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분위기는 삭막했다.
이곳이 정녕 사람 사는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숨 쉬는 것도 힘들었고, 발걸음 소리를 내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평소처럼 옆에 있는 동료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이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합산도문의 분위기가 그렇게 변해간 것은 청운대와 관련된 사건이 그 시작이었다.
그 일로 문파 내부의 분위기가 점차 굳어갔고, 더불어 장우량 역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삭막해진 계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운남으로 임무수행을 위해 나갔던 질풍대와 뇌격대가 돌아온 이후부터였다.
어떻게 보면 문도들에게 가장 큰 존재감을 가지는 존재는 장우량이 아닌 질풍대와 뇌격대였다.
장우량보다 볼 기회도 더 많고 가까운 곳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선망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 질풍대와 뇌격대의 분위기가 운남에 다녀온 이후로 완전히 변했다.
합산도문의 문도들 대부분은 질풍대와 뇌격대가 돌아오던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그 숨 막히는 기도를.
처음에는 먼 거리를 다녀와야 하는 임무였기에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누구나 피곤하고 몸이 힘들면 예민해지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신 처음 다녀온 외부 임무 한 번이 그들에게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넓은 세상을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질풍대와 뇌격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시작된 변화가 합산도문 전체를 바꾸려 하고 있었다.
***
연회는 늦게 끝났다.
자정이 다 될 때까지 계속된 연회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막천풍과의 대결이 끝난 후, 많은 문주들이 상천을 찾아왔다. 저마다 술을 권하며 친분을 쌓으려 했다.
그런 것에 익숙지 않은 상천은 연신 술만 받아먹고 있었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나마 중간에 서기종이 내력으로 술기운을 몰아내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금방 취해서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거 귀주성에서 이름을 좀 날렸다고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연회장에 모인 대부분의 문주들은 백룡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문파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알고 있었다.
일 년 동안 반월도문의 지원을 받게 된다면 백룡문은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문주들이 상천과 친분을 쌓으려 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자신들에게도 뭔가 떨어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극소수는 상천의 무위 때문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 연회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상천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목이 말라 일찍 일어난 상천은 지독한 두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러가며 두통을 가라앉히던 상천은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에 들어갔다.
소주천의 경로로 진기를 한 번 돌리고 나니 숙취도 어느 정도 가라앉고 두통도 사라져 있었다.
정신을 차린 상천은 동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부터 쉬었다.
머리는 산발에 양쪽 눈에 눈곱은 잔뜩 껴 있었고, 입술은 말라 있었으며 옷은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상천은 일단 평상복으로 갈아입고는 대충 머리와 눈곱을 정리하고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흐익!”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상천은 화들짝 놀랐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밖에 시비 한 명이 서 있었다.
사실 그 시비는 밤새 수청을 들기 위해 배정된 시비였지만 상천이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상천이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했다.
“좀 씻고 싶소만.”
“안에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씻을 물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신지요?”
“마실 것도 좀…….”
“차도 함께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시비가 자리를 떴다. 작게 한숨을 쉰 상천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일다경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시비가 씻을 물과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에 상천은 또 한 번 난감한 상황을 맞이했다.
그냥 놓고 돌아갈 줄 알았던 시비가 방 안으로 따라 들어온 것이다.
방 안에는 아직 서기종과 낭호가 잠을 자고 있었고, 남자들만 있는 방이었기에 설마 시비가 따라 들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상천이 세안을 하고 머리를 정돈하는 사이, 시비는 그가 모두 씻을 때까지 옆에서 물기 닦을 천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때문에 신경이 쓰여 제대로 씻는 둥 마는 둥 한 상천이 그녀에게서 천을 받아 물기를 닦아내는 동안 시비가 다 씻은 물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후우…….”
그녀가 나가자 그제야 한숨을 쉰 상천은 다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상의를 벗으려 하였다.
덜컥!
“헛!”
단추 두 개 정도를 풀었을 때 다시 문이 열리며 시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상천은 그대로 침상에 주저앉았다.
깜짝깜짝 놀라는 상천과 달리 시비는 표정의 변화 없이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드시지요.”
차를 따른 시비는 친절하게도 상천에게 찻잔을 가져다주었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것을 받아 든 상천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른 분들께서 씻으실 물은 어떻게 할까요?”
“아, 그냥 놔두고 가시오. 깨면 알아서 할 터이니.”
시비의 물음에 상천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시비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시비의 인사에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상천은 그녀가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기종과 낭호는 시비가 나가고 한 식경 후에야 눈을 떴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눈을 뜨자마자 운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시비가 놓고 간 씻을 물로 세안을 마쳤다.
“언제 출발할 텐가?”
“이제 곧 출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천의 대답에 서기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곳에서 더 이상 일정도 없는 만큼 편한 시간에 출발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
그때, 낭호가 불쑥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상천과 서기종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불편해.”
“불편하다고?”
낭호의 대답에 서기종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처럼 편한 방에 시중들어 주는 사람도 있는데 뭐가 불편하단 말인가?
하지만 낭호의 표정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진짜 불편한 모양이었다.
사실 낭호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정도로 좋은 환경은 아니었겠지만 서기종이야 과거 문파에서 생활을 했었고, 거기다가 장문제자까지 했으니 이런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낭인 생활만 해오던 낭호에게 있어서 누군가가 자신의 시중을 든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불편했다.
“뭐, 정 그러면 지금 출발하지.”
어느 정도 낭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상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기종의 입장에서는 더 있어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기에 딱히 반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모두 일어 나셨습니까?”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세 사람은 서로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십니까?”
서기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러자 밖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저는 반월도문의 군사 자리에 앉아 있는 하신이라고 합니다.”
하신의 대답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군사라고 하면 반월도문에서 실질적으로 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서기종은 일단 문을 열었다. 밖에는 진짜 주름이 성성한 하신이 서 있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들어오십시오.”
서기종이 하신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문을 닫았다.
하신이 들어오고 세 사람은 그와 함께 방 한 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예. 덕분에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천이 예의를 갖춰 말했다. 그러자 하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편히 쉬셨다면 다행입니다.”
하신이 미소를 짓자 상천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어제 문주님께서 약조하신 것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렇습니다.”
하신의 물음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일로 문주님께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하신의 말에 상천은 깜짝 놀랐다.
“예. 지금 바로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상천이 서기종과 낭호를 바라보았다. 괜히 자신 혼자 갔다가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생긴 까닭이었다.
상천의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하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쉽지만 세 분 모두 가시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하신의 말에 상천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서기종을 바라보았고 서기종은 그런 상천에게 용기를 주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가시지요. 문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천은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어제와 같은 길로 내원에 들어선 상천은 말없이 하신의 뒤를 따랐다. 자신을 데리고 가는 사람이 하신이 아닌 어제처럼 시비였다면 구경이라도 하면서 길을 걸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앞만 보고 하신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내원으로 들어서서도 한참을 걸었다.
한 식경 가까이 걸어 들어가자 전날 보았던 연회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높은 오 층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전각을 보고 상천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곳에 문주님의 집무실이 있습니다.”
하신의 말에 상천이 침을 삼켰다.
나군천이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일까?
때마침 하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주님께서는 소문처럼 그렇게 성격 나쁜 분이 아니니까요.”
하신의 말에 상천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각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계단을 따라 꼭대기인 오층까지 올라갔다.
오층에 도착해서 긴 복도를 따라 걸어 끝에 있는 방 앞에 선 하신이 멈춰 서며 말했다.
“자, 들어가시지요.”
“저 혼자 들어가는 겁니까?”
상천의 물음에 하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함께 들어갑니다. 먼저 들어가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하신이 문을 열어주었고, 상천이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