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64화 (64/141)

#064화.

방에 들어오고 두 시진 정도 지났을 때 밖에서 아까 그 시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시비가 오기 한 식경 전쯤에 모두 잠에서 깨 있었기에 따로 옷매무새를 만질 필요 없이 방을 나설 수 있었다.

방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는데 다른 문파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상천이 접객실 밖으로 나와 내원으로 가는 중에 앞서 걷는 시비에게 물었다.

“우리만 가는 것이오?”

“예. 혼잡한 상황을 막기 위해 도착하신 순서대로 연회장까지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까 낮의 실수 때문인지 상천에게 대답하는 시비의 목소리가 작았다.

그에 상천이 소리없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오〜!’

내원으로 가던 중 거대한 연무장이 상천의 눈에 띄었다. 백룡문에 있는 연무장의 배는 되어 보였다.

그 위에서는 열 명 정도 되는 무사들이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여러 명이 같은 무공을 똑같이 펼쳐 내니 그 또한 입이 벌어질 만큼의 멋이었다.

상천은 그런 반응이었지만 서기종은 그것이 이곳을 지나는 다른 문파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연무장을 지나쳐 일각 정도 더 들어가자 내원으로 연결되는 문이 보였다.

그 앞에 도착하자 지금까지 안내를 해주었던 시비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다른 사람이 안내를 맡게 될 겁니다. 만찬이 끝나고 외원으로 돌아오실 때에는 다시 제가 안내를 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소.”

시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한 상천이 내원으로 향하는 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내원 호위무사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손님들께서 내원에 들어가실 때에는 무기를 소지하실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이곳에 맡겨놔 주시면 돌아가실 때 돌려 드리겠습니다.”

호위무사의 말에 상천이 슬쩍 서기종을 바라보았고, 서기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을 한쪽에 마련된 탁자에 올려놓았다.

서기종과 낭호 역시 자신들의 무기를 내려놓았고, 호위무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문을 통과하시면 다른 시비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런 호위무사를 지나쳐 내원 안으로 들어가자 외원에서 안내를 해주었던 시비보다 좀 더 성숙해 보이는 다른 여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오시지요.”

“한참 들어가야 하오?”

상천의 물음에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쪽에 보이는 저 건물입니다.”

시비가 가리킨 건물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상천은 시비의 뒤를 따라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만찬이 열릴 연회장은 그 크기가 굉장했다.

족히 백 명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는데, 연무장 같은 무대를 중심으로 삼면을 식탁으로 둘러놓았다.

식탁 위에는 각 문파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하나씩 놓여 있었는데 지정석인 듯했다.

연회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어림잡아 스무 곳 정도의 문파 사람들이 이미 와 있는 듯했다.

백룡문이라 쓰인 명패가 있는 자리에 상천이 앉았다.

그리고 그 뒤에 호위하듯 서기종과 낭호가 서 있었다.

“앉으면 안 되는 겁니까?”

“우린 자리가 없습니다.”

서기종이 상천에게 존대로 대답했다. 그에 상천이 민망한 표정으로 좌우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상천의 좌우에는 다른 문파의 명패가 놓여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때, 상천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막 형!”

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막천풍과 인사를 나누었다.

“잘 지냈나? 이야〜 옷이 날개라더니 이렇게 차려입으니 멋지군!”

“어색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죽겠소. 그러는 막 형도 오늘 신경 좀 쓰신 것 같은데?”

“당연히 그래야지. 하하하!”

상천의 칭찬에 막천풍이 민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요즘 백룡문 왜 이렇게 잘나가? 여기서도 백룡문, 저기서도 백룡문이야, 아주. 하하!”

막천풍도 백룡문과 관련된 소문을 들었는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멀었소. 이제 걸음마 단계인데. 하하.”

상천의 대답에 그의 어깨를 한 번 툭 친 막천풍이 서 있는 서기종과 낭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응?”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는데 서기종과 낭호는 막천풍도 아는 얼굴이었다. 친분이 있거나 대화를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무투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소.”

그렇게 두 사람이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다른 문파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입장하고 있었다.

“뭐,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또 하세나.”

“알겠소.”

막천풍이 상천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지정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자리는 상천의 자리와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자리였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니 다행입니다.”

서기종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상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안심이 조금 됩니다.”

아무리 일행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같은 자리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심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친한 막천풍의 존재 덕분에 상천은 마음이 든든했다.

한 식경 정도 더 지나자 연회장이 꽉 찼다.

초대를 받고 온 약 오십여 곳 문파 사람들은 전부 입장한 듯했고, 이제 남은 사람은 반월도문의 문주 나군천이 유일했다.

대부분 문주들끼리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지 서로 안부를 묻느라 연회장은 시끌벅적했다. 몇몇은 나이 어린 상천을 보고 수군덕대는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막천풍이 옆자리였다면 대화라도 나누면서 거기에 집중이라도 하겠지만 양옆은 생면부지의 사람들뿐인지라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덜컹!

그런 상천을 도와준 것은 닫혀 있던 연회장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서로 떠들던 사람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고,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문이 열리고 무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고 있는 회색 무복에 하얀 장포를 걸친,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선 굵은 남자였다.

그는 다름 아닌 문주 나군천의 직속 호위대인 제왕무적대(帝王無敵隊)의 대주 연비산(燕非散)이었다.

“문주님 드십니다!”

그의 외침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천도 그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비산이 옆으로 비켜서자 화려하게 치장한 나군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체구는 비켜선 연비산보다 작았지만 풍기는 기도는 그보다 거대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음에도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군천이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그가 등장하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나군천은 자신의 자리에 서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제야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와주신 여러분께 반월도문의 문주로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오. 강호 무림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빌려 서로 화합을 다져 혹여 어느 문파에서든 문제가 생긴다면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면 하오. 서로간의 우호를 다지는 자리인만큼 이 시간에는 모든 근심 걱정 내려놓으시고 즐기셨으면 하오!”

짝짝짝짝!

나군천의 짧은 말이 끝나자 모인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 모습에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나군천이 자리에 앉고는 입을 열었다.

“이런 분위기에 가무가 빠져서야 되겠소?”

짝짝!

나군천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뼉을 치자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스무 명 정도의 무희(舞姬)들이 들어섰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외모에 늘씬한 몸매를 가졌고, 속이 비치는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무희들이 중앙에 위치한 무대에 올라서자 대기하고 있던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선율에 맞춰 무희들이 춤사위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식탁은 온갖 산해진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보는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올라오자 상천은 신기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쯤 되자 장내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기 시작했다.

나군천이 등장하기 전만큼은 아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 식경 정도 지나자 무희들의 첫 번째 춤사위가 끝이 났다.

그러자 나군천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었다.

“자! 기분 좋게 술 한 잔 마십시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각 문주들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고급술인지 지금까지 상천이 마셔보았던 술들과 달리 향긋한 향이 올라왔다.

술잔이 채워지자 문주들이 하나둘씩 잔을 들어 올렸다. 모든 사람들이 술잔을 들자 나군천이 힘차게 외쳤다.

“귀주성에 있는 모든 문파들의 화합과 평화를 위하여!”

“위하여!”

나군천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상천도 입에 술을 털어 넣었는데 쓴맛보다 달달한 맛이 먼저 느껴질 정도로 좋은 술이었다.

다시 무희들이 올라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좋은 음악과 아름다운 무희들의 춤, 그리고 술이 어울리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흥겨운 분위기 때문일까? 상천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반갑소이다. 난 청화문(靑火門)의 문주 정우균(鄭祐均)이라 하오.”

후덕해 보이는 동글동글한 외모에 머리는 백발이었다. 주름은 없었지만 백발 때문에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예, 반갑습니다. 전 백룡문의 문주인 상천이라고 합니다.”

“허허! 뭐,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 당연히 문주님이겠지만, 나이가 상당히 어린 듯한데…….”

정우균이 놀랍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나이를 밝혔다.

“올해 스물한 살입니다.”

“스물한 살이라고 하셨소? 허허! 본인의 제자와 같은 나이외다. 백룡문주를 보니 같은 나이인데 본인의 제자 녀석은 어리기만 한 것 같소이다. 허허허!”

정우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상천이 미소와 함께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아직 아는 것이 많지 않고 어립니다.”

“아니긴요.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어른스럽습니다그려. 허허허!”

“감사합니다.”

정우균의 칭찬에 상천이 포권을 지으며 인사했다.

“그런데 백룡문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소? 귀주성이 워낙 넓다 보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문파들도 많소이다.”

‘백룡문이 어디 있는 거냐? 들어본 적도 없다. 삼류 문파 아니냐?’ 하는 말을 살짝 바꿔 말하는 정우균이었다.

뒤에 서 있는 서기종은 단번에 그 뜻을 파악했지만 상천은 그러지 못한 듯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강구라는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

“강구? 강구라… 그 옹안 근처에 있는 강구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상천의 대답에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정우균이 손을 탁 치며 물었다.

“혹시 최근에 그 천변색마라는 놈을 잡지 않았소이까?”

“예, 그렇습니다.”

“오호! 그 백룡문이구려! 허허! 천변색마라고 하면 꽤나 까다롭다고 소문이 났던데. 문주께서 직접 잡으셨소?”

“직접 잡았습니다.”

상천의 대답에 그를 보는 정우균의 시선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시구려. 천변색마가 백룡문에 의해 잡혔다는 소문은 우리 청화문이 있는 인회(仁懷)까지도 났소이다. 허허허! 우리 제자 녀석이 백룡문주 반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구려. 허허허!”

“과찬이십니다.”

정우균의 칭찬에 상천이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이후에도 정우균은 백룡문에 대한 이것저것을 물어보았고, 상천 역시 그와 대화를 나누며 여러 가지 조언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무희들이 내려가고 나군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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