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문주님! 문주님!”
자신의 처소에서 오수를 취하고 있던 장우량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갈위의 다급한 목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었다.
“문주님!”
“들어오게.”
문 앞에 도착한 갈위의 목소리에 장우량이 그를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인가?”
“전양지부에서 날아온 서찰입니다.”
“서찰?”
갈위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단순한 서찰이 아님을 눈치챈 장우량이 굳은 얼굴로 서찰을 받아 읽어 내려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는 장우량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갔고, 나중에 가서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만큼 화가 난 것이었다.
“감히… 감히!”
장우량이 서찰을 구기며 소리쳤다.
“고척방 그놈이!”
“진정하십시오, 문주님.”
갈위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장우량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딸을 해하려 했다지 않은가?
“진정하게 생겼는가?”
장우량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더 큰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갈위는 잘 알고 있었다.
“오기 전에 먼저 조사단을 꾸려 곧장 전양지부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도착하면 좀 더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후우…….”
장우량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청운대는 여진이가 회복하는 대로 곧장 불러들이게. 그리고 전양지부와 가장 가까운 지부가 어디지?”
“평과(平果)지부입니다.”
“그럼 조사단이 도착해서 조사를 끝낼 때까지 평과지부에서 전양지부의 업무까지 맡아서 하라 이르고, 빠르게 전양지부에 보낼 새로운 지부장을 선별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청운대는… 해체하도록 하고.”
“하지만 아가씨께서…….”
장우량의 말에 갈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하지만 장우량은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자르며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오래 끌고 갈 조직도 아니었어. 그 아이 성화에 못 이겨 만드는 것을 허락해 주기는 했지만.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언젠가는 없어질 조직이었고,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시기가 앞당겨진 것일 뿐이네.”
단호한 장우량의 말에 갈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청운대가 돌아오는 대로 그리 전하겠습니다.”
“나가보게.”
장우량의 말에 갈위가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하는 장우량의 손에 있던 서찰은 어느새 불타 사라지고 없었다.
***
장여진이 정신적 충격을 어느 정도 털어내고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한 것은 사건이 벌어지고 사흘이 지난 후부터였다.
그전까지는 마치 심한 몸살을 앓는 사람처럼 조금만 움직여도 인상을 찌푸리고 무엇을 하든 기운이 없어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충격을 이겨낸 듯했다.
장여진이 쉬고 있는 방으로 여소정이 들어왔다. 침상에 누워 있던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대주님, 본산에서 귀환 명령을 내렸습니다.”
장여진이 어느 정도 충격을 털어내고 나서야 여소정이 장우량의 명령을 전달했다.
예상을 했다는 듯 장여진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조사단은 언제 도착 예정이야?”
“사흘 정도 후면 조사단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럼 우리는 조사단이 도착하면 출발하자.”
“그것이…….”
여소정이 말끝을 흐리자 장여진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무슨 문제 있어?”
“대주님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곧장 출발하라는 명령입니다.”
그 말에 장여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쨌든 이곳 사람들은 지부장을 잃은 상태잖아. 많이 혼란스러울 텐데 지금 우리가 빠져 버리면 저들은 어떻게 해?”
“어제부터 가까운 평과지부에서 사람이 와서 수습 중입니다. 기존에 지부장을 보좌하던 사람이 대부분의 업무를 파악하고 있어 빠르게 수습되고 있습니다.”
여소정의 말에 장여진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걱정되는 마음이 공존했다.
“고 지부장은… 절대 충동적으로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야. 본산에 있을 때 나 때문에 고생을 조금 하기는 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분명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거야.”
“하지만…….”
여소정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장여진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증거는 없겠지. 하지만 분명 배후는 있어. 내 직감이야. 알지? 내 직감 꽤 잘 맞는 거.”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사단이 와도 배후가 있다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을 거야. 당사자인 고 지부장이 죽었으니 더더욱 그렇겠지. 하지만 정말 배후가 있다면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곳에 계셔서는 안 됩니다.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렇겠지. 대원들도 위험할 수 있고. 알았어. 대원들 준비시켜. 준비 끝나면 바로 출발하자.”
“알겠습니다.”
여소정이 대답하고 밖으로 나가자 장여진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
한 남자가 예전의 그 방 침상에 똑같이 앉아 있었다.
창문을 등진 채 침상에 앉은 그 남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들이 오늘 떠난다고 합니다.”
앉은 채로 가면을 쓴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예전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창가에 남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역시나 음침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계획대로 된 건가?”
“그렇습니다. 고척방이 죽었으니…….”
“한데 고척방이 죽은 걸로 큰 효과가 있겠는가?”
“충분합니다. 장여진과 연관이 되었으니. 본산에서는 난리가 났을 겁니다. 틈은 그럴 때 생기는 법이죠.”
가면을 쓴 사내의 말에 창가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물었다.
“조사단이 온다고 하던데.”
“그들이 와도 상관없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될 테니.”
“알겠네.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어.”
“물론입니다. 이미 준비는 끝났습니다.”
가면을 쓴 사내의 말이 끝났음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가면의 사내는 역시나 이번에도 한동안 가만히 침상에 앉아 있었다.
***
청운대원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첫 임무를 맡았다는 설렘과 오랜만에 밖에 나왔다는 기쁨을 안고 이곳 전양지부까지 왔건만 돌아갈 때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미해결 사건을 조사하러 왔다고 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별일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미해결 사건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해결 사건이 발생했다.
아니, 표면적으로는 이미 해결된 일이었다.
고척방이 살인을 시도했고, 그것이 미수로 돌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배후가 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우발적인 단독 범행이었다.
이보다 깔끔한 결론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전양지부를 떠나기 위해 채비를 하는 청운대 대원 중 밝혀진 대로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분명이 누군가가 뒤에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 긴장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을 모두가 다 가지고 있었다.
며칠 후에 도착할 조사단이 와서 조사를 하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찝찝함은 지울 수가 없었다.
“다들 준비 끝났나?”
“예.”
확인 차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온 여소정의 물음에 대원들이 대답했다. 이번 일 때문인지 대답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것을 잘 아는 여소정도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준비 끝났으면 서둘러 나오도록. 곧바로 출발할 테니.”
그 말을 남기고 여소정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대원들도 각자 싼 짐을 들고 하나둘씩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자 그들이 타고 왔던 말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장여진과 여소정은 말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한 몇몇 전양지부 사람들과 업무 도움을 위해 파견을 온 평과지부 사람들도 나와 있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도 청운대원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이번 사건이 고척방의 우발적인 범행이 아닐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정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돌아가는, 어찌 보면 피해자의 입장인 청운대에게 그들 나름대로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대원들이 모두 말에 오른 것을 확인한 장여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배웅 나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괜히 저희 때문에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미안하네요.”
도리어 장여진이 사과를 하자 배웅 나온 사람들 중 한 명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고척방을 보좌하던 수하다.
“아닙니다. 오히려 대주님께서 큰일을 당하셨는데 사과라니요. 오히려 저희가 송구스럽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고개를 숙이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지요?”
뜬금없이 장여진이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제 이름은 초운학(楚運壑)입니다.”
“그렇군요. 이번 일로 많은 분들이 혼란스러우실 거예요. 그러니 많이 신경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초운학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제 가요. 가자, 부대주.”
“예. 모두 출발한다!”
장여진과 청운대가 전양지부를 떠났다. 찝찝함과 무거운 마음을 안고서.
‘아직 안 끝났어. 조만간 뭔가 벌어진다. 무언가가.’
전양지부를 떠나는 상천이 속으로 생각했다.
***
전양지부를 떠나 본산으로 돌아온 장여진은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소식을 접해야 했다.
다름 아닌 청운대의 해체.
장우량의 단호한 모습을 보니 이제는 애교나 고집이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청운대 해체 명령을 받은 장여진은 크게 반발했다.
그녀는 장우량의 말처럼 호기심에, 어린 치기로 청운대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의욕을 가지고 뭔가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자청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처음 낭인들을 불러들여 청운대를 구성하겠다는 장우량의 말에 화도 냈고 실망도 했다. 그래도 장우량의 말처럼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는 생각에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청운대다.
그리고 낭인들을 모아 만든, 열 명밖에 안 되는 인원이지만 나름대로 틀이 잡히고 그들도 합산도문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것을 보면서 내심 기뻤다.
그리고 이번 임무를 받아 전양까지 가는 동안 보았던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저마다의 사연을 들으며 더욱더 그들에게 잘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해체를 하라고 한다.
장여진은 이런 일은 강호 생활을 하면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 아니냐며 반발했다.
하지만 장우량은 단호했다.
몇 번을 안 된다고 했지만 장우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청운대는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