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부탁?”
“예.”
“뭔가? 얘기해 보게.”
서기종의 말에도 상천은 머뭇거리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것을 본 서기종이 의아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염치없는 부탁입니다.”
“염치없는 부탁?”
“예. 서 형이 익히고 있는 심법,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상천의 말에 서기종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비록 지금은 천중문의 사람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상천이 그런 부탁을 하니 서기종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줄 알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자네도 어려운 줄 알고 있으니…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서기종의 물음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가지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단월검을 손보면서 항상 들었던 생각이 지금 익히고 있는 규화공으로는 도저히 후반부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단월검에 살을 붙인 이후 그런 느낌이 들어 군더더기를 다시 줄이는 작업을 계속해 왔지만 그래도 규화공으로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심법을 익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네. 자칫…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어. 두 개의 심법을 융화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전에 말했든 대종사만이 가능한 일이지, 무학에 대한 이해가 깊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천의 말에 서기종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네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위험한 일이야. 좀 더 생각해 보게. 그래도 같은 생각이라면 나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겠네.”
서기종이 상천의 어깨를 몇 차례 다독여 주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밤이 된 어두운 연무장 위에 고민 가득한 상천만이 홀로 서 있었다.
***
백룡문의 공사가 시작되고 며칠이 지나서부터는 다른 사람들도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조금 위험하기는 했지만 무공 수련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역할 분담이 달라졌는데, 검법 수련은 녹엽과 함께 배동삼이 맡았고, 권법 수련은 병목이 맡았다.
병목은 백룡권 수련을 혼자 도맡아 하게 되어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자신은 실력이 안 된다며 극구 사양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백룡권에 가장 익숙한 사람은 상천이고, 그다음이 병목이었다.
배동삼의 경우에도 권법을 익히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검법에 더 소질이 있었고 숙련도 역시 높았기 때문에 검법에 집중하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병목은 검법보다는 권법에 더 재능을 보여 실력이 많이 향상되어 있는 상태였다.
사실 상천이 병목과 함께 권법을 가르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천은 문주로서 앞으로 여러 가지 해야 할 것이 많았고, 병목 혼자 아이들을 가르쳐 봄으로써 자신감을 좀 더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병목의 표정은 거의 울상이었다.
상천과 낭호는 문파의 전반적인 일을 총괄하는 일을 맡았다.
낭호보다는 이것저것 경험도 많고 아는 것이 많은 서기종이 나을 수도 있었지만 서기종은 전면에 나서기를 꺼렸다.
앞으로 백룡문이 본격적으로 대외 활동에 나서게 되면 천중문과도 자주 마주치게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서기종이 그 상황에서 이성을 잃고 행동을 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될 수 있으면 그들과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서기종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천과 함께 그를 받쳐 줄 다른 사람이 필요했고, 서기종의 도움을 받으며 낭호가 경험을 쌓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기종은 아이들에게 글과 여러 가지 학문을 가르치기로 했다.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공도 중요하긴 하겠지만 여러 방면에 대한 지식도 분명 필요했다.
지금 백룡문에 있는 사람들 중 아는 것이 가장 많은 사람이 서기종인만큼 교육을 맡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체계가 바뀐 백룡문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담벼락 공사가 끝났다.
깔끔하게 보수된 담벼락은 새롭게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은 정문과 어우러져 겉에서 보기에 그럴싸하게 변해 있었다.
문파로서 최소한의 구색은 갖추게 된 것이다.
완벽하게 보수된 담벼락을 보며 백룡문 사람들 모두가 기뻐했다.
그날 밤.
상천은 흐뭇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밝게 빛나는 보름달이 떠 있었고, 그런 달이 홀로 외롭지 않게 주변에는 작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부, 보고 있어? 지켜봐. 앞으로 더 좋아질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야. 약속 꼭 지킬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종삼을 추억하는 상천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 밤엔 어떤 일이 있어도 기분이 좋을 것만 같았다.
“뭐 하고 있나요?”
장여진이 상천에게 다가왔다.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있는 그녀가 유일하게 밖에 나와 바람을 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왔소?”
“네.”
짧게 대답한 장여진도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상천의 옆에 나란히 섰다.
“밤하늘이 예쁘네요.”
장여진이 모처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상황 정리는 조금 되었소?”
상천이 그간 궁금해 왔던 것을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장여진의 입가에 번져 있던 기분 좋은 미소가 씁쓸한 미소로 바뀌었다.
상천은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닌가 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에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꺼내려는데 장여진이 입을 열었다.
“장로님들이 돌아가셨대요. 그런데 누가 그랬는지 알아요? 오라버니들이랑 아버지가 그러셨대요. 믿겨져요? 전 아직도 안 믿겨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아니, 과연 그들이 제가 알고 있는 오라버니들과 아버지가 맞을까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장여진이 울먹이며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울먹이던 장여진은 결국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녀를 차갑게만 대했던 상천은 처음으로 장여진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천이 손을 뻗었다.
뻗은 그의 손은 장여진의 어깨에 닿았고, 조심스레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의 품에 안긴 장여진은 조금 더 큰 소리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상천은 말없이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방문 앞에서 공혜가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오지 않는 상천 때문에 궁금해 문을 열고 나왔다가 연무장 위에 있는 두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다.
공혜의 눈에 비친 밤하늘의 달은 옆에서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음에도 외롭고 슬프게만 보였다.
***
나군천은 한가롭게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언뜻 그의 외형적인 부분이나 성격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의외로 나군천은 정원을 거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곁으로 하신이 조용히 다가왔다.
하신이 다가온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군천은 아무 말 없이 정원의 화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보여주지 않는 온화한 미소가 입가에 번져 있었다.
“백룡문은 어떤가?”
하신이 다가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나군천이 물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정원에 고정되어 있었다.
굉장히 포괄적인 질문이었지만 하신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지원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감시 역시 계속하고 있습니다.”
“장여진이 왔다던데.”
“알고 계셨습니까?”
나군천의 물음에 하신은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도 한두 가지 정도는 어디도 거치지 않고 알 수 있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군천의 말에 하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가끔 보고하지 않은 것들도 알고 있는 것이 있어 사람을 긴장시키곤 했다.
난 무엇이든 다 알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나군천이 반월도문의 정점에서 문도들을 다스리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였다.
“좀 더 확실해지면 보고 드리려 했습니다.”
“자네가 확실치 않은 것이 있다니 의외로군.”
“허허! 제가 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 속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신의 말에 나군천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들이 왜 온 것 같은가?”
나군천이 물었다. 하신이라면 이미 그들이 백룡문을 찾은 대략적인 의도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는 물음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왜 왔는지. 백룡문에 도착해서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는다 합니다.”
“그래서?”
나군천은 하신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하신이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불확실한 대답을 올리자면, 도피인 것 같습니다.”
“도피?”
“예. 살기 위해서. 장여진은 다른 문파와 왕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장무진, 장세진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합산도문을 벗어나면 그들이 갈 곳이라고는 백룡문밖에 없습니다. 인연을 맺은 이들 중 유일하게 소재지가 있는 사람이 바로 백룡문주지요.”
“도피라…….”
나군천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합산도문에 일이 벌어지긴 한 모양입니다. 세작에게서 보고가 올라와야 할 시점이 지나도 한참 지났습니다. 최근까지 들어온 보고들을 종합해 보면 합산도문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습니다.”
“자체 분열인가?”
“그것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음…….”
나군천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참 동안 정원을 바라보던 그가 몸을 돌려 처음으로 하신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직접 백룡문에 다녀오도록.”
“알겠습니다.”
하신이 허리를 굽혔다.
***
“자! 잘 보고 따라 해! 알았지?”
배동삼이 연무장 위에서 열심히 문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문도들 역시 배동삼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며 제대로 배우고픈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상천과 서기종이 흐뭇한 미소로 대화를 나누었다.
“잘하는군.”
“네. 아주 체질입니다, 체질. 전 처음에 엄청 긴장했는데.”
“딱 봐도 자네는 누굴 가르칠 체질은 아니야.”
“후후. 그렇습니까?”
서로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누군가 백룡문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상천과 서기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호위무사 두 명을 대동하고 나타난 하신이 웃는 낯으로 인사를 했다.
조만간 누군가가 올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도 하신이 나타나자 상천은 얼떨떨해했다.
“아, 예.”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며 상천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여기는 어쩐 일로…….”
“한 번쯤 와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고를 듣는 것과 직접 와서 보는 것 하고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허허!”
하신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백룡문을 한번 쓱 훑어보았다.
주름져 잘 보이지 않는 그의 두 눈은 그 순간에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직접 와서 보시니 어떻습니까?”
상천이 안정을 찾고 침착하게 물었다. 안 그래도 반월도문에서 사람이 오면 얘기할 것도 있었기에 기회를 보고 있었다.
“잘되고 있는 것 같아 안심입니다. 별다른 일은 없으십니까?”
웃으며 묻는 하신을 상천이 잠시 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왜 그러냐는 듯 상천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상천이 작심한 듯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