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합산도문에서 벌어진 일은 조용히 퍼져 나갔다.
어차피 해결된 일.
시끄럽게 떠들 것도 없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는 정도로만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져 나갔다.
한 가지 더 붙은 말이라고 한다면 ‘왜 하필 합산도문인가?’ 하는 점이었다.
사도련이 결성되고 그들의 세력이 안정세에 접어든 이후, 합산도문은 상대적으로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합산도문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호의 이야기를 제법 오래 듣고 산 사람들이라면 합산도문처럼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곳이 훨씬 더 무섭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어떤 간 큰 이가 합산도문을 건드렸고, 결과는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합산도문이 사도련의 일익이며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퍼져 나간 소문은 이내 사그라졌다.
그러나.
무림의 복잡함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렇게 치부하고 말았지만 사도련의 다른 문파들을 달랐다.
합산도문을 포함한 나머지 문파들은 이번 일이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흘러온 무림의 역사가 알려주지 않던가.
그들의 모든 시선이 합산도문에 집중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달라졌다.
청운대의 존재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정도로 미미했다.
다시 말하면 청운대가 생겼다가 해산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합산도문 내의 분위기는 분명 예전과는 달라졌다.
위화감.
평소 평온하던, 그리고 때론 즐겁던 합산도문 내의 분위기를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은 거대한 문파 전체를 위화감이 뒤덮고 있었다.
아니, 위화감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어떤 무거움.
그것도 단순한 무거움이 아닌 기분 나쁜 무거움이었다.
***
질풍대와 뇌격대는 합산도문 내 최고의 무력 부대였다.
질풍대주 장무진(張茂秦)과 뇌격대주 장세진(張世進)은 각각 장우량의 장남과 차남으로 어려서부터 무공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대단했다.
게다가 타고난 재능까지 있어 아직 서른이 안 된 나이임에도 상당히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형제간이지만 어려서부터 서로에 대한 경쟁의식이 강했던 그들은 무공 수련에 있어서도 그런 기질을 발휘했고, 각각 질풍대와 뇌격대를 맡고 있는 도중에도 서로에게 지기 싫어하는 경쟁의식은 발휘가 되었다.
때문에 질풍대원들과 뇌격대원들 역시 혹독한 수련을 해야만 했고, 합산도문 최고의 무력 부대라는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장무진과 장세진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버지이자 문주인 장우량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란히 걷고 있는 장무진과 장세진은 일단 체격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장무진은 육 척에 가까운 큰 키에 몸집도 있어 말 그대로 거대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반면 장세진은 오 척이 조금 넘는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언뜻 체격만 생각하면 장무진은 선이 굵은 남자다운 외모를, 장세진은 동글동글한 외모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스물아홉 살이 되는 장무진은 이십대 초반의 외모를, 장세진은 본래 자신의 나이대인 이십대 후반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왜 부르셨을까?”
“글쎄요. 딱히 이유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나란히 걸으며 장무진과 장세진은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경쟁의식이 심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제간의 우애가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둘 사이의 우애는 좋았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밖에 나가는 거로요. 도대체 언제까지 본산 내에만 있어야 하는 건지……. 답답해 죽겠습니다.”
장세진이 불만을 터뜨렸다.
한창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을 나이지만 대외 활동을 할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이래저래 쌓인 것이 많았던 것이다.
장무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뭐, 아버지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시겠지. 들어가자.”
장우량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에 들어간 두 사람은 집무실 책상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장우량이 자신들을 쳐다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그렇게 서 있자, 장우량이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왔느냐? 거기 앉아라.”
“예.”
장무진과 장세진이 나란히 의자에 앉자 장우량이 입을 열었다.
“너희에게 임무를 맡길 생각이다.”
“임무… 입니까?”
장세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 임무. 운남에 좀 다녀와야겠다.”
“무슨 일 있습니까?”
운남까지 가게 되었다고 들뜬 모습을 보이는 장세진과 달리 장무진은 진지하게 물었다.
“딱히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운남 쪽 세력은 지부만으로는 버겁다는 판단이 들어 별일 있나 없나 순찰이나 한 번 돌고 오라는 게다. 문파들 돌면서 들여다보고 오면 된다.”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장무진의 물음에 장우량이 큰 관심 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뭐, 너희 편할 때 출발해도 좋다.”
“내일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장우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세진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장세진에게 장우량이 진지한 어조로 당부했다.
“큰 위험이 따르는 임무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 할 게다. 알겠느냐?”
“옙!”
씩씩하게 대답하는 장세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잔뜩 번져 있었다. 반면 장무진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가보거라. 군사에게 가면 자세한 경로와 지시 사항을 알려줄 게다. 출발하기 전에 기별이라도 넣고.”
“예.”
장무진과 장세진이 집무실을 나갔다.
그들을 내보낸 장우량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
쾅!
장여진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으며 처소로 돌아와 침상에 그대로 엎어졌다.
곧바로 따라 들어온 여소정이 조심스레 문을 닫고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장여진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청운대는 해체되었지만 그녀는 남화대로 돌아가지 않고 장여진의 곁에 있었다.
장여진의 처소에 들어온 여소정은 침상 곁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상관과 수하의 관계일 때에는 그녀와 함께 앉기를 꺼렸던 그녀였지만 청운대가 해산된 이후 언니, 동생처럼 지내자는 장여진의 간곡한 부탁에 예전보다 그녀를 편히 대하고 있었다.
물론 말투는 변하지 않았지만.
“또 안 된다고 하시네.”
엎드려 있다가 바로 앉아 그렇게 중얼거린 장여진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여소정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것뿐이었다.
“아버지 말씀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어.”
장우량의 논리는 간단했다.
그 안에서 사건의 주범이 나타났고, 정확한 원인과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것을 다 떠나서 그들이 합산도문에 와서 한 것이라고는 먹고 자는 것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대한 하나의 문파를 이끌어 나가는 문주라면 분명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장여진은 가릉이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거짓 자백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지시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도 많이 커져 있었다.
“대원들 행적은 안 놓쳤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악해 두고 있습니다.”
여소정의 대답에 장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받아낼 거야.”
떠난 청운대원들이야 돈 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겠지만 장여진은 자신 혼자 한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그것이 대주로서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얘기 들으셨습니까? 질풍대와 뇌격대가 운남으로 임무를 받아 떠난다고 합니다.”
“임무? 운남으로?”
“예.”
여소정의 말에 장여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질풍대와 뇌격대가 출정을 나갔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가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라고 만든 부대가 아니니까.”
“이참에 아가씨께서도 바람 좀 쐬고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소정의 물음에 장여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나갈 수 없어. 그리고 밖에 나가도 딱히 갈 곳도 없어.”
“그래도…….”
“조금이라도 받아낸 다음에 당당하게 나갈 거야. 지금은 그럴 수 없어.”
단호한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청운대 사건이 있고 석 달이 지났다.
날이 따뜻해졌건만 장여진의 요구는 계속해서 거절당하기만 하고 있었다.
보통 그런 시간이 오래 지나면 지날수록 포기하게 마련이지만 장여진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고집은, 그리고 꼬장은 정평이 나 있지 않던가.
물론 장우량의 분위기가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많이 달라졌기에 예전과 같은 꼬장을 선뜻 부리기 어려웠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은 여전했다.
아침에 일어나 세안을 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은 장여진은 거울을 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답답한 마음에 내뱉는 한숨이 아닌 굳은 의지를 다지는 그런 한숨이었다.
장여진은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처소를 나섰다.
장우량의 집무실을 찾았던 장여진은 아직 그가 처소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그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우량의 처소에 도착한 장여진은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일각 정도 기다리자 장우량이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
처소에서 나오자마자 장여진을 본 장우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하루가 멀다 하고 장여진과 계속해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더 이상 할 말 없다.”
싸늘하게 말한 장우량이 장여진을 뒤로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이를 악문 장여진이 곧장 그 뒤를 따랐다.
집무실에 도착한 장우량은 장여진이 따라 들어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자신의 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버지.”
“…….”
장여진의 부름에도 장우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호한 그의 모습에 장여진은 최후통첩을 날렸다.
“좋아요. 아버지 말씀, 따르겠어요.”
장여진의 말에도 장우량은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순순히 고집을 꺾을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빌려주세요, 은자 열여섯 냥.”
장여진의 말에 장우량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빌리면 어떻게 갚을 셈이더냐? 은자 열여섯 냥이면 우리 합산도문에도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인데.”
장우량의 물음에 장여진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뭐든 하겠어요.”
“좋다. 그런 네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
장우량의 물음에 장여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곧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난 이러이러한 것을 할 수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것 봐라.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어떻게 갚겠다는 말이냐?”
그렇게 말한 장우량이 다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저도 무공을 익힌 무가의 여식이에요.”
“무공을 익혔으면 뭘 하느냐? 써먹질 못하면 다 소용없는 일이다.”
장우량의 말에 장여진이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뭐든 맡겨보세요. 잘 해낼 자신 있어요.”
그녀의 말에 장우량이 바로 앉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맡겨 달라고?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는구나. 네게 일을 맡겼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니더냐?”
“그게 제 탓인가요?”
반항심리가 발동한 장여진이 장우량에게 대드는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장우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하를 받아들일 때에 고려해야 할 점이 몇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신상 파악이지.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고 이상한 것이 있다면 결격 사유다. 넌, 제대로 했느냐?”
“…….”
“사람을 뽑는 데 무공만 보고 뽑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이미 그때부터 잘못된 것이다.”
장우량의 말에 장여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가릉은 범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그 고통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장여진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참아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잖아요.”
“시행착오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 일과 그럴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그 일은 단순히 시행착오로 받아들이고 넘기기 어려운 일이다.”
“잘할 수 있어요, 전.”
“그 믿음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궁금하구나.”
그렇게 말하는 장우량은 장여진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거둔 듯 보였다.
“후우…….”
장여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일 년 동안 사용하는 돈이 대략 은자 다섯 냥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거라도 가불해 주세요.”
장여진의 말에 장우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게 나오는데 더 이상 거절했다가는 어찌 될지 몰라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다. 가불해 주마. 어디에다 쓸지 뻔하지만 이걸로 끝이다.”
장우량의 허락이 떨어지자 장여진은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처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