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54화 (54/141)

#054화.

근래의 일이 있어 상인도 사방을 경계하며 걷고는 있었지만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따라붙는 무림인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일다경 정도의 시간 동안 상인을 관찰했을 때, 문득 상인이 멈춰 섰다.

그 앞에 쇠막대기 하나를 든 누군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누, 누구시오?”

상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 앞에 나타난 사내는 섬뜩한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달빛에 드러난 사내의 얼굴과 방에 붙은 인상착의가 같음을 확인한 상천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서기종이 그를 붙잡았다.

“아직.”

“자칫 저 상인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갑자기 달려들면 도망칠 수도 있네. 물론 잡으려 한다면 잡을 수 있겠지만 좀 더 확실한 기회를 포착해야지.”

서기종의 말에 상천은 불안한 표정으로 상인을 바라보았다. 녹엽과 낭호도 나서지 않은 것을 보면 그들도 같은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품에 든 거 뭐지?”

“뭐, 뭐냐니! 아무것도 없소!”

“거짓말.”

그렇게 말하며 사내가 점점 상인에게 다가갔다. 겁을 먹은 상인은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너무 두려운 나머지 오금이 저려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어이쿠!”

결국 상인은 제 다리에 걸려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사내는 더욱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상인에게 다가갔다.

“크크크! 거봐, 거짓말하니까 그렇게 되지. 얼른 품에 든 거 내놔!”

그렇게 말하며 사내가 쇠막대기로 상인을 내리치려 했다.

퍽!

“크악!”

그때 시커먼 무언가가 날아와서 사내를 쳤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사내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고꾸라졌다.

“괜찮으십니까?”

빠르게 달려와 그대로 사내를 발로 걷어찬 상천이 쓰러져 있는 상인을 보고 물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인은 갑작스런 상천의 등장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사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상천에게 걷어차인 가슴팍 부분에 상당한 통증이 있는 듯했다.

“누, 누구……!”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천은 빠르게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주먹을 쥐고 그의 복부를 몇 차례 두들겼다.

퍼퍼퍽!

“크헉!”

사내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복부에서 시작되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한 사내가 그대로 주저앉았고, 이를 지켜보던 서기종과 낭호, 녹엽이 나타나 사내를 포박했다.

“괜찮으십니까?”

세 사람이 범인을 포박하는 사이 상천이 다시금 넘어져 있는 상인에게 물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천이 넋이 나가 버린 상인에게 다가가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상천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일어선 상인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포박을 당하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방금 전의 공포가 다시 떠올랐는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걸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그럼 전 이만…….”

상인이 대충 대답하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녹엽이 멀어지는 상인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구만?”

“경황이 없어서 그렇겠지.”

“아무리 그래도!”

녹엽이 툴툴거리자 상천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분한 표정으로 포박을 당한 사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관아로 가죠.”

그렇게 말한 상천이 앞장서서 관아로 향했고, 서기종과 낭호, 그리고 녹엽이 포박한 사내를 끌고 그 뒤를 따랐다.

다음날.

간밤에 현상범을 잡은 네 사람은 이례적으로 늦잠을 잤다.

육체적으로 크게 힘든 것이 없었지만 그동안 현상범 한 명을 잡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피곤이 몰려온 까닭이었다.

오시 초가 다 되어 네 사람 중 상천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잠이 덜 깨어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난 상천은 밖으로 나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을 본 공혜가 한심스럽다는 듯 상천을 바라보았다.

“문주라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 거야?”

공혜의 한마디에 상천이 곧바로 입을 다물고는 민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밖에 나오는 바람에 그녀가 있는 것을 못 본 상천이었다.

“일 안 갔어?”

“오늘 쉬는 날.”

그렇게 말한 공혜가 한쪽에 마련된 기다란 빨랫줄에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피곤해서 그렇지 뭐.”

그렇게 말한 상천이 공혜 옆으로 다가가 함께 빨래를 널었다.

“다른 아저씨들은?”

“아직 자.”

올해 열여덟 살이 된 공혜는 서기종과 낭호, 녹엽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그녀에게 녹엽은 계속해서 오라버니라 부르라고 했지만 결국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에효. 누가 여기를 문파라고 생각하겠어?”

공혜의 지적에 상천이 민망한 표정으로 말없이 빨래를 널었다.

“흐아암!”

그때 녹엽이 방에서 나왔다.

기지개를 켜고는 잠시 그 자리에 눈을 감고 서 있던 녹엽이 잘 떠지지 않는 두 눈을 껌뻑이며 잠을 쫓았다.

“일어났소?”

상천이 빨래를 널며 물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눈을 껌뻑인 녹엽이 함께 빨래를 널고 있는 상천과 공혜를 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녹엽의 한마디에 공혜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고, 상천은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실없는 소리 아닌데? 진짜 잘 어울린다고. 그렇게 나란히 서서 빨리 널고 있는 걸 보니 부부 같구만, 뭘.”

녹엽의 말에 공혜는 더욱 수줍어했고, 상천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속 그렇게 이상한 말 할 거면 들어가서 더 주무시오.”

“난 이상하게 한 번 일어나면 잠이 잘 안 오더라고. 그나저나, 먹을 거 좀 없나? 자고 일어나니까 허기진데.”

녹엽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때마침 빨래를 다 넌 공혜가 주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아저씨. 금방 차려올게요.”

“얼씨구?”

평소의 공혜였다면 늦잠 잤으니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했을 텐데 순순히 차려주겠다고 하니 녹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만약 녹엽이 방금 전에 했던 ‘둘이 잘 어울린다’, ‘부부 같다’라는 말을 안 했다면 알아서 차려 먹으라고 했겠지만 기분 좋은 말을 해주었기에 그에 대한 보답이었다.

끼이익!

“안에 계십니까?”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백룡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 녹엽에게 걸어가던 상천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

백룡문을 찾은 사람을 보고 상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로 어젯밤 구해주었던 그 상인이었던 것이다. 관아에 가서 어제 그 현상범을 잡은 사람을 물어 백룡문까지 찾아온 것이다.

“아니, 여기는 어떻게 아시고.”

상천이 그에게 다가가며 당황스런 표정으로 묻자 상인이 대뜸 허리를 굽혔다.

그에 더 당황한 상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때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이거, 받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상인이 두툼한 무언가를 상천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상천이 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좀 더 일찍 나섰어야 하는 건데…….”

“아이고, 아닙니다! 목숨 건졌으니 전 그걸로 만족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상인이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상천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제가 소를 잡아 고기를 팝니다. 감사의 의미로 조금 가져왔습니다. 저녁때 국에라도 넣어 잡수시라고…….”

상인이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소고기였다. 그에 상천이 그것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런 거 받으려고 한 것 아니니 가져가서 아저씨 드세요. 저희는 나름대로 현상금도 챙겼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하죠.”

“받아두게.”

어느새 다가온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머쓱해하며 상인에게 내밀었던 고기를 다시 받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상인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히고는 서둘러 백룡문을 나섰다.

“조심해서 가세요!”

상천이 멀어지는 상인에게 외쳤다.

그리고는 그가 주고 간 고깃덩어리를 보며 민망함과 기쁨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거봐. 어젠 경황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했지?”

서기종이 한쪽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녹엽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날 저녁.

백룡문 사람들은 큼지막한 고기가 듬뿍 들어간 국을 먹을 수 있었다.

***

운남성에는 점창파가 있다.

구파의 일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점창파가 자리 잡고 있기에 예전부터 운남은 점창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사도련이 득세한 이후, 판세가 바뀌었다.

당연히 점창의 세력이라 생각됐던 운남에 사도련의 일익인 합산도문이 점차 팔을 뻗기 시작한 것이다.

점창과의 무력 충돌은 없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점창의 입장에서는 할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는 말이었다.

무림맹이 사도련의 득세를 어느 정도 묵인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고, 그동안 자신들의 위치에 안주해 왔던 점창이 무섭게 기세를 타고 성장하는 사도련과 맞서기에는 무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세력권을 어느 정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무력 충돌 없이 양립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운남의 사 할 정도가 합산도문의 세력권으로 넘어갔다.

***

아직 정오가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운남의 날씨는 벌써부터 더웠다.

“덥군. 무복을 좀 얇은 것으로 준비할 걸 그랬어.”

장무진이 연신 땀이 흐르는 이마에 손부채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된 시기였지만 운남의 날씨는 마치 초여름 같았다.

장무진의 뒤를 따르는 이십여 명의 질풍대원들 역시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힘들어 하고 있었다.

“비선문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한 시진 정도만 더 가면 됩니다. 조금 서두르면 그 정도까지는 안 걸릴 수도 있을 겁니다.”

질풍대 부대주인 홍원창(洪苑槍)의 말에 장무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중간에 어디 냇가라도 있으면 좀 담그고 가지. 땀내 풍기면서 갈 수는 없지 않겠나? 합산도문 체면도 있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몇 명 먼저 보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냐, 아냐.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그냥 가다 보면 나오겠지. 반 시진쯤 전에 지나친 강가에서 좀 씻을 걸 그랬군.”

장무진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럼 조금 서두르겠습니다.”

“그러지.”

그렇게 말하며 장무진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나마 숲이 밀림처럼 우거져 있긴 하지만 사람 다닐 길은 어느 정도 닦여 있었기에 이동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뒤따르던 홍원창이 장무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대주님.]

[나도 알아. 일단은 모른 척해.]

전음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질풍대원들 모두가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당겨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반 각 정도 더 걸어가던 장무진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점점 짙어지는 살기의 농도가 더 이상 모른 척 넘어가 주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와라!”

장무진이 화난 듯 소리쳤다.

하지만 주변에는 온갖 벌레들 소리, 바람 소리, 동물들 소리 같은 자연 발생적인 것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른 나와!”

장무진의 얼굴에 사나운 표정이 피어올랐다. 그 뒤에 있는 부대주 홍원창을 비롯한 질풍대원들 역시 어느새 한 손에 도를 움켜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출수할 수 있는 자세였다.

“부단주.”

“예!”

“잡아와. 싹 다.”

“알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질풍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 대원들을 보며 장무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있는 작은 돌멩이 두 개를 주워 들었다.

핑! 핑!

장무진이 돌멩이 두 개를 양손 검지와 엄지 사이에 끼고 가볍게 튕겼다.

퍽! 퍽!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날아간 돌멩이가 무언가를 부순 듯했고, 때마침 지독한 혈향이 날아들어 장무진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럼 그렇지. 감히 합산도문의 질풍대에게 살기를 뿌리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장무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하지만 미소 띤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데에는 반 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장무진의 주변으로 검은 무복에 복면을 쓴 자들이 하나둘 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 손으로 질풍대원들의 시체를 질질 끌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장무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분노.

대원들의 시체를 보며 장무진은 차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장무진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고정되었다.

자신과 비슷한 덩치를 가진, 시체를 들지 않은 복면 쓴 사내였다.

“네놈이 날 상대할 건가?”

장무진이 싸늘하게 물으며 손에 든 도를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복면 쓴 사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덤벼봐. 네놈에게 십이잔혼도의 위력을 보여주마.”

장무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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