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69화 (69/141)

#069화.

같은 시각.

신건은 비호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보고를 듣는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심각했다.

“본산 내 문도들 대부분이 변했습니다. 오히려 전과 같은 사람들은 장로들뿐입니다.”

“장로들뿐이라…….”

비호의 보고에 신건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여진이는 어떻게 하고 있지?”

“화룡이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 듯합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곳으로 모셔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당장 오늘 밤에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비호의 대답에 신건이 고개를 저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오늘 밤은 아닐 게야. 합산도문 전체가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다 하더라도 열다섯 명의 장로들을 당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럼…….”

“잠시 기다려 보려무나.”

그렇게 말한 신건이 얇은 붓과 작은 종이를 가져다가 뭔가 쓰기 시작했다.

“이걸 그 소정이인가 하는 아이에게 몰래 건네 주거라.”

그렇게 말하며 신건이 종이를 접지도 않고 그대로 문을 향해 날렸다.

똑바로 날아간 종이는 그대로 문에 바른 종이를 뚫고 지나갔다.

“서두르거라.”

“예.”

비호가 다시 사라졌다. 그러자 신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에 놓인 기다란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한 자루의 도가 들어 있었다.

끝은 일부러 잘라놓은 것처럼 반듯했고, 도신이 그리 넓지는 않았으며 먹물처럼 검정색이었다.

언뜻 평범해 보일 수도 있지만 평생을 신건과 함께해 온 그의 애병(愛兵)이었다.

“자칫 오랜만에 네 녀석이 피를 볼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신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

여소정의 방은 장여진의 옆방이었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밤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섭다는 그녀의 말에 아예 처소를 옮긴 것이다.

그 후부터 여소정은 밤늦게까지 장여진과 함께 있다가 그녀가 잠이 들면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곤 했다.

아침 일찍 눈을 뜬 여소정은 곧바로 앉아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시작했다.

한참 운기를 하고 눈을 뜬 여소정이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씻으려는 찰나,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쪽지 하나가 보였다.

여소정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탁자 위에 쪽지가 놓여 있다는 것은 자신이 자고 있을 때 아니면 운기를 할 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고 있고 운기를 하고 있었다지만 기척도 느끼지 못할 정도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일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자가 만약 자신의 목숨을 노린 것이라면?

“좀 더 열심히 수련해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여소정이 쪽지를 펼쳐 보았다.

신시 초에 여진이를 내 거처로 데려오너라.

누가 쓴 것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여소정은 누가 보낸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전신을 한차례 휘감고 사라졌다.

여소정은 하루 종일 장여진의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신건의 쪽지를 본 후로 계속 불길한 예감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아…….”

장여진이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인가 한숨을 달고 사는 그녀였다.

“답답하십니까?”

“늘 그렇지 뭐. 좀 나갈까?”

“그러시겠습니까?”

“그래. 정원에라도 나가자. 안에만 있으려니까 죽겠어.”

그렇게 말한 장여진은 여소정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장여진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자신의 처소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정원이었다.

예전에는 자주 발걸음을 하던 곳이지만 한동안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정원으로 향하면서 ‘혹시 꽃이 다 시들었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했던 장여진은 여전히 활짝 피어 산들거리는 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좋네. 오랜만에 왔는데 여긴 그대로야.”

“그렇습니까?”

“응.”

여소정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하지만 장여진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도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해.”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 꽃들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장여진이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날이 춥건 덥건, 비가 오건 바람이 불건. 꽃은 언제나 활짝 피어 있잖아.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비바람을 이겨내고 추위를 이겨내는 게 참 힘들 텐데. 안 그래?”

“…….”

장여진의 말을 여소정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도 이런 것 정도는 이겨내야겠지? 여기 있는 꽃들처럼.”

“아가씨께서는 잘 이겨내고 계십니다.”

“고마워.”

여소정의 말에 장여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었구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여진과 여소정 모두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

장여진이 반가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장세진이 서 있었다.

“처소에 가보니 없더구나. 혹시나 해서 와봤다.”

“답답해서 나왔어요.”

장여진이 웃는 낯으로 장세진에게 다가갔다. 질풍대와 뇌격대가 운남에 다녀온 후로 처음 보기 때문인지 굉장히 반가워했다.

“오라버니라도 밖에 좀 데리고 다녀야 하는데 바빠서 그러질 못하는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장여진이 웃으며 대답하자 장세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녁때 딱히 할 것 없지?”

“네. 왜요?”

“그냥 오랜만에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까 싶어서 말이다. 할 말도 있고.”

“좋아요. 오랜만이네요, 오라버니랑 함께 밥 먹는 것도.”

“그렇구나. 이거, 대화를 하다 보니 미안한 것투성이구나. 하하.”

장여진의 말에 장세진이 멋쩍게 웃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여소정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장여진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를 보는 장세진의 눈빛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음심(淫心)을 품은 색마 같은 눈빛이었다.

“그럼 저녁때 봬요.”

“그래, 그러자꾸나.”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장세진이 돌아갔다. 여전히 장여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 순간 여소정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처소로 데리고 오라는 신건의 쪽지를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신시가 다 되어갈 무렵.

오랜만에 장세진과 함께 저녁을 먹을 생각에 들떠 있는 장여진에게 여소정은 신건의 쪽지를 보여주었다.

“할아버지께서 찾으신다고?”

“네. 이제 올라가셔야 합니다.”

“갑자기 왜? 진작 얘기해 주지 그랬어? 오라버니랑 저녁 먹어야 되는데…….”

“아직 시간 많으니 다녀와서 드셔도 될 겁니다.”

여소정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속마음은 신건에게 데려가서 장세진과 저녁을 먹지 못하게 할 셈이었지만 오랜만에 들떠 있는 장여진의 기분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겠지? 신시 초면… 이제 올라가야겠다.”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서둘러 자신의 처소를 나섰다. 그 뒤를 여소정이 무거운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본산의 분위기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 듯합니다.”

“음…….”

비호의 보고에 신건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원래는 장여진이 올라오는 대로 비밀통로를 이용해 본산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아직까지 움직일 기미가 없다면 조금 데리고 있다가 내려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은 알았다. 계속 본산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다가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보고하거라.”

“알겠습니다.”

비호가 사라졌다. 그리고 일다경 후.

“할아버지!”

“오냐! 그래. 왔구나!”

신건이 환하게 웃는 낯으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는 신건의 모습을 보고 장여진도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왜 부르셨어요?”

“왜긴? 보고 싶으니까 불렀지!”

“며칠 전에 보셨는데요?”

신건의 대답에 장여진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신건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오랫동안 안 보면 익숙해져서 괜찮은데 얼굴 보고 며칠 안 지났는데 이리도 보고 싶구나. 자,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네.”

신건의 능청스런 말에 환하게 웃으며 장여진이 안으로 들어갔다.

신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든든해진 여소정도 작게 한숨을 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자, 이것 좀 먹어보려무나. 당과다.”

“어머, 당과!”

“그래. 네가 어렸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당과. 허허허!”

“이건 어디서 구하셨어요?”

장여진이 당과를 집어 들며 물었다. 그러자 신건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이 할아비가 못하는 게 어딨느냐?”

“맞아요. 호호호!”

장여진이 웃으며 당과를 입에 넣었다. 그때, 여소정이 신건에게 전음을 보냈다.

[수석장로님.]

[왜 그러느냐?]

[아까 오후에…….]

여소정이 낮에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전달했다. 그런 그녀의 전음을 들으면서도 신건은 계속해서 장여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음……. 알았다. 내 알아서 하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수석장로님.]

여소정의 전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여진이 신건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죄송한데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어요.”

“음?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야?”

“네. 오랜만에 작은 오라버니랑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 할 말도 있다고 해서.”

“음…….”

장여진의 말에 신건이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여진아, 내려가지 않는 게 좋겠구나.”

“네? 무슨 말씀이세요?”

“너도 알고 있을 게다, 요즘 본산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걸.”

신건의 말에 장여진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네.”

“그것 때문에 너도 많이 힘들 게야.”

“네.”

장여진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런데 요즘 들어 본산의 분위기가 더욱 안 좋구나.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겠어.”

“일이라니요?”

장여진이 놀라 물었다. 그러자 신건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터질지는……. 다만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단다. 그러니 며칠 이곳에 있으면서 상황을 좀 보는 게 좋겠구나.”

그 말에 장여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문파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에요.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어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아가씨…….”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여소정이 안타까운 듯 장여진을 불렀다.

“전 가야겠어요. 오랜만에 오라버니랑 저녁 먹기로 했다고요.”

“아가씨! 가시면 안 됩니다.”

일어서는 장여진의 팔을 여소정이 붙잡았다. 그러자 장여진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놔!”

“아가씨! 아까 작은 도련님의 눈빛, 못 보셨습니까?”

“무슨 소리야?”

여소정의 말에 장여진이 흥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 작은 도련님이 아가씨를 보는 눈빛에 음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뭐?”

여소정의 말에 장여진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건은 이 모든 상황을 말없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고만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뭐라고?”

“도련님의 눈빛에 음심이…….”

짝!

여소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여진이 그녀의 뺨을 때렸다. 부지불식간에 따귀를 맞고 고개가 돌아간 여소정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여소정뿐만 아니라 정작 때린 장여진도 당황했다. 장여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여소정에게 말했다.

“미, 미안해… 나도 모르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러니 아가씨, 내려가지 마세요. 네? 며칠만… 며칠만 여기에 계세요. 네?”

여소정이 울먹이며 말했다. 아니, 부탁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장여진은 망설였다.

장세진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믿음과 울먹이며 애원하는 여소정에 대한 믿음이 뒤섞여 혼란을 가져오고 있었다.

“난… 난…….”

장여진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신건이 빠르게 그녀의 뒤로 돌아가 수혈을 짚었다.

잠에 빠져들어 쓰러지는 장여진을 여소정이 서둘러 부축했다.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신건의 물음에 여소정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히며 대답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그녀의 오른쪽 뺨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일단 오늘 밤을 좀 봐야겠구나. 사람을 시켜 본산 분위기를 살펴보게 했으니 사단이 벌어지면 보고가 올 게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너도 쉬거라.”

“예.”

신건이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밖은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잠든 장여진의 옆에 앉은 여소정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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