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그나저나 동삼이 저 녀석도 실력이 많이 늘었단 말이야?”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녹엽이 중얼거렸다. 그 옆에 있는 낭호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엽의 말처럼 배동삼은 선전을 하고 있었다.
물론 비호가 짧게 끝내지 않기 위해 많이 봐주고는 있었지만 예전에 비해 실력이 많이 늘어 있었다.
간혹 비호도 감탄을 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배동삼이었다.
하지만 끝내 실력 차이는 어쩌지 못했다.
결국 비호의 목검이 배동삼의 목 언저리에 닿았고, 배동삼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한 채 들고 있던 목검을 늘어뜨렸다.
“졌습니다.”
“수고했네. 실력 대단한데?”
비호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배동삼의 얼굴에는 패배에 의한 좌절감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배동삼을 더욱 좌절감에 빠뜨린 것은 비호의 호흡이었다.
격하게 움직였음에도 호흡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편안한 상태였다. 반면 자신은 어깨로 숨을 쉴 정도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똑같이 내력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차이는 단순한 체력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효율적인 움직임을 가져갔느냐 하는 것에서 오는 차이였다.
이번 대련을 통해 그것을 여실히 깨달은 배동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비호와의 대련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다만 실전이나 비무가 아닌 대련이었지만 패배로 인해 지금 배동삼이 느끼고 있는 좌절감이나 허탈을 얼마나 빨리 떨쳐 내는지가 관건이었다.
비호가 목검을 내리자 배동삼이 허탈한 표정으로 연무장을 내려갔다.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연무장 위에 홀로 남아 있는 비호의 시선이 상천에게로 옮겨갔다.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조금 아쉬운데……. 어떻습니까? 문주님과 겨룰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점입가경.
비호와 오랜 시간 함께해 온 화룡도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여진 일행이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던 낭호가 차가운 표정으로 나섰다.
“일문의 문주에게 함부로 도전할 수는 없는 법이지.”
낭호가 자신의 연검을 들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상천이 말리려는데 서기종이 막았다.
“일단 지켜보지, 저자가 왜 저러는지.”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차가운 표정으로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연무장 위로 올라간 낭호가 살벌한 눈빛으로 비호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보인 비호의 행동은 비단 상천뿐만 아니라 낭호까지도 화가 나게 만들었다.
“진검으로 하지.”
낭호가 먼저 비호에게 진검 승부를 제안했다. 그러자 비호가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왜, 겁나나?”
“재밌군.”
낭호의 도발에 비호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어디 그런 도발을 할 정도의 실력이 되는지 보겠소.”
그 말에 낭호는 말없이 연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비호는 검집에서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둘 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들고 있는 상태.
그 상태로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맞부딪쳐 불똥이 튀었다.
쩌저저정!
순식간에 두 사람이 중간에서 충돌했다.
강하게 앞으로 휘두른 비호의 검을 낭호의 연검이 몇 차례 강하게 때렸다.
강검과 연검의 충돌이었지만 낭호의 연검에 비호의 검이 허공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비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조금 전 배동삼과의 대련은 말 그대로 대련이었기에 이런 짜릿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봐주기까지 했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낭호는 달랐다.
사전에 낭호가 낭인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도발을 해왔을 때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충돌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낭호의 실력이 자신에게 못 미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낭호와의 대결은 만족감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어찌 보면 기분 나쁠 수 있는 도발을 하는 목적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쩌저저저정!
낭호의 연검이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며 정신없이 비호의 검을 두드렸다.
배동삼과 비교해 훨씬 더 빠르고 날카롭고 정신없는 낭호의 공격을 비호는 침착하게 잘 받아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낭호의 공격 일변도와 비호의 방어 일변도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비호의 표정도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흐느적거리며 공간을 채우던 낭호의 연검이 마치 청강검처럼 빳빳하게 뻗으며 앞으로 찔러갔다.
“악!”
장여진이 비명을 질렀다.
비호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아찔한 상황이 몇 차례 있긴 했지만 피가 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검을 사용하기로 한 순간부터 예견된 상황이기는 했지만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악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피가 튄 그 순간,
낭호의 차갑기만 하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실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만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어디 한 군데 상처라도 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기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반면 비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스스로 방심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대결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졌던 약간의 방심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것이다.
방심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났고, 그것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과 같았다.
그 순간부터 방어 일변도이던 비호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좀 더 빠르게, 그리고 좀 더 날카롭게,
무엇보다도 낭호의 허를 찌르는 움직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쉬익!
바람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정면에 있던 비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낭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좌? 우? 상? 후?’
어차피 정면이 아니라면 치고 들어올 수 있는 방위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고, 낭호는 최대한 집중하여 비호의 기척을 잡아내려 애썼다.
‘뒤!’
짧은 순간 느껴진 비호의 기척에 낭호는 앞쪽으로 신형을 튕김과 동시에 몸을 들어 뒤쪽으로 연검을 휘둘렀다.
파라라락!
연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하지만 비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섬뜩!
그 순간 낭호의 왼쪽 옆구리 쪽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에 낭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찌이익!
느낀 뒤 움직이면 늦는 법.
낭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응이 늦었기 때문에 비호의 검이 그의 옷자락에 닿았고, 옆구리 옷이 찢어져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피가 튄 비호에 비하면 피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손해 보는 느낌.
비호는 멈추지 않고 더욱 거세게 낭호를 몰아쳤다. 하지만 방금 전의 그 일격 이후 완벽하게 방어세로 돌아선 낭호의 두꺼운 벽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무공 실력은 비호가 월등할지 모르지만 낭인 세계에서 오랜 세월 활동하며 쌓은 경험은 낭호가 월등했다.
그 숱한 경험이 지금 이 순간 전세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보다 못한 장여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비호의 검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연신 공격을 해대던 비호가 검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는 아직도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런 비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낭호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깊게 한숨을 한 번 쉰 비호가 천천히 연무장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장여진이 아닌 상천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그에 상천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천의 앞에 선 비호가 돌연 허리를 굽혔다.
방금 전까지 도발하듯 행동하고 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확 바뀐 비호의 모습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상천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심기가 많이 불편하셨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은 일부러 그랬다는 것 같이 들리는데?”
비호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며 화룡은 ‘그럼 그렇지’라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다. 일부러 그랬습니다.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비호의 말에 상천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저희가 의지하고 몸담을 수 있는 곳은 이곳 백룡문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이곳이 안전한 곳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안전한 곳? 확인?”
그렇게 물으며 상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예. 비록 귀주성이 반월도문의 영역이라고는 하지만 합산도문에서 감시자를 심었듯이 언제든 살수를 보낼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저와 화룡이 아가씨를 모시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요.”
비호의 말에 상천이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백룡문이 그대들의 튼튼한 울타리가 될 수 있을지 확인해 봤다는 뜻인 것 같은데… 애초에 난 얘기했소. 큰 도움을 줄 수 없을 거라고. 그런데 멋대로 시험이니 확인이니 하는 건 나를, 그리고 백룡문을 무시하는 처사 아니오?”
상천이 조금 전보다 더 흥분한 듯 더 커진 어조로 물었다. 그런 상천에게 비호는 차분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저 역시 그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저희 입장에서는 백룡문이 최소한의 울타리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아니, 이는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행동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상천의 입장에서는 비호의 말이 어처구니없을 수밖에 없었다.
불러들인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불쑥 찾아와서 정착을 해놓고는 그 이상을 내놓으라 하는 것과 같았다.
물론 비호의 생각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확인을 해보니 어떻소?”
상천이 속으로 화를 삭이며 물었다. 그러자 비호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사실 백룡문에 오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와 이곳에 온 후 지켜보았던 것들을 종합해 봤을 때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비호의 말에 상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단단한 울타리이고 더 단단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나무가 쑥쑥 자라고 있고.”
거기까지 말한 비호가 배동삼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직 실력이 많이 모자란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배동삼은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 자신과 대결을 펼쳤던 낭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게다가 다 큰 줄 알았던 나무도 여전히 자라고 있으니 든든한 마음이 듭니다.”
비호의 호평에 상천은 얼굴 표정을 살짝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