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남녕지부장 탁일경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 자신에게 굽실거리기만 할 위치에 있던 초운학이 지금 자신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서.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탁일경이 지금의 상황에 심기가 불편한 진짜 이유는 초운학에게 벌어진 파격적인 인사를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능력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탁일경 자신은 초운학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들어본 적도, 목도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탁일경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초운학은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제가 군사가 된 것에 대해 많이 못마땅하신 모양입니다.”
“그렇소.”
탁일경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앞에 있던 차를 한 잔 쭉 들이켠 초운학이 입을 열었다.
“저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도 많이 놀란 파격적인 인사였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제대로 능력 검증되지 않은 상태이니 더욱 그렇겠지요.”
초운학의 말을 탁일경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잘 알고 계시니 한번 보여주시오. 그러면 내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군사께서 시키는 대로 전부 다 하리다.”
“하하하!”
탁일경의 말에 초운학이 대소를 터뜨렸다. 그 모습에 탁일경은 영문을 몰라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너무 웃음이 나서 참을 수가 없군요. 하하!”
그렇게 말한 초운학은 계속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뜨렸다. 그에 탁일경의 불편한 심기는 더욱 깊어졌다.
“제가 지부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곳 남녕지부가 세 번째입니다. 그런데 지부장님들께서 하나같이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렇게 말한 초운학이 웃음기를 거두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석 달 후 지부장님들을 본산으로 모두 초청할 겁니다. 모든 지부장님들께서 모이시는 그때 합산도문이 정점에 설 수 있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지요. 그러면 제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으실 겁니다.”
초운학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탁일경도 더 이상 딴죽만 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후후.”
탁일경의 대답에 초운학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
반월도문에서 장여진 일행이 백룡문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상천도 장여진 일행도 더 이상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방 안에만 틀어박혀 불편한 생활을 계속해 왔던 장여진 일행은 마음 편히 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백룡문 사람들은 모두가 제각기 할 일 때문에 바빴고, 그 와중에 장여진 일행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안에만 있다가 밖에 나왔기에 답답함이 조금 풀리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장여진 일행은 마치 물에 빠져 익사하려다가 가까스로 물 위로 올라와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바깥 공기를 마시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 되었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다들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자신들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얹혀 있는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비호였다.
장여진 일행이 백룡문에 처음 당도했을 때부터 주도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비호였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긴 했다.
비호는 말보다 행동으로 움직였다.
문도들이 무공 수련을 끝내고 정리를 한다거나 그 외 다른 일을 하면 먼저 다가가서 거들었다.
처음에는 손님으로 온 비호가 자신들처럼 이것저것 들어 옮기고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 때문에 문도들이 많이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비호가 넉살 좋게 그들과 웃고 대화하며 함께 몸으로 움직이자 문도들도 점점 그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비호의 모습을 보는 상천의 마음은 고맙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비호는 상천에게 손님이었고, 손님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편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마당에 자그마한 부분이나마 도움을 주는 것에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완연한 여름이 되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한낮에는 햇볕이 상당히 뜨거웠다.
그러다 보니 인부들도 낮에는 일을 하지 않고 그늘을 찾아 쉴 정도였다.
하지만 단 한 명은 쉬지 않았다.
다름 아닌 배동삼이었다.
과거 상천이 그랬던 것처럼 배동삼 역시 문도들에게 단월검을 가르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워낙 무공에 대한 열의가 강한 배동삼은 몸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돌로 만들어진 연무장 위에 서 있으면 숨이 턱 막히는 뜨거운 무더위 속에서도 배동삼은 구슬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동삼아, 그만하고 쉬어! 그러다가 쓰러진다! 무리하면 안 돼!”
대청마루에 앉아 공혜가 준비한 과일을 먹고 있던 상천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배동삼은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런 배동삼을 보며 상천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돌연 비호가 검을 들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무런 말 없이 연무장으로 향하는 비호를 보며 상천뿐만 아니라 장여진과 여소정, 화룡까지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비호!”
당황한 화룡이 비호를 불렀지만 비호는 괜찮다는 손짓 한 번만 하고 연무장에 올랐다.
연무장 위에서 연신 목검을 휘두르고 있던 배동삼은 갑작스런 비호의 등장에 인상을 찌푸렸다.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뭡니까?”
방해를 받으면 누구나 짜증이 나는 법. 그러다 보니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비호는 씩 웃으며 배동삼에게 물었다.
“잘돼가나?”
“뭐, 그럭저럭.”
짧게 대답한 배동삼이 다시 수련을 하려고 자세를 잡는데 비호가 불쑥 물었다.
“대련 한번 하겠나?”
“무슨 소립니까?”
뜬금없는 비호의 제안에 배동삼이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말 그대로 대련 한 번 하자고.”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뭐,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혼자 수련하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지 않겠나? 나도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보고 싶고.”
비호의 말에 배동삼이 슬쩍 상천을 바라보았다. 그에 상천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였다.
“뭐, 좋습니다.”
“후후.”
배동삼이 하겠다고 하자 비호가 살짝 웃어 보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검은 없나?”
“진검으로 할 생각입니까?”
배동삼이 놀라 물었다.
“기왕 하려면 제대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진검은 없습니다.”
배동삼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비호!”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화룡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자칫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진검으로 대련을 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에 깜짝 놀란 것이다.
백룡문에 신세를 지고 있는 상황에서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 상천과 서기종 등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 아니면 말고. 목검 남는 것 있나?”
그의 물음에 배동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소.”
대청마루 쪽에서 앉아 있던 상천이 근처에 있던 목검 하나를 들어 비호 쪽으로 던졌다.
상천이 던진 목검이 빠르게 회전하며 정확하게 비호 쪽으로 날아갔다. 잘못하면 얼굴이든 어디든 제대로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비호는 웃으며 자신에게 똑바로 날아오는 검을 가볍게 잡아챘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 상천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비호의 그런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얄밉게 보이는 상천이었다.
상천이 던져 준 목검을 받아 든 비호가 배동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차이가 있으니 내력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 선수도 양보하지.”
마치 선심 쓰듯 말하는 비호를 보며 배동삼은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대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를 무시하듯 말하니 짜증도 치밀었다.
‘본때를 보여주지.’
그렇게 결의를 다진 배동삼이 흘러내리는 땀을 대충 닦아내고는 목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한 결의는 배동삼의 표정과 자세에 그대로 드러났다.
실력만 놓고 보면 여소정보다 더 높은 비호가 보기에 그런 배동삼의 모습은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오게.”
비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동삼이 천유보를 사용해 쇄도해 들어갔다.
‘오호!’
자신에게 쇄도해 들어오는 배동삼의 움직임을 보며 비호가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생각보다 기본이 잘되어 있고 좋은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동삼이 근거리까지 쇄도해 들어왔을 때 비호도 움직였다.
손에 든 목검을 가볍게 휘둘러 배동삼의 쇄도에 제동을 한차례 걸고는 널찍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디며 공세에 들어섰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듯 보인 비호의 한 수에 제동이 걸린 배동삼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며 이어진 비호의 공세에 맞춰 목검을 휘둘렀다.
‘물러섬은 없어!’
속으로 그렇게 외친 배동삼도 앞으로 나아갔다.
지근거리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목검이 어지럽게 휘둘러졌다.
따다다다다닥!
비호와 배동삼 모두 분주하게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배동삼의 표정은 여유가 없는 반면 비호에게서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만큼 비호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경험이 앞서는 만큼 배동삼의 두세 수 앞을 예측하고 있었다.
반면 배동삼은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비호의 움직임에만 대응하기에 급급했다.
“확실히 실력이 뛰어나긴 하군요.”
“그렇군. 반월도문에서 보았던 그자의 움직임에는 못 미치는 듯하지만 확실히 뛰어나.”
비호의 움직임을 보며 상천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서기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저 사람, 합산도문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왜 검을…….”
“글쎄.”
서기종도 모르겠다는 듯 대답하자 두 사람은 장여진 일행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화룡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합산도문에 몸담고 있기는 했지만 저희는 문도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수석장로님께 개인적인 은혜를 입어 그분을 모신 것뿐입니다.”
화룡이 합산도문의 수석장로였던 신건을 언급할 때 잠시 울먹거리자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머쓱해진 상천과 서기종이 다시 연무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호와 배동삼의 대련으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