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상천 일행이 잡은 객잔은 상당히 고급스럽고 컸다.
얼핏 음식 값이나 방 값 등이 비싸 보였지만 생각만큼 비싸지는 않았다.
이곳 귀양의 객잔들은 대부분 세 사람이 들어간 객잔만큼이나 크고 고급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워낙 객잔의 숫자가 많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객잔들이 비슷한 가격대를 보이고 있었다.
객잔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세 사람은 식탁에 앉아 사람들 구경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신기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천만 해도 귀양보다는 작지만 남녕에 갔던 적도 있고, 서기종과 낭호야 낭인 생활을 하면서 이곳저곳 워낙 많이 돌아 다녔기에 이런 광경은 익숙했다.
그런데 사람 구경을 하게 된 것은 딱히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옹안에서 말을 타고 출발하여 이곳 귀양까지 오는 동안 워낙 여유가 있어 이번 반월도문에서의 저녁 만찬과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딱히 할 얘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준비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앉아서 사람들 구경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로 한 것이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도.”
서기종의 말에 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천의 경우에는 남녕에서 무투대회를 보기 위해 몰렸던 사람들의 숫자보다 객잔 안팎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아 보일 정도였다.
“다들 화려하군요. 남녕 사람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상천의 말에 서기종이 답을 해주었다.
“이곳 귀양이 남녕에 비해 좀 더 부유하지. 아무래도 그곳보다는 유동인구가 많고 여러 가지 축제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많은 도시니까. 그러다 보니 돈 만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또 그런 사람들은 버는 만큼 쓰게 되어 있으니까.”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포목점 주인이 만들어준 옷을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 잠깐 동안 ‘너무 화려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는데 이곳 귀양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화려하게 입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상천이 지금 당장 새 옷을 입고 길거리에 나간다 해도 크게 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반월도문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거 조심해야겠군.”
서기종의 말에 상천과 낭호가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뭡니까?”
“시비.”
“시비?”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다.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지금처럼 셋이 모여 앉아 얘기만 하는데 시비 같은 것이 생길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에 낭호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곳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있게 마련이지. 강구는 워낙 작은 마을이라 그런 놈들이 거의 없었지만 이런 곳은 흑도의 무리들이 활동하기도 한다.”
“흑도?”
“처음 듣나?”
처음 듣는다는 것 같은 상천의 반응에 낭호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후……. 흑도는 어디에나 있는 무리들이다. 싸움 좀 한다는 뒷골목 패거리들이나, 홍등가에 몸담은 기녀들, 도박장 주인 등등. 말 그대로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 중에는 질 나쁜 놈들이 꽤 있지.”
“하지만 여기는 반월도문의 영역인데.”
상천의 말에 이번에는 서기종이 나섰다.
“뭐, 다른 곳에서는 흑도 무리들의 방파도 있긴 하지만 여기엔 흑도들의 방파가 있는 건 아니니 반월도문에서 그들을 문제 삼아 몰아내거나 하지는 않는 거라네. 게다가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무림인들이 나서야 할 일들보다는 관에서 나서야 할 일이 더 많기도 하고 말이지.”
서기종의 말에 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무림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어 조금 들뜬 모습이었다.
그런 상천의 모습에 서기종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귀양에서의 첫날은 순조롭게 지나갔다.
긴장을 해야 한다거나 걱정을 해야 한다거나 화를 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조금도 벌어지지 않았다.
상천의 눈에 비친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함께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며칠 사이에 지금까지는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즐거움이 배가되고 있었다.
반월도문 입성까지 하루 앞둔, 귀양에서의 둘째 날은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상천은 체면 불고하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기에 바빴다.
그런 상천이 창피했는지 서기종과 낭호는 슬쩍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고 뒤따라 걸었다.
“세상에, 과일 가게가 저렇게 커?”
상천이 백룡문 근처에 있는 것보다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과일 가게를 보고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문득 옆을 봤는데 아무도 없자 두리번거리다가 거리를 두고 뒤따르는 서기종과 낭호를 보았다. 상천이 자신들이 뒤로 처진 것을 알아차리자 서기종이 피식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상천의 물음에 대답은 낭호가 했다.
“창피해서.”
그러자 상천이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제야 서기종과 낭호는 상천과 나란히 걸었다.
“너무 촌티 내지 마라.”
낭호의 한마디에 상천이 그를 흘겨보았다.
한참을 구경하고 다니다가 점심 식사 때가 되어 세 사람은 다시 객잔으로 돌아왔다.
웃는 낯으로 상천이 먼저 객잔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무표정의 낭호가 따라 들어갔다. 작게 한숨을 쉰 서기종이 그 뒤를 따랐는데, 들어오던 그가 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우뚝 멈춰 선 그를 보며 상천이 물었다. 하지만 서기종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낭호 역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서기종의 시선은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얼굴 역시 크게 분노한 사람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래로 늘어뜨린 양손이 으스러지도록 주먹도 쥐고 있었다.
“서 형?”
상천이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서기종은 상천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왜 그러지?’
이상하게 생각한 상천이 서기종의 시선이 닿아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한 문파의 사람들인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서기종의 시선은 그들 중 한 명에게 고정되어 있는 듯했다.
낭호 역시 서기종이 바라보고 있는 쪽을 바라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뚜벅뚜벅.
서기종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낭호가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놔.”
서기종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낭호는 그의 팔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서기종의 반응으로 보아 그리로 다가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앉으십시오.”
상천이 억지로 서기종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양옆으로 상천과 낭호가 앉았다.
그들은 혹시라도 서기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가려 하면 붙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후…….”
자리에 앉은 서기종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심장은 제 속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던 겁니까? 저들이 왜…….”
상천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기종은 묵묵부답이었다.
식탁 위에 팔을 올려놓고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고는 다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서기종의 시선이 머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떠들며 식사에 열중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서기종의 시선은 분노 그 자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상천과 낭호는 영문을 몰라 했다.
낮의 일 때문일까?
그날 밤.
서기종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는 그를 객잔 안의 사람들이 힐끗거렸다.
하지만 서기종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여기 계셨습니까?”
상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서기종의 두 눈은 많이 풀려 있었다.
그런 그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상천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점소이 한 명이 얼른 다가와 술잔 하나를 더 가져왔다.
서기종이 술병을 들어 상천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상천이 병을 넘겨받아 그의 잔을 채웠다.
잠시 동안 말없이 술잔을 들고 있던 서기종이 약간 혀가 풀린 말투로 물었다.
“궁금하겠지?”
“…….”
상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피식 웃은 서기종이 말을 이어갔다.
“보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을 봤네.”
서기종의 목소리에는 낮에 보여주었던 분노와는 다른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상천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서기종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난 원래 낭인이 아니었네. 버젓이 문파에서 무공을 익히던 사람이지. 천중문(天中門)이라는 곳이었다네. 아까 그 사람들도 천중문 사람들이고.”
몰랐던 사실에 상천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녹엽이 내게 그런 건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지?”
서기종의 물음에 상천은 백룡문을 떠나오던 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밖에 없지. 내가 문파에 몸담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가 뭔지 아나?”
서기종이 상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리고는 상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내가 장문제자였기 때문이네. 차기 장문인이 되기 위해 무공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소양 교육도 받았지. 그러니 아는 거라네.”
그렇게 말하며 서기종이 내내 들고 있던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묻고 싶겠지, 그런데 왜 낭인이 되었냐고. 그리고 왜 그들을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이느냐고.”
서기종의 말에 상천은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입을 열 때가 아니라 들어주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도 잔 하나.”
그때, 낭호가 옆에 와서 앉았다. 그러자 점소이가 술잔 하나를 더 가져왔다.
“술도 한 병 더 가져오고.”
“같은 거로 드릴까요?”
점소이의 물음에 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문파 사람이었군. 어쩐지, 다른 낭인들의 무공과는 다르다 싶었지.”
낭호가 납득이 간다는 듯 말하자 상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기종의 무공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다른 낭인들의 무공은 체계가 잡혀 있다기보다는 실전에 맞게 자신들만의 틀을 만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기종의 무공은 기본적인 체계가 잡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너도 한 잔 받아라.”
점소이가 술을 가져오자 낭호가 술병을 들었다. 그에 상천은 얼른 자신의 잔을 비우고 술을 받았다.
상천에게 술을 따라준 낭호가 비어 있는 서기종의 잔에 말없이 술을 부었다.
“장문인이셨던 사부님은 쫓겨났다. 아까 그놈들 중에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깨에 다른 문양을 그리고 있던 자를 봤나?”
서기종의 물음에 상천과 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사숙이라 부르며 따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사형을 몰아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
그렇게 말하는 서기종의 목소리에는 낮에 느꼈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오른 듯했다.
“사부님은 처참하게 목숨을 잃으셨다. 온갖 지저분한 누명을 씌워 죄인으로 몰았고. 그런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셨는지 일이 벌어지기 며칠 전 몰래 나를 밖으로 빼돌리셨지.”
말을 한 뒤 술잔을 기울인 서기종이 입가에 묻은 술을 엄지로 쓱 닦아내고는 말을 이었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지. 그러다가 며칠 뒤 소문을 들었다. 장문인이 죽었고, 사제가 대신 그 자리에 앉았다는. 하지만 난 알고 있었지. 나를 데리고 도망친 노인이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으니까. 그런데 너무 두려웠다. 사부님이 돌아가셨는데 제자가 되어서는 찾아가 따질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지. 그리고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겁하게 도망쳤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름도 버리고 얼굴도 버린 채.”
서기종의 마지막 말에 상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름은 얼마든지 가명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얼굴을 버렸다는 말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인피면구인가?”
놀란 상천과 달리 낭호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러자 서기종이 웃으며 말했다.
“인피면구 하나로 이십 년 넘게 살 수 있겠나?”
“그럼…….”
상천의 물음에 서기종이 피식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이렇게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서기종이 중얼거렸다.
그 이후로 세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