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장여진과 여소정은 한 시진 정도 신건의 거처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두 사람이 돌아가고 방에 홀로 앉아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신건이 입을 열었다.
“비호(飛虎).”
“예.”
그러자 밖에서 굵은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가서 분위기 좀 살펴보고 오너라. 혹시 모르니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화룡(火龍).”
“예.”
화룡이라는 별호와 달리 이번에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내려가서 저 아이들 좀 보살펴 주려무나. 들키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혼자 계셔도?”
화룡의 물음에 신건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여든이 넘은 늙은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내 한 몸 건사할 능력은 되느니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너라.”
“알겠습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아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알겠느냐?”
“예. 그리 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비호와 화룡의 기척이 사라졌다.
신건은 큰 표정의 변화 없이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
이름 모를 곳에 있는 어두운 대전 안.
태사의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고 그 앞이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휘장 때문에 그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저 형상만 대충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누군가가 엎드려 있었다.
“합산도문의 육 할 이상을 장악했습니다.”
그러자 태사의에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서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리군.”
“앞으로는 더욱 속도가 붙게 될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시간이라……. 지금 내게 시간을 달라 하는 것이냐?”
그 말에 엎드려 있는 사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기다려 왔다. 그러니 서두르도록. 합산도문은 시작일 따름이니.”
“알겠습니다. 서두르겠습니다.”
“가봐.”
“예.”
엎드려 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런 후 사내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놀랍게도 밖으로 나가는 사내의 얼굴은 전양지부에서 보았던 초운학이었다.
***
갈위는 최근 들어 주름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만큼 고심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질풍대와 뇌격대가 운남에서 돌아온 후 합산도문 전체에 퍼져 있는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갈위가 고심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 이유 또한 질풍대와 뇌격대가 돌아온 후에 시작되었다.
그들이 돌아오고 근 닷새 동안 갈위는 장우량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장우량이 갈위를 찾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갈위 스스로 장우량을 찾아가도 얼굴 한 번 못 보고 돌아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장무진과 장세진 두 사람 때문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장무진과 장세진 두 사람은 전과 다르게 장우량의 집무실을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갈위가 갈 때마다 장무진과 장세진이 집무실에 있었고, 기다리다 못해 그냥 돌아올 때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운이 좋아 장우량의 얼굴을 보는 날이면 별다른 대화 없이 나오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그런 것 때문에 고심하는 자신을 보며 당황스러워하던 갈위였다.
자신의 감정에 ‘질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합산도문 전체에 퍼져 있는 분위기와 맞물려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뭔가 일이 터질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게 무슨 일인지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두려움.
그것이 지금 갈위가 걱정하는 이유였다.
신건이 길게 늘어진 수염을 매만지고 있었다.
“특별한 이상 징후는 없습니다만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곧 터질 벽력탄처럼, 뭔가 사단이 나도 날 것 같습니다.”
“음…….”
밖에서 들려온 비호의 보고에 신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문주는?”
“역시 딱히 이상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장남, 차남과 매일 같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붙어 있습니다.”
“그런가? 다른 장로들은.”
“변함없습니다.”
비호의 말에 신건의 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변함없다고? 무슨 뜻인가.”
신건이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비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전반적인 기도와 분위기가 달라진 자들을 파악해 보거라.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수고 좀 하려무나.”
그 말을 듣기 전에 사라졌는지 비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지…….”
신건의 목소리 가득 근심이 담겨 있었다.
***
정오가 다 된 시간.
멀리서 백룡문의 정문이 보이자 상천은 더욱 마음이 들떴다.
서둘러 돌아가 모두에게 반월도문에서 있었던 일을 알리고 싶어 타고 있는 말의 속도를 조금씩 올리고 있었다.
그런 상천의 마음을 알았는지 서기종과 낭호도 미소를 지으며 속도를 맞춰주었다.
백룡문까지 삼십 장 정도 남았을 때,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문도들은 물론이고 목수에 포목점 주인 등 마을 사람들 몇 명이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상천 일행을 봤는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백룡문 앞에 도착한 상천 일행은 문도들과 마을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머쓱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린 상천은 웃는 낯으로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오라버니, 고생했어요. 몸은 괜찮죠?”
공혜가 다가와 상천의 앞뒤를 훑어보며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배동삼이 눈을 흘기며 한마디 했다.
“무슨 전쟁터 나갔다가 돌아온 지아비 맞이하는 거 같네. 쌈질하러 갔다 온 것도 아니고! 연회 갔다 온 건데!”
“하하하!”
배동삼의 한마디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공혜는 고개를 숙이며 배동삼을 째려보았다.
“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상천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 병목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말은 어쩌지? 우리 마구간 없잖아.”
“…….”
그의 말에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마구간이 없다고 해서 말을 팔아버릴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말은 백룡문 안 한쪽 구석에 임시로 묶어두는 것으로 하고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상천은 모두를 불러 모았다. 낮에 반월도문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얘기는 해주었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불렀어?”
병목의 물음에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모인 사람들을 한 번 슥 훑어보았다.
“아까 안 해준 얘기가 있어서.”
“안 해준 얘기? 뭔데, 뭔데?”
안 해준 이야기라는 말에 호기심이 가장 왕성한 배동삼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상천이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막천풍과의 대결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냥 이겼다는 말만 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원했던 배동삼은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이긴 게 아니야.”
“그럼? 뭔데?”
배동삼의 물음에 상천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까 말했던 대결에서 이기면 주겠다고 했던 선물 있잖아? 그게 중요한 거지.”
“아, 맞다! 그게 뭔데? 형 올 때 아무것도 안 들고 왔잖아?”
“안 들고 왔지. 들고 올 수가 없는 거였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상천이 또 한 번 웃었다. 그러자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병목이 물었다.
“도대체 그 선물이 뭔데 그래?”
병목의 물음에 다들 궁금하다는 듯 상천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선물이 뭐냐면, 앞으로 일 년 동안 반월도문에서 우리한테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기로 했어.”
“지원?”
다들 상천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는 못한 듯했다.
듣자마자 기뻐할 줄 알았던 상천은 생각했던 반응이 안 나오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안 기뻐?”
“무슨 지원인데? 뭔 줄 알아야 기뻐하든 말든 하지.”
배동삼의 물음에 상천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일 년 동안 반월도문에서 우리에게 금전적인 부분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필요한 모든 부분에 지원을 해주겠다는 거지.”
“오〜!”
다른 건 몰라도 돈을 준다는 말에 배동삼의 눈이 커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반월도문에서 저기 밖에 무너진 담벼락도 고쳐줄 수 있는 거야?”
“그럼!”
“건물도 세워주고?”
“건물은 우리가 돈 받아서 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먹고 살 돈도 주는 거고?”
“어느 정도는? 어쨌든 제대로 된 문파로 성장할 계기가 마련된 거지.”
계속된 질문을 상천이 막았다. 그러자 다들 점차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와〜!”
어떤 것을 얼마만큼 지원을 해줄지 정확하게 감이 오진 않지만 어쨌든 좋은 일은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모두 흥분 속에 기뻐하며 밤을 지새웠다.
***
밤늦은 시간에도 장우량의 집무실은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혼자가 아닌 두 명이 더 있었다. 바로 장남 장무진과 차남 장세진이었다.
최근 들어 집무실에 모여 앉아 대화를 자주 하는 삼부자였다.
그런데 세 사람의 대화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어느 정도 끝냈느냐?”
“이제 장로들만 남았습니다. 문도들은 거의 다 손을 써두었습니다.”
장무진의 대답에 장우량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장로들은 내일 밤 안으로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장세진의 대답에 장우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실수 없이 처리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장무진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수석장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어차피 뒷방 늙은이 아닙니까? 오히려 더 쉬울 겁니다.”
장세진의 대답에 장우량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늙었어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신건은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야. 괜히 자만했다가 큰코다칠 수 있다.”
“혼자 힘들면 둘이서 달려들어서라도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고. 장여진은 어떻게 할까?”
장우량의 말에 장세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녀석들한테 던져주면 안 되겠습니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텐데. 지난번 남화대 처리할 때 눈빛들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처리하기에는 아깝지. 남화대 아이들과 비교할 수 있나?”
“그럼 제게 주시겠습니까?”
장세진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음심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장우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아서 하도록. 어차피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이니.”
“알겠습니다. 흐흐흐.”
장세진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한번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세 사람의 대화가 끝날 무렵, 장우량의 집무실을 밝게 빛내던 호롱불이 일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