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득이 되는 사람을 좋아하고 따르는 법이지.”
낭호의 말에 상천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한차례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낭호가 한심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딜 가나 나쁜 놈들은 있다. 그런 놈들은 꼭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마련이지. 생각해 봐라. 나한테 피해를 주는 그런 놈들을 누가 쫓아내 준다면 어떨지.”
낭호의 말에 상천은 그제야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곳은 반월도문의 영역입니다.”
그러자 녹엽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까 저 녀석이 그랬잖아, 나쁜 놈은 어디든 있다고. 반월도문, 아니, 사도련의 영역이든 무림맹의 영역이든 나쁜 놈들이 없을 수는 없어. 그리고 그런 놈들 목에는 현상금이 제법 걸려 있는 경우도 많지.”
녹엽의 말에 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두 마리 토끼는 못 잡는 경우도 많지만 못 잡으라는 법은 없잖아? 그 얘길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녹엽을 보며 상천도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왜 이런 얘기를 꺼냈는지 아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녹엽이 불러서 방에 들어와 지금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정작 그 의도는 모르고 있는 상천이었다.
“자네가 허락한다면 우리도 이곳에서 자네에게 도움을 좀 주고 싶어서 그러네.”
서기종의 말에 상천은 놀란 듯 입까지 벌린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뭐, 우리가 백룡문의 무공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닌데다가 낭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라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보고 들은 게 있으니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녹엽의 말에 상천은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들이 있다면 그런 부담을 좀 덜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다른 부분은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이런 조언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일인가?
“허락하겠나?”
“물론입니다. 당연히 허락하지요.”
상천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낭호가 지나가는 식으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
“밥값 한다 생각해라.”
그렇게 말한 낭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하여간 저놈도 딱딱하기는. 쯧쯧쯧!”
녹엽이 낭호를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는 상천을 보며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문주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상천이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었다.
며칠 후.
상천은 서기종, 낭호, 녹엽과 함께 저잣거리로 향했다.
관아에서 현상범들을 잡는다는 방을 붙이는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잣거리에 도착한 네 사람은 관아에서 붙여놓은 방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첫 시작부터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저놈 어때?”
녹엽이 방 하나를 가리켰다.
동전 오백 문의 현상금이 걸린 그 현상범은 최근 수금을 해서 돌아가는 상인들을 폭행하고 돈을 빼앗아 달아난 죄목을 가지고 있었다.
“오백 문이면 너무 적군.”
낭호의 말에 녹엽이 고개를 저었다.
“동전 천 문이 은자 한 냥이니 그렇게 약한 것도 아니지. 게다가 처음이잖아, 처음. 그러니 일단 간단한 놈부터 처리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저놈이 딱이야, 딱.”
녹엽이 강력하게 추천했다. 낭호나 서기종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상천은 녹엽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좋아. 저놈으로 하기로 하고……. 문제는 저놈을 어디서 찾느냐 하는 건데 말이지.”
녹엽이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목표는 정했는데 출몰 지역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거봐. 이것저것 잘 따져 보고 해야지. 관아에서 못 잡고 현상금을 내거는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는 거다.”
서기종의 핀잔에 녹엽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런 잔소리 할 시간 있으면 방법 좀 생각해 봐!”
“생각하고 있다.”
녹엽의 윽박을 가볍게 받아 넘긴 서기종이 상천을 보며 물었다.
“가진 돈 좀 있는가?”
“예?”
“우리가 찾기 어려우면 나타나게 만들어야지. 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의아해하는 반응에 서기종이 덤덤히 말했다. 그러자 녹엽이 손뼉을 치며 물었다.
“그러니까 돈 보따리로 그놈을 유인해서 잡아버리자 이거지?”
“이제야 머리 좀 돌아가는군.”
서기종의 말에 녹엽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째려보았다.
“있긴 합니다만 많지는 않습니다.”
“액수가 중요한 건 아니네.”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잡는다면야 상관없지만 만약 놓친다면 전 재산을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낭호가 입을 열었다.
“굳이 돈으로 유인할 필요가 있나?”
“그럼 뭐로 유인해?”
녹엽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낭호가 한심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놈이 우리가 들고 있는 걸 돈으로 믿게끔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그, 그렇긴 하지.”
녹엽의 대답에 낭호가 바닥에서 돌멩이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이거면 충분하지.”
“돌멩이? 그거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주머니 안에 들어 있으면 이게 돈인지 돌멩이인지 어떻게 알겠나?”
“소리가 다르잖아, 소리가! 짤랑짤랑 하는 소리랑 덜그럭덜그럭 소리가 같냐?”
녹엽의 말에 낭호가 말을 덧붙였다.
“대장간 같은 곳에 가면 자투리로 남은 쇠붙이들 있을 거다. 그거 몇 개 넣고 돌멩이로 묵직하게 만들면 끝 아닌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 대장간에서 자투리로 남는 쇠를 줄 것 같아? 그런 것도 다 재활용하지?”
“빌리는 거지. 고이 가져다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그리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낭호와 녹엽의 논쟁이 계속되자 그것을 말리려는 듯 서기종이 불쑥 끼어들었다.
“낭호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괜히 위험부담을 크게 가져갈 필요는 없겠어.”
“위험부담이 안 크다니? 괜히 잘못되기라도 하면 물어줘야 된다고. 그러다가 더 큰 돈 나갈 수도 있어!”
“잡자는 건가, 말자는 건가?”
녹엽의 말에 낭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 뭐, 이리하든 저리하든 똑같은 거 같은데 편한 대로 해.”
녹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쨌든 현상범 사냥의 첫 번째 목표가 정해졌다.
그날 밤.
네 사람은 다시 저잣거리로 향했다.
상천의 손에는 묵직한 주머니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낮에 낭호가 말한 대로 대장간에서 얻어온 쇠붙이와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쇠붙이의 무게만 해도 두 근은 되는데 거기에 돌멩이까지 들어 있었으니 제법 무게가 나가는 주머니였다.
주머니를 들고 저잣거리에 도착하자 상천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저잣거리를 상천이 주머니를 들고 지나가고, 나머지 세 명은 그가 잘 보이는 곳에 있다가 혹여 상천이 그를 놓칠 것 같으면 협공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상대가 무림인도 아니고 질 나쁜 일반인에 불과해 상천이 놓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처음 해보는 일인만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흩어지자 상천은 연기를 하며 천천히 저잣거리를 걸었다.
아무도 없는 저잣거리를 홀로 지나가려니 괜히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상천은 주머니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괜히 히죽거리며 웃기도 하면서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안 보이는 곳에 숨어서 상천을 지켜보고 있는 나머지 세 사람이 내심 감탄할 정도였다.
‘안 나타나나?’
그렇게 연기하며 상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배지까지 나붙은 상황이니 이제 이곳에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꼭 오늘 또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상천은 어느새 저잣거리 끝에 다다랐다. 이제는 민가로 연결된 또 다른 길이 보이고 있었다.
‘안 나타나는 건가?’
결국 그날은 수배범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닷새가 지났다.
네 사람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밤마다 저잣거리를 돌아다녔지만 범인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네 사람은 대낮부터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그냥 다른 놈 잡을까?”
녹엽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놈 잡으려고 쏟아부은 시간이 얼만데?’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내 생각에 그놈은 상인들의 수금 일을 전부 파악해 두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못해도 상인들 얼굴은 전부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럼 지난 닷새 동안 저잣거리에 나오지 않았다는 건가?”
녹엽의 물음에 서기종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지. 수금 일을 알고 있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나타났다면 모르는 얼굴이니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수도 있지.”
서기종의 분석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예 이 근방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간 경우밖에는 없었다.
“그럼 그놈을 잡으려면 상인들이 수금에 나서는 날밖에는 없겠군.”
낭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녹엽이 서기종을 보며 물었다.
“상인들한테 미리 얘기를 해둬야 하나?”
“아니. 굳이 그럴 필요야 있나. 수금이 얼마 안 남은 상인을 찾고 우리는 몰래 뒤따르면 돼.”
서기종의 말에 잠자코 있던 상천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상인들이 수금 날짜를 알려주겠습니까? 자칫 우리가 범인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게?”
상천의 말에 녹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서기종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수소문해 봐야겠지. 오해를 받는다면 그놈을 잡아 아니라는 걸 증명하면 될 일이고.”
“후우……. 일단 한번 해보자고!”
낭호의 말에 녹엽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네 사람은 다시 의기투합했건만 상황은 생각했던 것만큼 쉽게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최근 들어 수금 일에 폭행을 당하고 돈을 빼앗기는 일이 생기자 두려움 때문인지 절대 입 밖에 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소문을 해봐도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자 네 사람은 궁여지책으로 며칠 간 저잣거리에서 잠복을 하기로 했다.
녹엽이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애초에 강력 추천을 했던 사람이 자기 자신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세 사람의 뜻에 따랐다.
그렇게 잠복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술시 말쯤 되니 저잣거리에 사람도 없었고 날도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달빛이 있어 어느 정도 사물 분간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상천은 서기종과 함께, 녹엽은 낭호와 함께 각기 다른 곳에 숨어 저잣거리를 살피고 있었다.
“오늘은 나타나겠습니까?”
“모르지. 그나마 월말이라 수금을 다니는 상인들이 제법 있으니 기대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상천의 물음에 서기종이 저잣거리 곳곳을 살피며 대답했다.
그때, 불이 켜져 있던 상점 한 곳의 불이 꺼지며 상인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최근의 일 때문에 대부분의 상점이 해지기 전에 문을 닫는 상황이었지만 그곳은 일이 늦어졌는지 제법 늦은 시간에 문을 닫고 있었다.
“어이쿠! 너무 늦었네. 서둘러야겠어.”
상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상인이 품에 무언가를 꼭 안고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상천과 서기종뿐만 아니라 녹엽과 낭호도 그 상인을 예의 주시했다.
“우리도 움직이죠.”
“그러지.”
상인이 점차 멀어지자 상천과 서기종도 그 뒤를 은밀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