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상천이 나가고 난 후 작게 한숨을 쉬며 말없이 앉아 있던 장여진이 서기종을 보며 물었다.
“세 분은 아예 이곳에 정착을 하신 건가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소.”
“그렇군요. 잘됐네요.”
장여진의 말에 서기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도 있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서기종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 문주가 말했듯 이걸로 계산은 다 끝난 것이오. 지금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이 과거의 앙금이 풀려서 그런 것도 아니고. 불편하긴 우리도 마찬가지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고 최대한 빨리 떠나주시오.”
그렇게 말한 서기종도 밖으로 나갔다.
방에 남겨진 장여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녀에게 여소정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 편한 미소가 아닌 힘겨움에 억지로 지어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여소정이 안쓰러운 듯 중얼거렸다.
“아가씨…….”
장여진과 여소정에게 방 하나를 내어주고 상천은 더 이상 그들과 마주하지 않았다.
서기종과 녹엽, 낭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일을 당했을 때와 같은 마음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그나마 공혜와 병목 등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간혹 들여다보며 불편하지 않게 해주려 애를 썼다.
그들도 상천과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눈치로 대충 파악하고 있었기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밤이 되고 상천은 검을 들고 연무장에 섰다.
낮 시간에는 연무장이 비는 시간도 없고 대부분 현상범들을 잡으러 다니기 때문에 상천의 수련 시간은 주로 저녁 이후 밤 시간이었다.
검을 들고 선 상천의 눈앞에는 오랜만에 환영이 그려지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는 환영.
상천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환영의 옆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섰다.
같은 방향을 보고 선 환영과 상천은 동시에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환영과 상천이 펼쳐 내는 단월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똑같은 움직임을 그려내고 있었다.
오차 없이 딱딱 들어맞는 군무(群舞)는 자연스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법이다.
비록 여러 명이 동시에 펼쳐 내는 군무는 아니라 하여도 환영과 상천이 그려내는 단월검의 아름다움은 굉장했다.
다만 그것이 상천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라 아쉬울 따름이었다.
환영과 함께 단월검을 펼쳐 내는 상천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지금 상천은 내력을 운용하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순수 근력으로만 단월검을 펼쳐 내고 있었다. 다만 상천의 옆에서 함께 검을 휘두르는 환영은 내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상천은 검법을 펼치고 있는 환영의 몸 위로 진기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쒜엑!
검이 허공을 가른다.
그와 함께 어느새 흐르고 있는 상천의 땀방울도 허공에 흩날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소 짓고 있던 상천의 얼굴은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역시…….’
상천의 시선이 환영의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이 검법을 멈추지는 않았다.
‘달려.’
단월검 후반부로 갈수록 위력이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순수하게 근력으로 펼쳐 내는 검법과 진기를 이용하는 환영의 검법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십성의 규화공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상천이 단월검을 모두 펼치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진기의 흐름을 바꿔본다면?’
그렇게 생각한 상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진기의 흐름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내상을 입는 것을 떠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차라리 검법의 군더더기를 줄여보자.’
지금까지 살을 붙이기만 했다. 너무 살이 많이 찌면 누구나 힘들어지는 법.
뺄 때에는 과감하게 뺄 필요도 있었다.
“그 검법, 대단하군요.”
생각에 잠겨 집중하느라 누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있던 상천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그 자리에는 여소정이 서 있었다.
“별것 아니오.”
“별것 아니라니요. 전 충분히 놀랐어요. 맹호도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어요.”
여소정의 말에 상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미리 준비한 천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연무장 밑에 서 있는 여소정을 그대로 지나쳤다.
“그런데 군더더기가 조금 보이는 것 같네요.”
그녀의 말에 상천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알고 있소.”
“군더더기 없애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나요?”
“모를 거라 생각하오?”
상천이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여소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
“도와줄 수 있어요.”
“가르침 따위 필요없소.”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저도 그런 것까지 명쾌하게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아니니까요.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아…….”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쉰 상천이 차가운 눈빛으로 여소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왜 그런 호의를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다 필요 없소. 충분히 혼자서 할 수 있으니까.”
상천의 말에 여소정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인지 어이없다는 의미인지 애매모호한 웃음이었다.
“군더더기를 없애는 건 살을 붙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에요. 그걸 혼자 할 수 있다고요?”
그녀의 물음에 상천이 씻으러 가며 말했다.
“가능하오. 지금까지 뼈에 살을 붙여온 게 바로 나니까.”
그렇게 말하며 우물가로 사라지는 상천을 보며 여소정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장여진과 여소정은 떠날 채비를 했다.
환대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렵게 준비한 돈을 전해줄 수 있었다는 데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서 떠나려고 준비하는 지금의 마음은 많이 편해져 있었다.
“가시게요?”
그나마 두 사람을 편하게 대해주었던 공혜가 다가와 그녀들에게 물었다.
“네. 이젠 돌아가야죠. 먼 길 떠나야 되니.”
장여진이 웃으며 공혜에게 말했다.
“고마웠습니다.”
여소정이 공혜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공혜도 마주 허리를 숙였다.
“이제 가볼게요.”
“네. 조심해서 가세요.”
합산도문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장여진과 여소정이 떠나기 위해 정문 쪽으로 향했다.
“오라버니! 가신대!”
그녀들의 뒤를 따르며 공혜가 크게 소리쳤다. 얼른 나와서 배웅하라는 뜻이었다.
“괜찮아요. 부르지 마세요.”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 가신다는데 집 주인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말한 공혜가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치고는 ‘아침 댓바람부터 어디 간 거야?’라며 중얼거렸다.
“놔두세요. 괜히 수련이라도 하고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되죠.”
장여진의 말에 공혜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홀로 그녀들을 배웅했다.
“잘 있어요.”
“네. 다음에 또 오세요.”
공혜가 환하게 웃으며 떠나려는 그녀들에게 말했다.
“…네. 그럴게요.”
장여진도 그런 공혜에게 마주 웃어주며 대답했다.
백룡문을 떠나는 두 사람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
상천이 구해준 상인이 왔다 간 지 열흘, 그리고 장여진과 여소정이 다녀간 지 나흘이 지났다.
상천과 낭호는 숲길을 걷고 있었다.
낭인 생활을 하다가 산적 두목이 되어 현상금으로 은자 두 냥이 붙은 오천언을 잡기 위함이었다.
봇짐장수들이 주로 다니는 산길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정보를 들은 터라 지금 현재 산길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어느 곳에 출몰한다는 소문은 있지만 산채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고, 오천언이 사용하는 무기와 무공이 상당히 까다로워 관군들이 애를 먹고 있었다.
물론 큰 도시의 관군들이었다면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았겠지만 자그마한 마을에 있는 몇 안 되는 관군들로는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오천언이 두목이 된 후로 산적들도 제법 체계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산적들이 제대로 무공도 익히지 못한, 말 그대로 뒷골목 한량 수준이라고 해도 머릿수가 있으니 낭호와 상천 두 명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때문에 낭인 활동을 하던 오천언의 명성을 듣고 상천이 도전을 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려 하고 있었다.
“이쯤인 것 같군.”
한참 걷던 낭호가 중얼거렸다. 얼핏 보면 평범한 숲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꺾인 나뭇가지가 있다든지, 사람들이 자주 밟아 눌린 곳이 많다든지.
그런 것을 확인한 낭호가 상천에게 시선을 던졌다.
“오천언! 나와라! 그대에게 도전하러 왔다!”
상천이 숲 안쪽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사자후만큼은 아니었지만 목소리에 약간의 내력을 실어 멀리까지 퍼져 나가게 했다.
그렇게 소리친 상천은 낭호와 함께 잠시 동안 기다렸다. 일각 정도 기다려 보고 안 나타나면 한 번 더 소리칠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날까? 그자도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낭호의 물음에 상천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녹 형 말대로라면 그자는 괜한 자신감에 가득 찬 사람이라고 했어. 그러니 도전하러 왔다는 말에 도망치거나 숨지는 않겠지.”
“그래! 난 도망치거나 숨지 않는다!”
상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스럭 소리와 함께 오천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풉!’
숲을 헤치고 수하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오천언의 모습은 녹엽이 보여준 얼굴과 똑같았다. 순간 겉으로 웃음을 흘릴 뻔한 상천은 가까스로 참아냈다.
“오천언이오?”
“그래! 내가 오천언이다! 네가 감히 본좌에게 도전하겠다는 애송이냐?”
“본좌?”
오천언의 말에 상천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에 기분이 상한 오천언이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두 개의 낫을 쇠사슬로 연결한 기이한 무기였다.
“네놈이 감히 본좌의 말에 그런 반응을 보여? 죽고 싶은 게로구나!”
격앙된 오천언의 발언에 상천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낭호는 멀찌감치 자리를 비켜주었다.
“도전하러 왔으니 먼저 가겠소.”
스슥!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천이 움직였다. 숲 속이었지만 천유보를 이용해 전혀 지형적 불리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헛!”
갑작스럽고 빠른 상천의 움직임에 헛바람을 들이켠 오천언도 재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오천언이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보통의 싸움에서 뒤로 물러섬은 기세에서 밀림을 뜻하는 것이고 거기서 승부가 결정 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의 물러섬은 달랐다.
거리를 벌린 오천언이 한쪽 낫을 잡고는 사슬을 크게 휘둘렀다.
부우웅!
낫이 엄청난 속도를 내며 수직으로 상천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하지만 상천은 앞으로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빛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를 더 높였다.
파박!
상천의 다리가 힘차게 땅을 박찼다.
그와 함께 내력을 담은 상천의 검이 사슬을 향해 휘둘러졌다.
쐐에엑!
쩌엉!
허공을 가르는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들리고 바로 다음 순간 사슬과 검이 부딪쳤다.
상당한 위력이 담긴 공격이었지만 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대신 사슬이 검을 휘감아 낫의 방향이 꺾이며 이번에는 상천의 뒤통수를 찍을 듯 날아들었다.
스윽!
상천이 상체를 더 숙이며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검을 휘감은 사슬 때문에 방향이 바뀐 낫은 아슬아슬하게 상천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상천은 그대로 멈춰 섰다.
오천언과 상천 사이에 사슬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지는 순간 상천이 그대로 검을 잡아당기며 뒤쪽으로 번쩍 뛰었다.
“어어!”
오천언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으며 앞쪽으로 신형이 쏠렸다.
그 순간 상천은 검을 버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천유보를 이용해서 휘청거리는 오천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버리는 상천의 모습을 낭호는 표정의 변화 없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천언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인이 무기를 버리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아직 또 하나의 낫이 있지 않은가?
당황하기는 했지만 오천언은 곧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낫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온다면 그대로 찍어버릴 생각이었다.
‘지금이다!’
기회를 엿보던 오천언이 이때다 싶은 순간 있는 힘껏 낫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상천은 그 순간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앞으로 달려들던 속도가 있음에도 상천은 전혀 무리 없이 제동을 걸며 그 자리에 멈춰 버린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오천언은 다시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가 휘두른 낫은 허공만 가르고 있었다.
퍼퍽!
“크흑!”
어느새 주먹을 쥔 상천이 백룡권을 이용해 낫을 쥐고 있는 오천언의 팔을 연달아 두 번 가격했다.
지독한 통증에 오천언은 비명을 지르며 낫을 흘렸고, 상천은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상천의 눈에 완전히 무방비가 된 오천언의 가슴이 보였다.
퍼퍼퍼퍼퍽!
그의 가슴에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상천은 주먹을 풀고 손등으로 가슴팍을 연달아 가격했다.
“쿠엑!”
오천언이 요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주먹으로 친 것도 아니고 내력을 강하게 실은 것도 아닌지라 큰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누워서 고통에 신음할 정도는 되었다.
상천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함께 모인 산적들이 슬금슬금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천과 낭호의 무공이 상당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머릿수가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한 발자국만 더 움직여 봐. 싹 다 죽고 싶지 않으면.”
안 그래도 인상이 차가운 낭호가 살벌하게 말하자 산적들이 일순간 주춤했다.
“이대로 다들 떠나면 이놈만 관아에 넘기고 말겠다. 잘 생각해 봐.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어진 낭호의 말에 주춤거리던 산적들 중 몇몇이 그대로 뒷걸음질 치며 도망쳤다. 그러자 다른 산적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낭호가 피식 웃는 사이, 상천이 오천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와 함께 갈 곳이 있소.”
“크으… 어, 어디냐?”
오천언이 연신 통증이 올라오는 가슴팍을 문지르며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