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63화 (63/141)

#063화.

다음날.

세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이 씻고는 출발할 때 가져온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반월도문에 간다는 것이 크게 실감나지는 않았는데 아침이 되어 옷을 갈아입고 나니 실감이 나면서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후우!”

크게 숨을 한 번 내쉰 상천이 짐을 들고 방을 나섰다.

세 사람이 그전까지와 다른 옷차림으로 나타나니 놀란 건 점소이였다.

사실 그전까지는 평범한 옷차림인지라 상대적으로 알게 모르게 홀대를 해왔는데 지금 그들의 모습을 보니 더 잘해줄 걸 그랬다는 아쉬움과 후회가 진하게 몰려왔다.

사흘 동안 지낸 값을 모두 치른 세 사람은 말에 올랐다. 상천은 멋진 옷을 입고 말에 오르니 자신이 전혀 다른 위치의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반월도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아침에 출발하여 낮이 되었다.

세 사람은 말을 멈추지 않고 출발 전에 준비해 온 교자를 먹고 있었다.

“엄청 크군.”

“그러게.”

멀리 흐릿하게 형태만 보이는 반월도문의 모습을 보고 낭호가 중얼거리자 상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일전에 가봤던 합산도문도 컸지만 산에 있었기에 넓다는 느낌보다는 높다는 느낌을 더 받았었다.

하지만 평지에 위치한 반월도문은 멀리서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크고 넓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저런 곳에 가게 되었다니.’

합산도문에 갈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일을 하러 간 것이지만 지금은 엄연히 초대를 받아 가는 길이었다.

모든 면에서 대우 자체가 다를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들이 점차 상천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네.”

상천의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고 있는 서기종이 한마디 했다.

어제까지 분노하고 슬퍼하던 서기종은 온데간데없고 원래의 서기종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린 지금 아주 무서운 곳으로 가고 있단 말일세.”

서기종의 말을 상천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서기종이 말을 이었다.

“설마 가서 단순히 식사만 하고 웃고 떠들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란 말이지. 반월도문에 모일 각 문파 사람들은 저마다 온갖 생각을 다할 것이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반월도문의 문주인 나군천에게 아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다른 문파를 견제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 자리는 마냥 즐거운 자리가 아니라 도검만 없을 뿐, 전쟁터나 다름없는 자리네.”

서기종의 말에 상천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과거 장여진이 말하던 더 큰 무림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이건 그냥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합산도문에서 벌어졌던 일이 또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네.”

그의 말에 상천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서기종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꿀꺽.

상천이 침을 삼켰다. 그전까지와는 또 다른 새로운 긴장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상천 일행이 반월도문에 도착한 것은 미시 초였다. 저녁 시간까지 아직 몇 시진 남은, 적당한 시간에 도착했다.

정문에 다다른 상천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보초에게 초대장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뻣뻣하게 세 사람을 대하던 그들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무표정으로 서서 상천 일행을 막아섰던 그들이 심지어 미소까지 보이며 공손하게 맞이했다.

“이걸 가지고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시면 외원 입구가 나옵니다. 그럼 거기에 있는 무사들이 자세히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보초 한 명이 ‘특객(特客)’이라고 새겨진 나무로 만든 작은 패를 세 사람에게 각각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상천 일행은 천천히 말을 몰아 떨리는 마음을 안고 반월도문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보초의 말대로 돌을 깔아 만든 석로를 따라 일각 정도 말을 몰자 외원 입구가 보였다. 그곳에는 외원을 지키는 호위무사들 외에도 오늘 저녁 만찬을 위해 찾은 사람들을 안내하는 시비들의 모습도 보였다.

천천히 말을 몰아 외원 앞에 도착한 세 사람을 호위무사들이 멈춰 세웠다.

“반월도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죄송하지만 여기서부터는 말을 타고 가실 수 없으십니다.”

호위무사 한 명이 공손하게 말하자 세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다른 호위무사가 세 사람에게 지급된 ‘특객’이라 쓰인 목패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시비가 여러분께서 쉬실 곳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고맙소.”

상천이 포권을 하며 호위무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살짝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시비 한 명이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세 사람은 외원으로 들어섰다.

외원으로 들어간 상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와〜!’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겨우 참아낸 상천은 힐끗힐끗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구경했다.

외원 안쪽의 모습은 ‘으리으리하다’라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대단했다.

높고 넓은 건물은 물론이고, 건물들 사이사이에 서 있는 고목들, 그리고 절도있는 모습으로 외원의 순찰을 돌고 있는 호위무사들.

같은 사도련의 일익이라고는 하지만 합산도문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길 잃어버리면 찾아가기 힘들겠구나.’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상천이 혹여나 뒤처질까 부지런히 시비의 뒤를 따랐다.

시비가 세 사람을 데리고 접객실의 어느 방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일단은 이곳 외원의 접객실에 계시다가 내원으로 이동하셔서 저녁 만찬을 하시게 될 겁니다. 그때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런데 낭호가 조용히 킥킥거렸다.

서기종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오직 상천만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런 세 사람의 반응에 시비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그런 그녀에게 서기종이 웃으며 말했다.

“전 문주가 아닙니다. 여기 있는 이분이 저희 백룡문의 문주님이십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시비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상황은 이러했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열다섯 혹은 열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시비가 당연히 나이가 많은 서기종이 문주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보며 말을 한 것이다.

당황한 시비는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세 사람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특객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반월도문의 접객실 수준은 상당했다.

물론 객잔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이곳 귀양에 와서 머물렀던 고급스런 객잔의 방도 대단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좋았다.

세 사람이 한 방에 들어갔지만 방은 전혀 좁지 않았다.

침상 세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침상 자체도 컸지만 서로의 간격도 널찍했다. 그럼에도 여유 공간이 많아 세 사람이 정신없이 그 안에서 돌아다녀도 전혀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방의 내부 장식은 고급스러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장식이었다.

접객실에 들어온 상천은 침상에 살포시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털썩 주저앉거나 붕 날아서 눕고도 싶었지만 혹여나 입고 있는 옷에 주름 갈까 봐, 괜히 침상 망가질까 봐 그러지 못했다.

“역시 반월도문은 반월도문이군. 상당해. 안 그런가?”

역시 침상에 앉은 서기종이 물었다.

비록 일행 중 가장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고 천중문의 장문제자였다고는 하지만 그도 이런 곳은 처음이다 보니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고,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낭호 역시 감정은 비슷했지만 겉으로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애써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긴장해서 얼굴이 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전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젊은 나이에 이런 곳에도 와 보고.”

상천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러자 서기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나 여기 있는 낭호도 운이 좋은 거지. 낭인 생활을 하던 우리가 이런 곳에 와서 이렇게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그의 말에 낭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 상천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예민한 질문 한 가지 해도 되겠습니까?”

상천이 분위기를 가라앉히면서 질문을 할 때 어떤 것일지 짐작이라도 한 듯 서기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 자리에서 천중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천의 질문에 낭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굳이 이런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해서 좋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냈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몇 번이고 그런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봤기 때문인지 서기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만약 나 혼자 길을 가다가 그들과 마주쳤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 혼자도 아니고 문주인 자네를 따라 백룡문의 대표 자격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한 것이네. 그러니 결코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걸세.”

서기종의 대답에 상천이 눈을 감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서기종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지금이야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하지만 그 자리에 가서는, 아니, 이 방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네. 우리는 철저하게 자네에게 문주 대접을 할 것이네. 존대도 써야겠지. 자네도 우리를 아랫사람 대하듯 해야 할 게야.”

서기종의 말에 상천과 낭호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낭호는 상천에게 존대를 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고, 상천은 낭호에게는 언제나 평대를 해왔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항상 존칭을 써왔던 서기종에게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 상천을 보며 서기종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 말게. 나이 어린 문주가 나이 많은 문도에게 존대를 쓰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니. 물론 일반 문도에게는 그러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래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네.”

“그렇습니까?”

“그래. 예를 들어 나이 많은 수석장로에게 문주가 존대를 하는 것처럼.”

“알겠습니다.”

그제야 상천은 마음이 편해진 듯 얼굴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낭호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서기종이 말을 건넸다.

“너도. 어차피 말을 해야 할 일은 거의 없을 거다. 다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자는 거지. 대답 정도는 존대로 할 수 있겠지?”

서기종의 물음에 낭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마음 푹 놓고 시비가 올 때까지 쉬죠.”

그렇게 말하며 상천이 침상에 벌러덩 누웠다. 정말 푹신해서 잠이 올 것만 같았다.

서기종과 낭호 역시 침상에 누웠다.

잠들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뇌었지만 결국 세 사람은 옅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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