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천변색마(千變色魔)라는 악인이 있었다.
과거 구유음마(九幽音魔)라 불리던 희대의 마인이 길러낸 제자였다.
하지만 천변색마는 사부의 악명만큼 마도 내에서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
구유음마는 비록 여자들의 음기를 흡수해 내공을 기르는 악질의 무공을 익혔지만 나중에 가서는 욕정을 자신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무공을 대성한, 마도 내에서는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다.
정도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악인이었지만 마도 내에서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천변색마는 그러지 못했다.
구유음마가 무슨 생각으로 천변색마를 제자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걸었던 길을 천변색마는 따르지 못했다.
참고 견디는 인내의 시간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설프게 익힌 마공 때문에 스스로 욕정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비록 무너져 음지에만 존재하는 마도 내에서도 천변색마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욕정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는 오로지 희생양만 찾으러 돌아다닐 뿐이었다.
귀주성 내에 점점 피해자가 늘어나면서 반월도문에서도 그를 잡기 위해 각 지부에 수배령을 내리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천변색마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진짜 얼굴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보통 음마나 색마들이 밤에 활동하는 것에 비해 천변색마는 사람들이 많은 낮에 주로 활동을 하기에 인파에 묻혀 있으면 얼굴을 안다고 해도 쉽게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반월도문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공혜는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백룡문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백룡문이 우리 문파고 상천이 우리 오라버니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함박웃음을 지은 공혜는 부지런히 백룡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팟!
‘어!’
그때 목 뒤로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것 같더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어깨에 어떤 남자가 팔을 걸며 친한 척을 했다.
“이야〜 오랜만인데? 잘 지냈어?”
공혜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은 잘생긴 이십대 청년의 모습인데 머리는 백발이었다.
공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워만 할 뿐이었다.
“자, 우리 저쪽으로 가서 오랜만에 회포 한번 풀어볼까?”
그렇게 말하며 사내가 공혜를 으슥한 곳으로 데려갔다.
“어? 저거 상천 문주 동생 아닌가? 저 사람은 누구지?”
“예?”
상천과 목수는 함께 목공소로 향하고 있었다. 현판을 완성하기 전에 한 번 와서 확인하라는 목수의 말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저잣거리로 들어서는데 어느 낯선 사내가 공혜를 데리고 으슥한 곳으로 가는 것을 목수가 본 것이다.
그의 말에 상천도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건물들 사이 골목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천 문주가 아는 사람이오?”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 누구지? 이 동네에서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목수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상천은 왠지 모를 불길함에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현판은 나중에 확인하겠습니다!”
“어? 어, 그래!”
빠르게 사라지는 상천을 보며 목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설프게 손을 들어 흔드는 것뿐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낯선 사내와 공혜가 사라진 골목으로 달려갔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상천의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혜야! 혜야!”
상천이 크게 소리쳐 공혜를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젠장!’
심각해진 상천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공혜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지나가는 중년인 한 명을 붙들고 물었다.
“혹시 이쪽으로 백발을 한 남자와 여자 한 명이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못 봤수!”
그렇게 대꾸한 중년인이 상천을 그냥 지나쳐 갔다. 그러자 더욱 다급해하는 상천에게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노인 한 명이 말했다.
“아까 저〜 쪽으로 가더이다.”
“예?”
상천은 노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이라 빛도 잘 들지 않는 곳이었다.
“감사합니다!”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 상천이 빠르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아… 하아…….”
천변색마가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자신의 뺨과 목덜미를 쓰다듬는 천변색마의 손길에 공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좋은 향기다. 아주 좋은 향기야. 흐〜 후…….”
천변색마의 뜨거운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졌다. 공혜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공혜는 속으로 끊임없이 상천을 불렀다.
“이 안에 예쁜 봉우리를 숨기고 있겠지? 하하! 궁금하구나. 감촉이 어떨지.”
그렇게 말한 천변색마의 손이 공혜의 뺨에서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눈을 감고 있던 공혜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공혜도 무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그 수준이 낮아 천변색마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
공혜는 속으로 다시 한 번 상천을 불렀다. 그때였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이 개자식아!”
상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반가운 목소리. 공혜는 눈을 뜨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상천이 서 있었다.
“이런. 방해꾼이라니.”
천변색마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상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공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깐이면 된다. 그 이후에는 환희를 맛보게 해주마.”
천변색마가 공혜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공혜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개새끼야!”
상천이 먼저 검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천유보를 이용해 빠르게 달려든 상천은 강하게 일격을 뿌렸다.
“훗!”
하지만 여유롭게 웃은 천변색마는 가뿐하게 상천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는 갈퀴 모양으로 구부린 손을 상천의 팔을 향해 뻗었다.
‘헛!’
상천은 깜짝 놀랐다.
무공을 익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막연하게 했지만 생각보다 더 뛰어난 것 같았다.
재빨리 몸을 틀며 팔을 빼낸 상천이 다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방금 전에는 분노에 휩싸여 무식하게 공격을 했지만 지금은 머리를 식히고 침착하게 대응을 해야 했다.
“후후. 방금 전에 미쳐 날뛰던 놈은 어디가고 겁먹은 강아지 새끼만 서 있는 거지?”
천변색마가 상천을 조롱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상천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공간이 비좁아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게다가 자칫 그가 공혜를 인질로 잡을 수도 있었다.
짧은 시간에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그린 상천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가소롭구나.”
천변색마도 양손을 뻗으며 상천에게 달려들었다.
상천의 날카로운 검과 어느새 길게 자란 천변색마의 손톱이 서로를 노렸다.
천변색마를 강구 인근에서 목격했다는 소식에 반월도문 옹안(甕安)지부 지부장인 정진목(鄭振穆)은 수하 다섯 명을 데리고 강구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한 정진목은 수하들에게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곧장 수하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진목 역시 날카로운 눈매로 사방을 둘러보며 수상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강구 사람들은 반월도문 무인들의 등장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고, 없는 죄도 지은 것 같이 주눅이 들었다. 그들의 등장만으로도 그런데 하나같이 무서운 얼굴 표정을 짓고 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
그때 저잣거리 한쪽 골목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잔뜩 겁에 질린 그의 얼굴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칼부림 났다, 칼부림 났어! 상천 문주랑 어떤 사람이랑!”
그 사람의 외침에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진목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지면을 박차고 사내가 튀어나온 골목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찌이익!
상천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이미 그의 옷은 몇 군데가 볼품없이 찢어져 있었다.
협소한 공간인지라 움직임에 제한이 많아져서 그런지 쉽게 상대를 공략하기 어려웠다.
‘최대한 간소하게!’
상천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시작했다.
과거 막천풍과 난생 처음으로 비무를 벌였을 때의 움직임을 떠올리면서.
반대로 천변색마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신의 손은 점차 상천에게 닿고 있는 반면, 상천의 검은 자신의 옷깃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싸움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공혜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무림인의 살기 어린 살벌한 싸움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도 두려웠지만 상천이 밀리는 것 같아 더욱 그랬다.
슈슈숙!
천변색마의 날카로운 손가락이 상천의 얼굴을 향했다. 당하면 긁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얼굴이 뜯겨 나갈 것 같은 위력이 담긴 일격이었다.
하지만 상천의 다리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지금까지와 달리 움직임을 최소화 하면서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변했다.
천변색마의 손이 상천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끝이 터져 피가 주륵 흘렀지만 상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진기를 끌어 올려 단월검의 초식들을 뿌려냈다.
쒜에엑!
검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그전까지 상천이 살을 입혀왔던 단월검과는 또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군더더기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러모로 노력을 해왔지만 잘되지 않던 것이 좁은 공간에서의 싸움을 통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상천이 자신의 공격을 피하고 도리어 반격을 가해오자 깜짝 놀란 천변색마는 팔과 몸을 기묘하게 꺾으며 공격을 막아갔다.
쩌저저정!
쇠와 손이 부딪쳤는데 쇳소리가 났다.
음기를 양손에 모아 쇠처럼 단단하게 만든 천변색마는 자신있게 상천의 검에 부딪쳐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차 천변색마의 손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상천의 공격은 거칠 것이 없었다.
자신감이 붙은 상천은 계속해서 천변색마를 몰아붙였고, 결국 그에게 상처를 내는 데 성공했다.
찌이익!
옆구리가 찢어지며 핏물이 배어 나왔다.
그 순간 천변색마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이노옴!”
천변색마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자신이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한순간에 전세가 바뀌어 버렸다.
게다가 새파랗게 어린놈이 나타나 방해를 하니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천변색마가 진기를 끌어 올렸다.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쭈글쭈글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흡수했던 음기로 젊은 피부를 유지하고 있던 그가 모든 진기를 양손에 끌어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변해가는 그의 얼굴을 본 상천은 깜짝 놀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변색마의 등만 보고 있는 공혜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상천도 진기를 끌어 올렸다.
십성의 규화공이라고는 하지만 단전에 모여 있는 진기의 양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 아니라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지잉!
상천의 검이 진동했다.
처음 있는 일. 상천의 검에 진기가 주입되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상천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천변색마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상천이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초식은 단월검 이초식 뇌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