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55화 (55/141)

#055화.

무더운 운남의 날씨 속에서 장세진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무진 앞에 나타났던 사람들과 같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이런 우라질!”

장세진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미 다른 뇌격대원들은 당한 지 오래.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처음 이들이 나타났을 때 장세진은 장무진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잔뜩 구겨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 일격에 불길함을 느낀 장세진은 대원들에게 산개를 명하고 후퇴했다.

하지만 그들은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대원들을 하나둘씩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산개하고 도망쳐 그들을 떼어놓으려 애썼지만 이곳의 지형을 훤히 꿰고 있다는 듯 끝까지 따라붙었다.

‘형님!’

미친 듯이 도망치던 장세진은 장무진과 질풍대를 떠올렸다.

뇌격대가 습격을 받았다면 질풍대 역시 같은 상황일 가능성이 높았다.

장무진이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장세진은 믿음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경쟁의식을 가지고 무공 수련을 해오기는 했지만 언제나 자신은 장무진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힘들어도 장무진은 충분히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촤아악!

한참 도망치던 장세진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그의 뒤를 따르던 무인들도 일정 거리를 두고 그에게 도를 겨눴다.

“네놈들, 누구냐?”

“…….”

장세진의 물음에도 그들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장세진이 싸늘하게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도를 허공에 몇 번 빙빙 돌렸다.

“날 죽이겠다고? 너희도 살아남길 바라지 마라.”

그렇게 말하며 장세진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

***

며칠 후.

“문파가 어려운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생각한 것 이상입니다.”

장여진과 여소정이 허름한 장원 앞에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곳곳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장여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뭇머뭇 거리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자.”

아이들이 연무장에 모여 앉아 규화공을 운기하고 있는 사이, 상천과 녹엽은 대청마루에 앉아 무언가 그려진 종이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놈이 이런 쪽으로 빠질 줄은 몰랐는데…….”

“아는 사람이오?”

“원래 같은 낭인이었어. 그리 잘나가지는 못했지만.”

녹엽의 말에 상천은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 종이에는 한 사람의 용모파기가 그려져 있었고, 현상금으로 은자 두 냥이 걸려 있었다.

“허! 낭인 망신 다 시키는 놈! 하고많은 일 중에 산적 두목이 뭐야, 산적 두목이?”

녹엽이 열불 터진다는 듯 화를 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아는 대로 다 알려주시오.”

“그래. 꼭 잡아라, 요놈.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애들 때문에 안 되겠다.”

녹엽이 연무장에서 운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힐끗 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싫어하더니 며칠 지나면서 아이들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진 녹엽이었다.

“요놈, 요 오천언(吳仟彦)이라는 놈은 말이지 얼굴이 요렇잖아?”

그렇게 말한 녹엽이 양손으로 눈꼬리를 아래로 내린 뒤 아래턱을 주걱턱처럼 쭉 내밀었다.

“풉!”

그 얼굴을 본 상천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게 생겼지?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이놈 앞에서는 웃지 마라.”

“왜 웃으면 안 되오?”

“이놈이 생긴 건 요래 웃기게 생겼어도 성격 하나는 개차반이란 말이지. 게다가 요놈 생긴 것만큼이나 무기도 요상해서 여간 상대하기 까다로운 게 아니야. 이놈이 그나마 낭인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 요상한 무기 때문이지.”

“음…….”

상천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끼이익!

그때, 정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직 일을 나갔던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의아한 눈빛으로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다시는 볼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얼굴이 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만이에요.”

장여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장여진의 얼굴을 본 상천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굉장히 사나웠다.

가만히 서서 몸을 부들부들 떨던 상천이 크게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오는 것이오!”

잔뜩 화가 난 목소리에 장여진과 여소정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가시오.”

상천이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녹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나가라고 했소.”

장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계속해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 상천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스릉!

“송장이 되어 나가고 싶소?”

상천이 검을 뽑아 들며 물었다. 그리고는 장여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분위기가 살벌하게 흘러가자 녹엽이 서둘러 상천의 팔을 붙잡았다.

“참아!”

“놓으시오.”

상천이 서늘하게 말했다. 상천의 살기 어린 눈빛에 움찔한 녹엽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녹엽을 뿌리친 상천이 장여진에게 똑바로 걸어갔다.

그러자 여소정이 한 손에 도를 움켜쥐고 상천의 앞을 막아섰다.

“무례하군요. 백룡문에서는 손님을 이렇게 맞이합니까?”

“손님? 지금 손님이라고 했소?”

상천이 냉소를 띠며 그녀에게 검을 겨눴다.

“죄를 뒤집어씌우고 고문을 하는 것도 모자라 거짓 자백을 받아내 무고한 사람을 죽인 자를 손님이라 하오?”

상천의 말에 장여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우릴 베겠다는 겁니까?”

“내가 본 강호는 그런 곳이오. 비정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곳이 강호라면 적어도 내가 받은, 그리고 우리가 받은 고통을 돌려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소.”

상천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겉으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서 알 수 있었다.

“정 그렇게 나오시겠다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여소정이 들고 있던 도를 상천에게 겨누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녹엽은 차마 말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때 일을 하고 돌아오던 공혜가 지금 이 상황을 보았다. 그러자 녹엽이 반색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혜야! 잘 왔다. 좀 말려봐라!”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오라버니, 왜 그러고 있어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무서워하는 공혜를 상천은 애써 무시하고 여소정을 노려보았다.

“그만하게.”

방 안에 있던 서기종이 나오며 말했다. 그러자 녹엽이 잔뜩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뭐하다가 이제 기어나오는 거야!”

화난 녹엽의 호통을 서기종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는 장여진에게 말했다.

“돌아가시오. 이곳은 백룡문이고 문주님께서 나가라 하셨으면 아무리 손님이라도 돌아가는 게 맞는 것 아니겠소?”

서기종의 말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장여진이 말문을 열었다.

“드릴 것이 있어서 왔어요.”

“그게 무엇이든 받고 싶지 않소.”

장여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천이 싸늘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들의 대치를 잠시 보고 있던 서기종이 상천에게 다가가 물었다.

“일단 얘기나 들어보는 게 어떻겠는가?”

“그러기 싫소.”

하지만 상천은 단호했다. 이 이상 한 발자국도 안으로 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냥 들여보내자는 게 아니네. 저들이 안으로 들어오면 몸 성히 나가지 못할 각오를 해야 될 걸세. 나도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어이없고 화가 나니까.”

서기종의 목소리에도 분노가 실려 있었다.

장여진과 여소정, 그리고 상천과 서기종은 한 방에 앉아 있었다. 낭호는 그들이 보기 싫다면서, 녹엽은 숨이 막힌다며 밖에 있었다.

방 안에 모여 있는 네 명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공혜가 차를 준비해서 가지고 들어올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네 사람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치를 살핀 공혜는 잔뜩 경직된 분위기 속에 서둘러 방을 나왔다.

공혜가 방에서 나오자 밖에 있던 배동삼이 후다닥 달려가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 누나! 안에 사람들 누구야?”

“낸들 아니?”

공혜의 퉁명스런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동삼은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두 사람 다 엄청 예쁘던데! 천이 형은 대단하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찾아오고. 그것도 두 명이나!”

배동삼의 말에 기분이 나빠진 공혜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시끄럽고. 넌 나랑 애들 밥 하는 거나 도와.”

“왜?”

배동삼의 물음에 공혜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애들 먹는 양이 늘었어. 나 혼자 다 하기에는 버겁단 말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도와.”

“쳇! 알았어.”

배동삼은 툴툴거리면서도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상천이 있는 방을 바라보던 공혜도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공혜가 따라주고 간 차가 반쯤 식어 미지근해졌을 무렵.

상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왔소?”

그의 차가운 한마디가 장여진의 가슴을 찔렀다.

잘 지냈느냐고 안부라도 물었으면 좋았으련만, 지난날의 일 때문에 상천은 아직도 그녀를 차갑게 대하고 있었다.

“잘… 지냈나요?”

“보면 알 것 아니오?”

이번에도 상천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에 여소정은 울컥했지만 장여진을 봐서 참았다.

두 사람 사이의 냉기에 서기종은 숨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상천의 싸늘한 말투에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장여진이 여소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작은 목함 하나를 꺼내 놓았다.

“받으세요.”

“싫소.”

상천의 말에 입술을 깨문 장여진이 목함을 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분 몫이에요.”

장여진이 열어 상천 앞으로 민 목함에는 은자 여덟 개가 들어 있었다. 장여진이 장우량에게 받아낸 은자 다섯 냥에 자신이 아껴두었던 은자 석 냥을 더해 가져온 것이다.

그것을 본 상천이 다시 장여진에게 목함을 밀었다.

“이미 끝난 얘기요. 필요없으니 가지고 돌아가시오.”

상천은 단호했다.

서기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상천은 아예 장여진에게서 비스듬히 돌아앉아 있는 상태였다.

“돌아가시오.”

“갈 수 없어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장여진을 상천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오. 이곳 백룡문의 문주로서 축객령을 내린 것이지.”

상천의 싸늘한 대답에 장여진은 두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뭔가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장여진이 똑바로 상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갈 수 없어요.”

단호한 대답에 상천은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가라고 했소.”

상천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긴 한마디가 장여진에게 날아들었다. 서기종은 긴박한 분위기에 나서지는 못하고 그저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장여진은 상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 지금까지 계속 문주님과 싸워가며 받아낸 돈입니다. 그러니 받아주십시오.”

여소정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부탁하듯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서기종이 나섰다.

“몇 달 전 일일세. 분한 일이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차라리 이것 받고 깔끔하게 끝내는 게 좋을 듯싶네.”

서기종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상천이 목함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받긴 하겠소. 이걸로 모든 계산은 끝난 듯하니, 앞으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소.”

상천의 말에 장여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용건은 다 끝난 듯하니, 떠나주시오. 좋게 얘기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오.”

그녀들을 곧바로 내보내려는 상천에게 서기종이 나직이 말했다.

“이걸 받음으로써 다 끝난 일이니 내일 떠나게 하는 게 어떻겠는가? 때론 문주는 감정보다는 한없이 차가운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네.”

“후우…….”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라도 끌어내고 싶었지만 서기종의 말처럼 이제는 냉철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좋소. 내키지는 않지만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날이 밝거든 바로 떠나시오. 내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배려요.”

그렇게 말한 상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