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고척방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보름 정도면 장여진과 청운대원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런데 이미 해결된 일을 미해결 사건으로 만들어놓을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불안한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집무실을 왔다 갔다 하는 고척방을 보며 그를 보좌하는 수하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부장님,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너라면 어떻게 하겠냐?”
“예?”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수하는 두 눈만 껌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끄악!”
하지만 애초에 수하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고척방이 미친 듯이 머리를 긁어대며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에,
‘저 양반이 미쳤나? 갑자기 왜 저래?’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수하는 이어진 고척방의 말 한마디에 깜짝 놀랐다.
“아가씨 오신단다.”
“예? 아가씨라면… 설마…….”
“그래! 꼬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 아가씨!”
“헉!”
수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들은 적은 엄청나게 많다.
자신이 정한 것을 관철시키는 능력은 최고라고 들었다.
좋게 말하면.
그렇지만 그 말을 바꿔보면 꼬장의 제왕이라는 뜻이다.
오죽하면 그 때문에 문주인 장우량도 고생한다는 소문이 들리겠는가.
오죽하면 고척방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지르고 있겠는가.
“그런데 왜 온답니까?”
“아, 몰라. 말도 하기 싫다. 내 책상 위에 있는 서찰 읽어봐.”
그 말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수하가 고척방의 책상으로 가서 서찰을 읽어보았다.
“최근 보고된 사건이라면… 낭인들끼리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치고받고 하다가 끝난 그거 말입니까?”
“그래.”
“그걸 미해결 사건으로 만들어놓으라고요?”
“그래.”
“현장 정리도 끝났는데요?”
“그래.”
“어떻게요?”
“그걸 내가 아냐!”
수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고척방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며칠 사이에 폭삭 늙은 것 같더라니……. 쯧쯧쯧!’
측은지심에 고척방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낸 수하가 그 역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몰라,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전보다는 제법 차분해진 말투로 고척방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다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리쳤다.
“왜 하필 여기냐고!”
***
합산도문을 떠난 청운대원들은 말 위에 앉아 시종일관 들뜬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파 안과 밖의 공기가 다르지 않을진대 마치 제대로 숨도 못 쉬었던 사람들처럼 연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그들을 보며 장여진은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들 좋아요?”
장여진의 물음에 녹엽이 답했다.
“어디 멀리 갔다가 집에 돌아온 기분입니다. 하하하!”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장여진이 아닌 주변을 훑고 있었다.
“대주님, 속도를 조금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장여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여소정이 뒤쪽 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그만 구경하고 속도를 높인다! 괜히 다른 데 정신 팔다가 낙마하는 사람 없게 조심하도록!”
그 말과 함께 장여진과 여소정이 먼저 속도를 높여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다른 대원들도 투덜거리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합산도문을 떠난 그들은 꼬박 두 시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렸다.
아무리 말 타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고 해도 두 시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무리한 일정이다.
하지만 워낙 들뜬 마음이 커서 그런지 누구 하나 힘든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두 시진이 넘어가면서부터 하나둘씩 힘든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둘째치고라도 장여진부터 힘들어했다.
그전까지는 주로 마차를 타고 이동을 했기 때문에 직접 말을 타고 다닐 일이 없었다. 본산 내에서 한 달에 대여섯 번씩 말 타는 연습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직접 말을 타고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대주, 이제 좀 쉬어 가야겠어.”
“알겠습니다. 모두 쉬어 간다!”
여소정의 외침에 대원들이 일제히 말을 세웠다. 넓은 관도를 지나 얕은 동산을 넘어가는 소로에 접어든 상태인지라 길을 꽉 막고 서 있는 격이었다.
“여기서는 좀 어렵겠지?”
“아무래도……. 사람들의 통행에 불편을 끼칠 겁니다.”
여소정의 말에 장여진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미안한데 부대주가 조금 수고를 해줄래? 근처에 쉴 만한 공간이 있는지 찾아봐 줘.”
“알겠습니다.”
대답한 여소정은 그나마 상태가 조금 나은 대원 두 명을 데리고 쉴 만한 곳을 찾아 자리를 떴다.
“자, 우리는 길 막지 말고 한쪽으로 물러서 있지요.”
장여진의 말에 남아 있던 대원들이 설설 말을 몰아 소로 한쪽으로 비켜섰다.
여소정과 두 명의 대원이 쉴 곳을 찾으러 간 사이 몇몇 사람들이 청운대원들 곁을 지나갔다.
지나갈 때마다 그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여진이 웃으며 대원들에게 농을 걸었다.
“여러분이 무서운 모양이네요. 호호! 하긴, 썩 좋은 인상들은 아니니…….”
그 말에 누군가가 발끈했다. 다름 아닌 가릉이었다.
“허, 대주님! 이래 봬도 마흔 가까이 살아오면서 인상 더럽다는 소리는 안 듣고 살아온 놈입니다?”
“어머? 전 콕 집어 누구라고 한 적 없는데요?”
“아!”
장여진의 말에 가릉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또 다른 대원 한 명이 말했다.
“괜히 찔려서는!”
“찔리긴 누가!”
“누구긴 누구야? 스스로 인상 더럽다고 생각하는 누구지.”
그 대답에 대원들 사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가릉의 웃음기없는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장여진도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옅은 미소만 짓고 있는 상천이 들어왔다.
장여진이 상천을 잠시 바라보고 있을 때, 쉴 곳을 찾으러 갔던 여소정과 대원 두 명이 돌아왔다.
“대주님, 약 일 리 정도 더 가면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가자고.”
“알겠습니다. 자! 어서들 가자! 일 리만 더 가면 된다!”
여소정의 말에 대원들이 다시 말을 몰았다. 힘들어하던 그들의 얼굴이 방금 전에 있었던 일로 조금은 밝아져 있었다.
여소정이 찾은 곳에서 한 식경 정도 휴식을 취한 장여진과 청운대원들은 또다시 두 시진 가까이 달렸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해 남녕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전에 도착한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 대원들은 크지 않은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탓에 객잔의 크기가 크지 않았다. 머릿수가 많지 않은 청운대원들이 각자 방을 하나씩 잡고 들어가면 빈방이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몇 개의 방에 손님이 들어가 있어 일인 일실은 불가능했고, 이 인 일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단체 손님을 받은 객잔 주인은 정신없어하면서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각자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간 대원들은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오면서 전부 툴툴거렸다.
그만큼 방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고, 침상도 하나밖에 없어 누군가 한 명은 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툴툴거리며 식당에 모인 대원들은 금방 나온 음식에 조금 기분이 풀린 듯 보였다.
방이 허름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객잔 주인이 미안한 마음에 식사에 신경을 쓴 것이다.
작은 객잔에서 얼마나 좋은 재료들을 구할 수 있었겠느냐마는 최대한 있는 재료 없는 재료를 탈탈 털어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내놓았다.
기대 이상으로 풍성하게 저녁 식사를 마친 대원들은 자연스럽게 술잔을 기울였다.
합산도문에 들어가 청운대원이 된 이후로 처음 마시는 술이었기에 다들 쉴 새 없이 목구멍으로 술을 들이부었다.
장여진과 여소정 역시 이번만큼은 자리를 피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어찌 보면 다소 거칠 수 있는 자리였지만 두 사람은 시종일관 웃으며 그들과 어울렸다.
장여진의 밝고 즐거운 모습이야 대원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여소정이 간간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대원들에게는 참으로 생소한 일이었다.
언제나 자신들의 앞에서는 무표정에 딱딱한 어투로 말을 했기에 차가운 인상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뭡니까?”
장여진의 물음에 대원들이 입을 다물었고, 녹엽이 살짝 혀가 꼬부라진 말투로 물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궁금해요. 낭인이라는 것만 알지 낭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모르거든요.”
장여진의 말에 대원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나 녹엽이었다.
“내가 먼저 얘기하지! 내가 말이지…….”
그때부터 과장이 심하게 섞인 녹엽의 일대기가 시작되었다. 듣고 있던 대원들은 환호도 보내고 야유도 하며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장여진과 여소정은 처음 듣는 낭인들의 세계에 큰 흥미를 보이며 이야기에 몰입했다.
녹엽의 이야기가 끝나고, 몇몇 대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빈 술병은 점차 늘어났고, 대원들은 하나둘씩 식탁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원들 중 서너 명 정도가 식탁에 코를 박고 잠이 들자 다른 대원 몇 명이 그들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상천과 녹엽, 서기종과 낭호, 그리고 장여진과 여소정뿐이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요.”
“시끄러우셨습니까?”
그전까지 별말 없이 있던 서기종이 장여진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건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술기운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대원들이 쏟아내는 열기에 그녀 역시 물들어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상천은 이곳까지 오는 내내 표정도 어둡고 말도 없네요? 즐겁지 않은가 봐요?”
합산도문을 떠나 지금까지 중간 중간에 상천의 안색을 살폈던 장여진이 상천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좀 웃어봐요. 다들 웃고 떠드는데 웃지도 않고. 이렇게 분위기 깨는 사람이 제일 꼴불견인 거 몰라요?”
짧게 대답하는 상천에게 장여진이 한마디 쏘아붙이자 녹엽이 냉큼 혀 꼬인 발음으로 그 말을 받았다.
“캬! 우리 대주님이 또 뭔가를 좀 아시네!”
그러더니 옆에 앉아 있는 상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이 녀석이 아직 어려서 뭘 잘 모르는 모양입니다. 하하!”
녹엽의 말에 피식 웃은 상천이 자신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그의 팔을 치우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오.”
“그런 놈이 오늘 하루 종일 웃은 거라고는 방금 살짝 웃은 거 한 번이냐?”
녹엽의 말에 상천은 더 크게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장여진이 걱정되는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첫 임무를 받아 떠나오고 나니 긴장되어 그런 모양입니다.”
상천의 말에 녹엽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 이제 보니 이놈, 이거 쫄았구만? 하하! 낭호랑 싸울 때는 그렇게 센 척하더니만! 하하하!”
녹엽의 말에 낭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녹엽이 들춰낸 까닭이다.
“그런데…….”
그때 여소정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두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조용해지고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당황한 그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닫았다.
“부대주, 하려던 말이 뭐야? 왜 하다 말아?”
장여진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소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전 그냥……. 생각해 보니 상천의 얘기를 못 들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여소정의 말에 이제야 알았다는 듯 손뼉을 친 장여진이 상천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궁금한데요?”
“그래. 너도 얘기 좀 해봐라. 어디서 뭐 하다 온 놈인지. 응?”
여소정의 말에 장여진과 녹엽도 맞장구를 치며 상천에게 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궁금하군.”
“나도.”
낭호와 서기종도 거들었다. 그러자 상천이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중얼거렸다.
“별로 할 얘기도 없는데…….”
“그래도 해봐. 모름지기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는 상대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느냐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 그래야 네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오해 안 하고 그러려니 할 거 아냐?”
녹엽의 말에 옆에 있던 서기종이 한마디 했다.
“녹엽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군.”
“나도 어지간히 나이 먹었거든?”
“난 나이를 이상한 데로 먹은 줄 알았지.”
“뭐, 인마?”
녹엽과 서기종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이자 장여진과 여소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잘 웃지 않는 낭호와 오늘따라 유독 이상한 상천 역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