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수석장로님!”
밖에서 들려온 비호의 목소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신건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결국 사단이 난 게냐?”
“예. 일장로를 제외한 모든 장로들이 당했습니다. 전사림 일장로도… 살아남기는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비호의 보고에 신건이 다시 눈을 감았다. 곁에서 함께 듣고 있던 여소정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곳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더냐?”
“길어야 한 식경 정도입니다.”
“시간은 충분하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신건이 자고 있는 장여진의 수혈을 짚어 다시 깨웠다.
“할아버지?”
“그래. 할애비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 장여진에게 신건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진아.”
“네.”
“이리 오너라. 한 번 안아보자꾸나.”
갑작스런 신건의 말에 장여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장여진을 품에 안은 신건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꼭 살아야 한다. 알겠느냐?”
“할아버지?”
신건의 이상한 말에 불길함을 느낀 장여진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건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한 채 화룡을 불렀다.
“화룡!”
“예.”
“이 아이들을 잘 보살피거라. 적어도 이곳 광서성을 벗어날 때까지는 안심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화룡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신건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여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장여진의 물음에 신건이 암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산에 피바람이 부는 모양이구나.”
“네? 아버지는요? 오라버니들은요? 누가 그런 짓을!”
깜짝 놀란 장여진이 물었다. 하지만 신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과연 너와 내가 알고 있는 장우량, 장무진, 장세진이 맞는지 모르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신건의 대답에 장여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이번 일을 벌인 사람이 문주와 질풍대주, 그리고 뇌격대주라더구나.”
신건의 말에 충격을 받은 장여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던 눈물은 충격 때문인지 마르고 없었다.
“충격이 클 게다. 나도 지금 이런 상황이 너무나 가슴 아프구나. 늙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 물러나 있기만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신건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님.”
밖에서 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나는 것으로 보아 시간이 얼마 없는 듯했다.
“이런, 시간을 너무 끌었구나. 초옥 밖으로 나가 뒤로 돌아가면 동굴이 하나 있을 게다. 안으로 들어가면 돌로 된 단추가 하나 있을 게야. 그걸 누르면 동굴이 닫히게 된다. 그 동굴은 남녕으로 통하는 관도와 이어진 비밀통로다. 그러니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거라.”
“할아버지는요?”
장여진이 신건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신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할애비는 나쁜 놈들 혼내줘야 하지 않겠느냐?”
“안 돼요! 할아버지. 안 돼요. 같이 가요. 네?”
장여진이 그의 손을 붙들고 애원했다.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신건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에 있는 장을 열어 자그마한 목함 하나와 주머니 하나를 여소정에게 건넸다.
“가져가거라. 나중에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게야. 그리고 이건 노잣돈이니라.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는 없구나.”
“수석장로님…….”
어느새 여소정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자, 어서 가거라. 시간이 없구나. 네가 여진이를 잘 보살펴야 한다. 알겠느냐?”
“…예.”
그렇게 말한 신건이 자신의 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화룡이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어서 가시지요.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요!”
“아가씨, 일어나세요. 가야 돼요.”
다급한 화룡의 말에 여소정이 억지로 장여진을 일으켜 세웠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장여진은 넋이 나간 얼굴로 화룡과 여소정의 부축을 받으며 초옥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밖에 나간 신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이 솟은 노송들 사이로 둥근 보름달이 보였다.
“달이 참 밝구나. 하필이면 이런 날에.”
“장로님…….”
옆에 서 있던 비호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런 그에게 미소를 보인 신건이 입을 열었다.
“너도 가거라. 화룡 혼자서는 조금 불안하구나. 너도 함께 가거라.”
“하지만…….”
“여기서 죽기엔 너무 젊지 않느냐? 가거라. 가서 여진이 잘 보살피면서 살거라. 친손녀 같은 아이이니라.”
신건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비호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장로님.”
그렇게 말한 비호가 빠르게 초옥 뒤로 달려갔다. 그를 보내며 신건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늙은 몸, 더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허허허!”
그때였다.
“미친 늙은이.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면 그 소원, 내가 들어주지.”
그 말과 함께 장세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나운 표정을 한 그의 손에는 피 묻은 도가 들려 있었다.
“허허! 똑 닮았구나! 생긴 것은 세진이와 상당히 닮았는데 말버르장머리는 아니구나!”
신건의 말에 장세진이 냉소를 짓고는 물었다.
“장여진은 어딨지?”
“그건 알아 무얼 하려느냐?”
“좋은 말 할 때 내놔.”
장세진의 말에 신건이 도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어디, 날 쓰러뜨리고 데려가 보거라.”
그렇게 말하는 신건의 기도가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장여진에게는 온화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이던 것과 달리, 태산 같은 기도를 뿜어내는 지금 이 순간 신건의 모습은 한 시대를 풍미한 절대 고수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막강한 기도를 풍기며 앞을 막아선 신건의 기세에 장세진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방금 전까지 독설을 퍼붓던 것과 달리 지금은 입을 꾹 다문 채 신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허허! 방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그 기세는 다 어디 갔느냐? 자, 와보거라. 나도 오랜만에 몸 좀 풀어야겠구나.”
“이익!”
장세진이 이를 악물고 신건을 노려보았다.
분하지만 자신 혼자의 힘으로는 신건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맡겨 달라더니.”
장세진의 뒤에서 장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던 목소리에 장세진은 내심 반가웠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도 올라온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런가? 그럼 난 구경이나 좀 해야겠군.”
“이익!”
장무진의 말에 장세진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입가에 조소를 띤 장무진이 신건을 보며 포권을 지었다.
“역시 과거 천하일도(天下一刀)라 불리던 신건 어르신답습니다.”
“그래도 네놈은 좀 낫구나. 죽어 마땅한 놈인 건 마찬가지지만. 말 그대로 내가 왜 소싯적에 천하일도라 불렸는지 톡톡히 보여주마. 와라.”
신건의 말에 장무진이 싸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함께 가겠습니다.”
팍!
파밧!
장무진과 장세진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자신에게 쇄도하는 두 사람을 보며 신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꼭 살아남아야 한다!’
도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세 사람 사이에 살벌한 도광이 수차례 번뜩였다.
***
비밀 통로는 어두웠다.
화섭자를 켰음에도 한 치 앞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대부분이 내리막길인지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통로가 좁지 않다는 것이었다.
비호가 양손에 화섭자를 들고 길을 밝히며 앞서 걸었고, 그 뒤에서 화룡과 여소정이 장여진을 부축하며 걸었다.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의 장여진은 걷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비호가 화섭자 하나를 화룡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장여진의 앞에 서서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가 아니기는 하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업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한 비호는 빠르게 장여진을 둘러업었다.
비호의 등에 업혔음에도 장여진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제야 통로를 빠져나가는 그들의 속도가 조금 빨라질 수 있었다.
통로는 길었다.
한 시진가량 걷고 뛰었음에도 통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어둠 속에서 화섭자 하나에만 의존해서 통로를 빠져나가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하물며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더해지면 체력의 소모는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장여진을 업고 있는 비호는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용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비밀 통로에 들어서고 두 시진이 지나서야 그들은 비밀 통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일단 관도 변에 있는 숲에 몸을 숨기고 잠시 쉬기로 했다.
신건이 어느 정도나 시간을 벌어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혹여 오래 끌지 못했다 하더라도 닫힌 동굴을 쉽게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쉴 곳을 찾아 앉은 네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장여진은 가족들이 벌인 일에 대한 충격 때문에, 그리고 여소정은 그런 충격 때문에 힘들어 하는 장여진을 보며, 화룡과 비호는 남아서 적을 상대하는 신건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다경가량 휴식을 취한 후 네 사람은 서둘러 남녕으로 향했다.
***
“헉! 헉! 헉! 나도 이제 늙었구나! 애송이 두 명을 상대로 이 정도라니.”
온몸에 피 칠을 한 신건이 힘겹게 중얼거렸다. 온몸 곳곳에 생긴 상처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지만 겨우 도에 몸을 의지하고 서 있었다.
힘겨워하기는 장무진과 장세진도 마찬가지였다.
신건처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들도 적지 않은 내,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지금은 두 시진 가까이 계속된 격돌을 잠시 멈추고 서로를 마주 본 채 대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 정정하시구려. 헉! 헉!”
장세진이 계속해서 신건을 향해 도를 겨누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까까지의 무시하는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과거 천하일도라 불리던 절대 고수라고는 하지만 젊은 두 사람의 협공을 두 시진 가까이 받아내고도 살아 있으니 존경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그렇게 숨을 고르던 장세진이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며 말했다.
“퉤! 자, 얼른 시작합시다! 그래야 장여진 그년에게 극락을 맛보게 해주지.”
장세진의 말에 사나운 표정을 지은 신건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네놈은 지옥으로 먼저 보내줘야겠구나.”
숙!
신건이 땅에 박아놓았던 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덤벼들 것 같은 장무진과 장세진 두 명에게 호기롭게 외쳤다.
“오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는 신건을 보며 장무진과 장세진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동시에 그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이제 제발 좀 뒈져라, 이 늙은이야!”
장세진이 악에 받쳐 소리치며 매섭게 도를 휘둘렀다.
장무진 역시 그의 공격에 맞춰 신건을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신건은 호기롭게 도를 들고 서서 매섭게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산속 깊숙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