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57화 (57/141)

#057화.

마을에는 조용히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바로 상천이 수금한 돈을 노리는 범죄자와 산적 두목을 잡았다는 소문이었다.

상인과 봇짐장수들의 입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소문이 되어 마을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마을에 백룡문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동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간 백룡문이 마을에 미치는 영향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소문으로 백룡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귀주성에 반월도문이 있기는 했지만 본산과 멀었고, 가장 가까운 지부라고 해봤자 부지런히 걸어서 나흘은 가야 하는 옹안지부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외진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 때문에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관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관아에서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라도 벌어지면 두려움에 하루하루를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있는 듯 없는 듯 치부했던 백룡문이 마을 사람을 구하고, 산적을 잡았다는 소문에 마을 사람들은 ‘혹시?’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혹시 백룡문이 앞으로 우리를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배동삼은 마을의 객잔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 백룡문에 왔을 때는 점소이 일을 했지만 열여섯 살이 된 지금은 조금 지위가 격상되어 있었다.

객잔에 소속된 점소이들을 관리하는 일.

그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일을 시키고 감독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려도 오랜 시간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을 마친 배동삼은 백룡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잣거리를 지나는데 아이들 몇 명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아이들이 하는 말이 배동삼을 더욱 기분 좋게 했다.

한 아이가 나무 막대기로 악당 역할을 하는 다른 아이를 찌르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이얏! 나쁜 악당! 내 검을 받아라!”

“으악! 이렇게 강하다니! 넌 누구냐!”

악당 역할을 하는 아이가 쓰러지며 하는 말에 나무 막대기를 든 아이가 허리에 손을 얹고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나는 백룡문주다! 이 마을의 나쁜 악당은 모두 내가 처단하겠다! 하하하하!”

막대기를 든 아이는 스스로를 백룡문주라고 칭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배동삼은 환하게 웃으며 백룡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룡문으로 돌아온 배동삼은 자신이 오는 길에 본 광경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 얘기에 상천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서기종과 녹엽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거 소문 참 빠르단 말이지. 애들 입에 오르내리면 반절 이상은 성공한 셈이야. 무공은 어렸을 때부터 익히는 게 좋으니까.”

녹엽이 기분 좋게 웃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상천도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입문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만 있으면 되겠군.”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실 지금은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왜?”

상천의 말에 녹엽이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입문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정문 앞에서부터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상천의 말에 녹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래. 처음 여기 왔을 때 정문 보고 경악했지. ‘여기 사람 사는 곳이 맞긴 한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녹엽의 말에 상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난번에 벌어들인 돈과 장 소저가 가져온 돈으로 정문 보수부터 하는 게 어떻겠는가? 현판도 다시 만들고. 정문과 현판은 그 문파의 얼굴과 다름이 없네.”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번 알아봐야겠군요.”

“앞으로 부지런 좀 떨어야겠군.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

낭호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사실 백룡문은 정문과 현판 좀 손본다고 나아질 상태가 아니었다.

담벼락은 물론이고 건물도 많이 낡아 있는 상태였다.

입문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한둘 생긴다면 지금 건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상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상천은 공혜와 함께 상가들이 많은 마을 저잣거리로 향했다.

실로 오랜만에 상천과 단둘이 나들이를 나선 공혜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상천도 싫지는 않은지 살짝 들뜬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지금 어디 가는 거야?”

“현판 좀 주문하려고.”

“현판?”

공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상천이 계속 길을 걸으며 말을 이었다.

“정문에 달려 있는 현판이 너무 낡았잖아. 부서질 것처럼. 그래서 그럴싸하게 새로 만들려고.”

“현판만 하면 뭐해. 문도 새로 해야지. 사람들이 찾아와서 가장 먼저 보는 게 그거잖아.”

그녀의 말에 상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래서 정문도 새로 할 거야. 현판만 할 게 아니라 이것저것 좀 알아보려고. 사실 손봐야 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잖아?”

“그렇긴 해. 이참에 여기저기 보수도 좀 해야지. 우리 애들도 제법 기술 좀 배웠으니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하는 공혜를 보며 상천이 미소를 지었다.

“일단은 정문하고 현판부터 하자. 나머지는 돈 좀 더 벌고 나서 해야지.”

“응, 그래.”

공혜도 상천에게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런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어느새 마을 저잣거리에 다다랐다.

저잣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시끄럽다는 생각보다는 정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파를 헤치고 상천이 찾은 곳은 목공소였다.

“어서 오쇼!”

대패로 열심히 나무를 깎고 있던 목수가 안으로 들어서는 상천과 공혜를 보며 크게 외쳤다.

목수를 중심으로 그 주변 바닥에는 나무 톱밥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현판을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어느 정도 크기로 만들 거요?”

“가로 육 척에 세로 이 척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천의 말에 목수가 연신 대패질을 하며 대답했다.

“그 정도면… 어이쿠, 크게 하시네. 정문에 내걸 거요?”

“그렇습니다.”

“그렇군. 그럼 나무는 뭐로 하겠소?”

“어떤 게 좋습니까?”

상천의 물음에 목수가 대패질을 멈추고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보통 느티나무나 은행나무를 많이 쓰지.”

“어떤 게 더 싸요?”

공혜가 불쑥 물었다. 그러자 목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 살림 잘할 것 같은 아가씨로구만. 여자친구인가? 허허!”

목수의 물음에 공혜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뭐, 느티나무든 은행나무든 값은 거의 비슷한데, 굳이 따지자면 은행나무가 조금 더 싸지.”

“그럼 은행나무로 해주세요.”

목수의 말에 공혜가 은행나무로 결정했다. 상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럼 값은 얼맙니까?”

“가만있어 보자, 은행나무로 하고, 크기가… 육 척에 이 척이면……. 아, 그걸 안 물었네. 글씨는 서각장(書刻匠)에게 맡길 거요, 아니면 그냥 내게 맡길 거요?”

“서각장이요?”

“아, 목판에 글씨 새기는 사람을 서각장이라고 하지. 물론 나도 할 줄은 알지만 내가 하는 것보다야 서각장이 하는 게 훨씬 그럴싸하고.”

목수의 말에 공혜가 상천을 바라보았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서각장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러시겠소? 그럼 값이… 은자 한 냥 되겠군.”

“그렇게 비싸요?”

목수의 말에 공혜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러자 목수가 웃으며 말했다.

“나뭇값에 내 인건비에 서각장 쓰는 돈에……. 이 정도면 싼 거지! 다른 데서는 이 돈에 절대 못 해!”

“조금만 깎아주시면 안 돼요? 네? 네?”

“어허! 이 아가씨 보게. 아주 남의 살림 거덜 낼 기세야! 깎아주면 우린 뭘 먹고 살라고?”

“그러지 말고 조금만 깎아주세요. 네? 저희 현판 말고 정문 보수도 해야 되는데… 정문도 여기서 할게요. 네?”

공혜의 말에 목수가 난처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목수는 시무룩한 표정과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공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여자한테 약해서 탈이라니까. 좋수다! 그렇게 하지. 대신 많이는 못 깎아줘. 서각장한테 떨어지는 돈까지 계산해야 하니까.”

“고마워요, 아저씨!”

방금 전까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공혜는 값을 깎아주겠다는 목수의 말에 금방 환한 표정으로 바꾸며 좋아했다.

“현판에는 뭐라 적을 거요?”

“백룡문입니다.”

상천의 대답에 목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몰라 상천과 공혜 둘 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목수가 물었다.

“요 근방에 있는 백룡문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저기 저쪽에 있는 고깃집 주인 구해줬다는 그 백룡문?”

“예.”

“그 우라질 산적 두목을 잡았다는 그 백룡문?”

“예.”

상천이 머쓱해 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또다시 공혜가 나섰다.

“둘 다 여기 있는 우리 오라버니가 잡았어요!”

“지, 진짠가?”

목수의 반응에 상천은 다시 한번 머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놀란 표정으로 상천을 바라보던 목수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서각장에게 들어가는 돈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에 들어가는 값은 내 모두 빼주겠네!”

“예?”

갑작스러운 목수의 말에 상천과 공혜 둘 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구나!’ 하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정문도 내 최대한 싸게 해 주지!”

“정문까지요?”

놀란 공혜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래, 정문까지! 나도 고마워서 그러네. 백룡문이 이 마을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나뿐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네.”

“저희가 한 거라고는…….”

“그래, 날강도 한 명에 산적 두목 한 명 잡은 거에 불과하지. 그래도 관아에서 잡지 못한 놈을 잡아준 것 아닌가? 그놈들 때문에 이 근방 상인들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른다네. 아주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나? 그런데 요즘엔 다들 안심하고 있네. 하하!”

목수의 말에 상천은 고맙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하면서 쑥스럽기도 한 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공짜로 해주고 싶지만, 먹고 살아야 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가 없구만. 어쨌든 내 현판은 아주 제대로 만들어 주겠네. 서각장에게도 제대로 쓰라고 압박도 좀 하고. 하하하!”

예상치 못하게 현판과 정문을 싸게 한 상천과 공혜는 기분 좋게 백룡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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