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전양지부에 본산에서 보낸 조사단이 도착했다.
무거운 분위기의 조사단이 도착하자 전양지부에는 또 한 번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부의 모든 무인들이 긴장해서 쭈뼛거리고 있는 동안 초운학만이 조사단을 맞이하고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최대한 웃는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여 제대로 된 조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사단원은 그런 초운학에게 미소 한번 지어주지 않고 무표정으로 조사에 임했다.
조사단의 조사도 청운대에서 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청운대보다는 조금 더 꼼꼼하고 세밀하게 조사에 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것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이틀의 시간이 더 흘렀다.
어두컴컴해진 밤.
이틀의 시간이 흘렀지만 조사단원은 찾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슬슬 조사단원 사이에서도 답답함이 차오를 무렵, 초운학이 조사단장을 불렀다.
고척방이 사용하던 집무실로 그를 부른 초운학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에게 차를 대접했다.
“뭐 좀 찾으신 것이 있습니까?”
“없소.”
딱딱하게 생긴 외모만큼이나 조사단장은 짧게 대답했다.
“서둘러 뭔가가 나와야 할 텐데 말입니다.”
초운학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에 조사단장은 아무런 말 없이 차를 마셨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별다른 대화 없이 차를 마셨다.
조사단장은 지부장의 방에 들어간 지 한 식경 만에 나왔다. 그 방을 나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그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
합산도문으로 돌아온 대원들은 비교적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생소한 경험이기는 했지만 낭인 생활을 하면서 숱한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척방이 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운대원 중 누군가가 죽은 것도 아니었고, 찝찝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제는 자신들의 손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합산도문에 도착한 지 열흘째 되는 날.
장여진이 그들을 찾아왔다.
연무장에 도열한 대원들의 표정이 생각보다 밝자 안심한 장여진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반대로 대원들은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장여진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자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혹시나 전양지부에서의 일을 아직 털어버리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말문은 장여진이 먼저 열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오늘은 여러분께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모았어요.”
안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몇몇 대원들은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하고 있었다.
“청운대를… 해체하게 되었어요.”
결국 청운대 해체를 선언한 장여진은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 자체가 너무 가혹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정작 대원들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아쉽기도 하고 다시 그리워하던 낭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이 공존하여 오히려 큰 감정의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덤덤함.
지금 대원들의 심정이 그랬다.
“미안해요. 대주로서 여러분을 끝까지 책임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네요. 괜히, 어떻게 보면 억지로 여러분을 데려다가 이것저것 하다가 안 되니까 그냥 내치는 꼴이 되어버렸어요.”
대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랬다면 자신들에게 그렇게 잘해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여러분에게 지급하기로 한 돈은 반드시 약속대로 지급할 거예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장여진이 말끝을 흐렸다. 석 달 가까이 함께 지내면서 많은 일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 식구라고 생각하며 지내왔고, 그런 그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아쉬움이 물밀 듯이 밀려온 까닭이다.
“…고마웠어요.”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대원들도 코끝이 찡해졌고, 아까보다 얼굴에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약속한 돈을 지급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그러니 며칠만 기다려 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장여진이 연무장을 벗어났다.
도열해 있던 대원들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밀실.
사방은 돌로 만들어진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그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철문이 붙어 있었다.
그나마 어둠을 밝히는 것이라고는 밀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탁자 위에 있는 촛불 하나가 전부였다.
공기조차 통하지 않을 것같이 꽉 막힌 밀실이었지만 촛불은 간간이 일렁이고 있었다.
끼리리리릭!
육중한 철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흰색 복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에서 보이는 부분이라고는 눈밖에 없었다.
“일 처리는?”
검은 복면을 쓴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흘러나온 목소리만 가지고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 후 딱 들어도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흰 복면을 쓴 사내의 대답이 이어졌다.
“잘 처리되었습니다.”
“고척방이 죽은 것 가지고 잘 처리되었다고 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본산에 혼란을 야기해 틈을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조사단은?”
“곧 돌아갈 겁니다. 이곳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으니 오히려 내부로 눈을 돌릴 겁니다.”
“그럼 위험하지 않겠나?”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아직 내부에는 우리 사람이 없으니까요.”
흰 복면을 쓴 사내의 말에 검은 복면의 사내가 고개를 한차례 갸웃거렸다.
“없다?”
“예. 이제 내부로 투입시킬 겁니다.”
“어떻게?”
“조사단이 이제 곧 돌아갑니다. 이미 그들에게 손을 써두었습니다.”
흰 복면을 쓴 사내의 말에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대답했다.
“아무튼 이번 일을 잘 처리했다니 일단은 믿지. 앞으로가 중요하니 더욱 신경 쓰도록.”
“물론입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이 밀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난 후 철문이 닫히자 심하게 일렁이던 촛불이 그대로 꺼져 버렸다.
***
장여진이 다녀가고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이틀 동안 대원들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밥 때 되면 밥 먹고 그 외에는 전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무공 수련도 하고 숙소에서 떠들기도 하면서 보냈겠지만 청운대가 해체되는 마당에 그렇게 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 쥐 죽은 듯이 지내고 있었다.
“하아……. 숨 막힌다, 숨 막혀.”
녹엽이 신세한탄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다른 대원들도 그 말에 심히 공감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돈 안 받고라도 나가고 싶다.”
가릉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녹엽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그냥 나가겠다고 하고 너 받을 돈 내가 받으면 안 되냐?”
“미쳤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녹엽의 말에 가릉이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쾅!
그때, 숙소 문이 열리며 낯선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합산도문 내의 사건을 조사하는 감찰단원들이었다.
“모두 끌어내라!”
“뭐, 뭐야!”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은 차가운 표정으로 청운대원들을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뭐야! 해체한다더니 이렇게 쫓아내듯이 버리는 거야?!”
밖으로 끌려 나가며 녹엽이 소리쳤다. 다른 대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행동에 심하게 반발했다.
“시끄럽다! 이번 전양지부에서의 일로 모두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 대원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뭐? 우리를 조사해? 지금 우릴 의심하는 거야?”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봤나!”
“괜히 애먼 사람한테 지랄들이야!”
청운대원들이 욕설을 퍼부어가며 거칠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들을 뿌리치기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한 사람에게 두 명이 달라붙는데 그 힘을 어찌 이기겠는가. 이건 비무나 싸움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시끄럽다! 아무런 죄가 없다면 조사를 통해서 그것을 증명하면 될 일!”
저항하는 청운대원들에게 감찰단원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결국 청운대원들 전부 다 감찰단으로 끌려갔다.
감찰단에서 청운대에 들이닥쳐 대원들을 모두 끌고 갔다는 소식을 들은 장여진은 화들짝 놀라 곧바로 장우량을 찾아갔다.
“아버지!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장우량의 집무실에 도착한 장여진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하지만 장우량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다. 열 낼 일이 아니야.”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라뇨! 어떻게 그들을 의심할 수 있죠?”
장여진의 물음에 장우량이 흔들림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럼 그들을 의심해선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더냐?”
“아버지!”
장우량의 질문에 장여진은 더 화가 났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들은 처음 이곳에 와서 저와 함께 지낸 사람들이에요. 만약 저를 해하려 했다면 굳이 그곳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어요!”
그녀의 대답에 장우량이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지냈으니 기회는 많았다? 그렇지 않다. 이곳은 합산도문이야. 그들 중 누군가가 이곳에서 일을 벌이고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을 듯싶더냐?”
장우량의 말에 장여진은 입을 꾹 다문 채 원망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도 벌일 때에는 절호의 기회를 찾게 마련이다. 만약 청운대 내부에 동조자나 배후가 있다면 청운대 해체와 함께 살아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해체는… 아버지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이에요.”
장여진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원들에 대한 미안함,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들의 대주로서 대신 느끼는 억울함이 물밀 듯 밀려왔다.
“그랬지. 그때는 충동적이었다. 너와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을 다시 해봤지. 만약 청운대 안에 동조자나 배후가 있다면?”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절대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야. 내부에 있던 자들과 달리 의도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뭐, 만약 그들이 무고하다면 이번 조사를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면 될 일이지. 그럼 그들은 약속대로 돈을 받고 이곳을 나갈 수 있다.”
장우량의 말에 장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여진은 몸을 돌려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청운대를 조사해 봐야 할 것 같다는, 전양지부에 가 있는 조사단의 서찰 한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