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숙소에 들어가 쓰러지듯 몸을 눕힌 그들은 상처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곯아떨어졌다.
그러던 그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숙소의 문이 열리고 장여진과 여소정이 들어섰다.
그리고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난장판 속에서 그대로 잠든 대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잘못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장여진의 중얼거림에 여소정이 안쓰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고집부려서 만든 청운대잖아. 애초에 그런 생각을 안 했으면… 이들도 밖에서 자유롭게 지내고 있겠지.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울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자유로운 생활. 그런 자유를 포기하고 왔는데… 결과는 이런 거야. 내 잘못이야.”
자책을 하는 장여진을 보며 여소정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급하려던 돈은 준비됐어?”
“그게…….”
여소정이 말끝을 흐렸다. 장여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야 했다.
“문주님께서 지급을 취소하셨습니다.”
“뭐?”
장여진이 놀란 듯 여소정에게 물었다.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로 다가오니 참으로 암담했다.
“미안해요.”
잠들어 있는 대원들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린 장여진이 이를 악문 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숙소 안에 다시금 정적이 찾아들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청운대원들이 하나둘씩 눈을 떴다.
고문을 당한 몸으로 그냥 잠들었기 때문인지 어제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고, 몇몇은 죽을 듯 숨을 헐떡였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일어나. 움직이기 힘들어도 일어나.”
녹엽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자 대원들이 하나둘씩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떠나자.”
그렇게 말한 녹엽이 간단하게 짐을 챙겨 들고는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다른 대원들 역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억지로 숙소 밖으로 나갔다.
아직 동이 제대로 트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어두웠다.
하지만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합산도문의 정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이 가까워 오고,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이 보였다.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무사들은 동이 채 뜨기도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오자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누구냐!”
“나가려는 사람.”
무사들의 말에 서기종이 짧게 대답했다.
“소속을 밝혀라!”
“소속? 그딴 것 없다. 그러니 비켜라.”
서기종이 살기를 담아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대원들이 몸에서 살기를 뿜어냈다.
성치 않은 몸이지만 지금 기분은 앞을 막아선 이들을 죽이고서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소속을 밝혀라. 안 그러면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다른 무사가 나직이 말했다. 그때 상천이 나섰다.
“해체된 청운대원들이오. 신원 확인이 필요하다면 대주를 불러주시오.”
상천의 말에 무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상천의 눈빛에는 엄청난 인내심이 담겨 있었다.
청운대원들이 정문에 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장여진은 자다 깬 부스스한 상태로 대충 옷만 걸치고는 서둘러 달려갔다.
정문에 도착한 그녀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대원들을 발견했다.
“기루에 가서 시원하게 한판 뜨고 싶은데 이런 몸이라 가지도 못하겠고…….”
“난 어디 가서 진창 마시고 뻗고 싶다!”
“크크크! 그러다가 몸에 난 구멍으로 술 다 빠져나올라.”
잠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장여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모두들…….”
그녀의 등장에 무사들은 황급히 예를 차렸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대원들은 그녀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말았다.
“다들 지금 떠나려는 건가요? 그 몸으로는…….”
장여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천이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떠날 생각이니 문이나 열어주시오.”
냉랭한 그의 말에 장여진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치료도 하고 돈도 가지고 가세요. 네?”
“치료는 나가서 하면 되고 돈은 받고 싶지 않소.”
상천의 말에 다른 대원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런 것은 다 필요없었다.
돈을 원했다면 처음 녹엽이 떠나자고 했을 때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장여진은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어서 열어주시오.”
단호한 상천의 말에 장여진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녀가 정문 경계를 맡은 무사들에게 말했다.
“열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장여진의 말에 무사들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고요한 아침에 합산도문의 정문이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열렸다.
문이 열리는 동안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선 대원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정문 밖으로 나갔다.
장여진은 정문을 빠져나가는 그들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그녀를 향해 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끼이이이익!
청운대원이 모두 정문 밖으로 나가자 거대한 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장여진은 문이 모두 닫힐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합산을 내려온 대원들은 상천을 포함한 네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더 이상 이곳에 있기 싫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찾아 떠났다.
남아 있는 상천과 서기종, 녹엽, 낭호는 아무 말 없이 모여 서 있었다.
“자네는 이제 사문으로 돌아가겠지?”
“그렇소.”
상천이 짧게 대답하자 녹엽이 나머지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다들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지.”
서기종의 말에 녹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냥 어디로 갈 건가 해서 그러지.”
그렇게 말하는 녹엽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합산도문에 갔던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그곳에서 험한 꼴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원들끼리는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네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상천이 깼다.
“다들 딱히 갈 곳이 없으면 백룡문으로 가는 게 어떻소?”
“오잉?”
상천의 제안에 녹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되나?”
서기종의 물음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가장 빨리 시작되는 무투대회가 귀주성에서 열리지 않소? 그러니 백룡문에서 머물다가 참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상천의 말에 녹엽은 재빨리 찬성 의사를 밝혔다.
“괜찮은데?”
“하지만 사문과 미리 얘기가 된 건 아니지 않나? 미리 연락을 넣어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도 그러네.”
서기종의 말에 녹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걱정 마시오.”
“음?”
상천의 말에 세 사람 모두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
청운대가 해체되고 대원들이 그렇게 떠난 후.
장여진은 하루하루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칩거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장우량을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떠난 청운대원들에게 돈이라도 챙겨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 여소정으로 하여금 떠난 단원들의 행적을 놓치지 않게 지시를 해놓은 상태였다.
장여진은 그녀 나름대로 합산도문 내에서 마지막까지 청운대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청운대원들이 떠나고 나흘째 되는 날 밤.
장우량은 지하 뇌옥에 갇힌 가릉을 찾아갔다. 죽이기 전에 직접 만나 그 이유를 듣고자 함이었다.
가릉은 독방에 갇혀 있었다.
감찰단에서 갇혀 있던 독방보다 더 지독한 곳이었다.
반듯하게 누울 수도 없는 좁은 공간, 엄청난 습도, 그리고 사람을 미치게 만들 것 같은 어둠.
가릉은 그런 곳에 있었다.
털컹! 끼리리릭!
복도에서 일렁이고 있는 횃불의 빛마저도 완벽하게 차단하던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갑작스레 들어오는 빛 때문에 가릉은 한동안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모두 나가 있어라.”
“예!”
낯선 목소리. 가릉은 가늘게 실눈을 뜨고 손으로는 빛을 가리며 고개를 들었다.
“네놈이냐?”
가릉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말할 힘도 없을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무엇이냐?”
“…이유가… 알고 싶소?”
가릉이 겨우겨우 힘을 짜내 말했다. 그러자 장우량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말해라.”
그의 말에 가릉이 미소를 지었다.
섬뜩한 미소를.
장우량이 가릉과 독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럼에도 독방의 문은 닫히지 않았다.
그가 나오는 것을 확인한 간수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죽었다. 그러니 치워라.”
“예?”
간수가 놀라 물었다. 날이 밝으면 사형을 집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치워라.”
“예, 알겠습니다.”
간수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본 장우량이 간수를 지나쳐 걸어갔다.
집무실로 돌아온 장우량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갈위를 한번 쳐다보고는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아무것도 불지 않았다.”
장우량의 대답에 갈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죽었다. 시체는 치우라고 일러두었다.”
“예?”
장우량의 말에 갈위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물었더니 자결을 하더군.”
장우량의 말에 갈위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결을 할 것이라면 진작 하지 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이제 와서 자결을 한단 말인가?
“이대로 그냥 사형을 당하려 했던 모양이네. 그러다가 내가 와서 이것저것 캐물으니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야.”
갈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장우량이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냥 이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니, 시체의 목을 치고 공표하라. 합산도문을 건드리면 이렇게 된다고.”
“…알겠습니다.”
갈위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조금은 과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장우량의 분노가 깊은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 시진 후.
합산 초입에 있는 합산도문의 첫 번째 문에 가릉의 목이 내걸렸다.
합산도문을 건드리면 이렇게 된다는 방과 함께.
가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장여진은 이를 악문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실망감과 분노, 원망, 그리고 두려움이 그렇게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합산도문에서 벌어진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났다.
***
어두운 밀실 안.
검은 복면을 쓴 사람과 흰 복면을 쓴 사람이 다시 만났다.
“첫 번째 단계가 끝났습니다.”
“다음 단계는 언제부터 시작할 셈인가?”
“이번 일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힐 때 즈음 시작될 겁니다.”
“차질없이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흰 복면을 쓴 사람의 대답을 들은 검은 복면이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 잠시 후,
흰 복면이 탁자 위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손가락으로 잡아 끄고는 역시 밖으로 나갔다.
***
합산을 떠나 백룡문으로 향하던 네 사람은 청천벽력 같은 소문을 들었다.
합산도문에서 벌어진 사건의 흉수를 잡았고, 그 흉수의 목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무서운 경고와 함께.
순식간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네 사람은 백룡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합산도문에 대한 악감정은 깊어졌지만 힘이 없어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슬프게만 다가왔다.
백룡문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