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날이 따뜻해지자 수련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귀주성의 기후 자체가 맑은 날보다는 적당히 흐린 날이 많아 너무 햇볕이 내리쬐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무장 위에는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배동삼이 있었고, 다른 아이들도 곳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정해진 수련 시간이 아니었지만 무공을 익힌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운 모양인지 시간이 날 때면 다들 수련에 매진했다.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단월검 수련에 흠뻑 빠져 있는 배동삼에게 연무장 한쪽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녹엽이 한마디 했다.
“얌마, 아직도 모르겠어? 그게 아니라니까? 잘 봐봐. 여기서 검을 이만치 더 들어야 된다고. 넌 처지잖아! 그럼 힘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된다니까?”
“아저씨는 단월검 모르잖아요. 그럼 빠져요.”
녹엽의 충고에 배동삼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 인마?”
“천이 형이 그런 말을 하면 또 몰라.”
배동삼이 툴툴거리자 녹엽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 몰라도 알아!”
“몰라도 안다고요? 세상에 그런 말도 있어요? 모르면 모르는 거지 몰라도 안다니.”
녹엽의 말에 배동삼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은 상천이 크게 한마디 했다.
“동삼아! 맞다! 거기서 너무 처지면 안 돼!”
“아, 그래?”
상천의 말에 배동삼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옆에 서 있던 녹엽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봐, 인마! 안댔지?”
“쳇!”
의기양양한 녹엽의 말에 배동삼이 입을 빼쭉 내밀며 다시 검법 수련을 시작했다.
몇 번 더 옆에서 보다가 잔소리를 늘어놓던 녹엽이 연무장에서 내려와서는 상천에게 다가갔다.
“저놈 저거 제법 하는데?”
“가장 소질있는 아이요.”
상천의 말에 녹엽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배우고자 하는 열의도 높고, 수련할 때의 집중력도 뛰어났다. 무엇보다 즐길 줄 안다는 것이 배동삼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열의와 집중력, 자세가 좋으니 실력이 쑥쑥 늘어나는 것도 당연했다.
“안타깝구나! 무공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면 대단한 고수가 될지도 모를 일인데.”
녹엽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가 비록 절정에 이르지 못한 실력이지만 나름대로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다 자부하고 있으니, 그런 그의 입에서 칭찬이 나왔으면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녹엽의 말에 상천은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 되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속이 꽉 찬 달 하나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맑디맑은 밤하늘에 달 혼자 외롭지 않게 별들이라도 옆에서 반짝일 법도 하건만 홀로 너무나 밝게 빛나는 달 때문인지 야속하게도 별들은 하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너무 밝은 달빛은 백룡문의 연무장 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밤임에도, 횃불 하나 켜지 않았음에도 사물을 분간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연무장 위에 상천이 홀로 서 있었다.
과거 장여진이 사주었던 청강검 한 자루를 비껴든 채.
새하얀 달빛 아래 검 한 자루를 들고 서 있는 상천의 모습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아…….”
상천이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와 이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핫!”
짤막한 기합성과 함께 상천의 검이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딱히 내력을 운용하지 않은 듯 보임에도 그가 펼쳐 내는 검법은 상당한 위력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천이 펼쳐 내는 검법은 단월검이었다.
하지만 청운대에 속해 있을 때 서기종이나 녹엽이 보았던 단월검과는 또 달랐다.
좀 더 살이 붙고 위력이 강해져 있었다.
이전까지 보이던 빈틈이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고, 이제는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위력적인 검법으로 발전해 나가는 단계였다.
“후읍!”
상천이 숨을 짧게 한 번 들이마셨다.
그전까지 한 호흡으로 단월검 전체 열 개의 초식 중 절반인 오초식까지 펼쳐 내고 재차 호흡을 한 것이다.
쒜에엑!
상천의 검이 다시 한 번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육초식 파석부터 마지막 초식인 역천까지.
단숨에 펼쳐진 단월검 후반부는 끝났음에도 여전히 허공에 그 자취를 남아 있는 듯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후우…….”
단 두 호흡에 풍성해진 단월검을 펼쳐 낸 상천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무리인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은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만히 서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믿을 수 없군. 그새 또 달라졌어. 처음 봤던 자네 검법과 지금의 검법은 전혀 다른 것 같군.”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상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연무장 밑에는 서기종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하. 안 주무셨습니까?”
“자다가 깼네.”
연무장 밑으로 내려오며 던진 상천의 물음에 서기종이 짧게 대답했다.
“혹시 저 때문입니까?”
상천의 물음에 서기종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밝군. 하늘도 맑고.”
서기종의 말에 상천도 하늘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게 말한 상천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계속해서 연무장을 환하게 비추던 달이 살짝 몸을 틀어 두 사람을 비추고 있는 듯했다.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어떻게 된 건가?”
잠시 침묵하던 서기종이 상천에게 물었다. 그러자 상천은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일전에 낭호에게 말한 것과 같은 건가?”
이어진 질문에 상천은 청운대에 몸담고 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낭호와의 비무, 그리고 외출해서 술잔을 기울였던 때를.
“뭐, 비슷합니다.”
상천의 대답에 서기종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더군.”
상천이 서기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눈앞에 어떤 상대를 그려놓고 가상의 비무를 하는 수련. 절정에 이른 고수들 정도면 그런 것은 우습게 한다던데.”
“하하! 전 절정에 이른 고수가 아닙니다.”
상천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자네가 절정이라는 말을 한 적은 없는데. 뭐, 절정의 고수가 아니라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니 낭호에게 했던 말은 그러려니 하면 되겠지만……. 자네의 검법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이건 단순히 수련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야. 아예 다른 검법이 되어 있으니. 재창조라고 해야 할까?”
재창조라는 말에 상천은 손사래를 쳤다.
“재창조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조금 살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게 재창조지.”
상천의 말에 서기종이 짧게 대꾸했다. 그러자 상천은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살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쉽지,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법. 아니, 이해도가 높아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 대종사 급이 아니라면…….”
“잠깐!”
상천이 서기종의 말을 황급히 끊었다. 서기종의 눈에 자신이 단월검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대단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얘기가 커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대종사라니…….’
“너무 커지는 것 같은데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상천의 대답에 서기종이 피식 웃었다.
“대단한 일을 대단한 일이 아니라 말하는 자네가 더 대단하군.”
“하…….”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 들어가 다시 자야겠어. 자네도 그만하고 들어오게. 그러다가 고뿔이라도 걸리면 문주 체면이 서겠나?”
그렇게 말한 서기종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그맣게 들리던 녹엽의 코 고는 소리가 서기종이 문을 열자 크게 들렸다가 닫음과 동시에 다시 작아졌다.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상천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다음날.
점심을 먹고 모두가 쉬고 있을 시간.
녹엽이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상천을 불렀다. 그에 방 안으로 들어간 상천은 모여 있는 서기종과 낭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소?”
“앉아봐.”
상천의 물음에 녹엽이 자신의 옆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상천은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았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말문을 연 것은 서기종이었다. 그에 상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듣고 싶네.”
질문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천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녹엽이 부연설명을 했다.
“말 그대로야. 어떻게 할 거냐고. 문파에 계속 남아 있을 건지, 아니면 돈 벌러 또 떠날 건지. 남아 있을 거면 뭘 할 건지, 떠난다면 뭘 해서 돈을 벌 건지.”
녹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상천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멀리 떠나는 것은 힘들 것 같소.”
상천의 대답에 서기종과 녹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낭호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럼 남아서 뭘 할 건가? 문파를 일으켜 세울 건가?”
서기종의 물음에 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럴 생각입니다. 거창하게 키우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해 봤는가?”
서기종의 물음에 상천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까닭이었다.
“사실… 아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기만 하고.”
상천의 대답에 서기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라고는 하지만 상천은 이제 곧 스물한 살이 되는, 모든 면에서 미숙할 수밖에 없는 어린 나이였다.
그럼에도 이 정도까지 유지해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문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뭔지는 알고 있나?”
“돈과 사람, 명성 아닙니까?”
상천이 과거 장여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그럼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이어진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상천이 짧게 대답했다.
“돈.”
“아니.”
상천의 대답에 서기종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때, 녹엽이 불쑥 끼어들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이지. 사람이 있어야 구색을 갖출 수 있거든. 근데 사람은 어떻게 모으겠어? 명성이 있어야 한단 말이지. 물론, 명성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녹엽의 말에 서기종과 낭호, 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있다면 사람을 고용할 수는 있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돈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온전히 내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어. 사람은 마음으로 얻는 것이고, 명성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서기종의 말에 상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명성을 얻는 일.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우리가 나가는 무투대회는 작은 명성을 얻기에는 좋네. 하지만 거기서 끝이지. 무투대회에 나오는 무인들을 사람들은 동경하거나 좋게 보지 않네. 거긴 무림에서도 밑바닥이니까.”
그 말에 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돈을 벌 목적으로 무투대회에 나가려고 하기는 했었지만 그를 통해 어느 정도 명성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무투대회 기간 동안 호사가들의 입에 제법 많은 무인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세 명도 그런 무인들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상천이 답답함을 그대로 담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