜨리며 서찰을 구겨 버렸다.

“지가 뭔데 오라 가라야!”

예상대로 은남도문에 모여 합산도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는 가백현의 서찰에 나군천은 평소보다 더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곁에 있던 하신은 그런 분통을 터뜨리는 나군천을 보면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가긴 가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더 화가 나지!”

안 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가백현이 합산도문의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안이 중차대한 만큼 오라는 가백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실 때 장여진을 대동하십시오.”

“장여진을?”

“예. 은남도문 쪽에서 장여진이 백룡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녀를 대동하고 회담에 나섬으로 인해서 주도권을 쥘 수 있습니다.”

“음…….”

그럴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따라나서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면서.”

나군천의 목소리는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제가 가서 상황 설명을 하겠습니다. 거짓을 살짝 보태면 분명 따라나설 겁니다.”

“좋아, 군사가 직접 다녀오도록.”

“알겠습니다.”

하신이 고개를 숙였다.

***

비호와 화룡은 틈틈이 배동삼, 병목과 함께 문도들의 수련을 돕고 있었다.

백룡문의 무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검법과 권법의 기초에 대한 부분을 바탕으로 잘못된 부분을 콕콕 짚어주었다.

장여진과 여소정은 상대적으로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는 그녀들이 나설 만한 일이 없었다.

공혜와 함께 요리 등 이것저것을 도우려 해봤지만 살면서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나마 여소정은 합산도문에 입문하기 전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해본 경험이 적게나마 있어 간혹 일을 돕기는 했지만 장여진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쨌든 장여진 일행이 백룡문에 정착을 한 이후 분위기 면에서나 실질적인 부분에서나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주라면 당연히 기뻐해야 하지만 상천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방법을 찾았지만 시작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단전을 사용하는 방법을 찾았지만 정작 현기심법을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시도라도 해봤으면 모르는데 상천은 아예 현기심법을 익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환영을 통해 현기심법을 중단전에 자리 잡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하단전에 규화공과 현기심법이 함께 자리 잡고 있을 때를 가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하단전에 규화공이 똬리를 틀고 있는 상황에서 현기심법을 익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상천 자신이 백룡문의 문주가 아니고 자신을 따르는 문도들이 없다면야 아무런 고민 없이 일단 하고 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딸린 식구가 있기 때문에 자칫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을 감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해? 말아? 미쳐 버리겠네.’

답답했다.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인 줄 처음 알게 된 상천이다.

답답한 마음에 멍하니 앉아 한숨을 쉬고 있는데 비호가 다가왔다.

지금까지 문도들의 수련을 돕던 비호가 이마에 살짝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물었다.

“안 풀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상천은 작게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혹시 지난번에 물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렇소.”

상천은 짧게 대답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고민을 비호가 해결해 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무인이 두 개의 심법을 익히려 들겠는가?

“중단전 사용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것과 관련된 문제이긴 하지만 그 건은 차후의 문제요.”

상천의 대답에 비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비호 역시 상천이 두 개의 심법을 익히려 한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 하단전을 둘로 나눌 수 있소?”

상천의 질문에 비호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단전을 둘로 나눈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그 물음에 상천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말을 할까 말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곤란하시다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심법을 더 익히려 하오.”

“……!”

상천의 대답에 비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한 일입니다. 자칫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고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소.”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발전하기 위함이오.”

상천의 대답에 비호는 말문이 막혔다. 발전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단 말인가? 그것도 일문의 문주라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 비호는 지금까지 봐오면서 내린 상천에 대한 판단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백룡문의 무공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소. 난 그것을 깨고 싶을 뿐이오.”

“불가능합니다.”

비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상천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불가능해도 해야만 하오.”

“문주님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해야만 하오.”

상천의 말에 비호는 입을 닫았다. 안 된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소정과 장여진, 화룡 등이 하나둘씩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하단전을 둘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해요.”

여소정이 말했다. 그러자 상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두 개의 심법을 익히는 것은 가능해요.”

그녀의 말에 화룡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도 비호는 놀란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