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42화 (42/141)

#042화.

천이에게.

잘 지내고 있지? 벌써 두 달이 넘었구나, 네가 떠난 지. 우리도 잘 지내고 있다. 밥 잘 챙겨 먹고 몸 건강히 지내라. 내가 글자를 몰라 그나마 조금 아는 혜아가 써준다.

여기까지는 병목의 편지였다. 쓰고 싶은 말이 많은데 글자를 많이 몰라 다 못 쓴 티가 역력했다.

오빠, 보고 싶어.

그 밑에 공혜의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삐뚤빼뚤한 글씨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서찰을 읽은 상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밀려오는 그리움에 눈가는 붉게 물들었다.

“문도들이 보낸 건가요?”

“그렇소.”

장여진의 물음에 상천이 서찰을 접어 품에 넣으며 대답했다.

“문도들 사이에 정이 돈독한 모양이네요. 서찰까지 보내올 정도면.”

“가족이오.”

상천의 말에 장여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럽네요. 전 우리 문파의 문도 대부분을 잘 몰라요.”

합산도문처럼 큰 문파에서 문주의 여식인 장여진이 문도 전부를 알기란 불가능했다.

“이만 가봐도 되겠소?”

“그러세요.”

장여진의 말에 상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천이 집무실을 나서자 장여진이 아쉬운 듯 작게 중얼거렸다.

“재미없는 사람.”

상천이 숙소로 돌아오자 대원들이 모두 상천을 바라보았다. 녹엽은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그에게 찰싹 붙어 앉았다.

“대주가 뭐라던가?”

“그냥 받을 게 있어서 갔었소.”

“받을 거? 뭔데? 영약 같은 거라도 줬어?”

녹엽이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그리움 때문에 힘든 상천이 잔뜩 인상을 쓴 채 물었다.

“뭐가 궁금하오?”

“아니, 난 그냥……. 대주가 너만 따로 부르기에…….”

상천이 화난 듯 보이자 녹엽도 슬쩍 꼬리를 말았다.

“그냥 친구한테서 서찰이 와서 그거 주려고 부른 거였소.”

“서찰? 친구? 혹시 이거냐? 크크!”

친구라는 말에 녹엽이 새끼손가락을 들어 살짝 흔들어 보았다. 그것을 보며 상천이 한숨을 푹 쉬더니 귀찮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저리 가시오. 좀 자야겠소.”

그렇게 말하며 상천이 자신의 침상에 누워버리자 녹엽이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

“벌써 자? 아직 해도 안 졌는데? 그러다가 밤에 깨서는 날 샌다?”

하지만 상천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렸다.

“거참, 성격 한번 괴팍하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녹엽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

똑똑!

집무실 문에서 들려온 손기척에 책을 읽던 장우량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들어오게.”

그 말에 문을 열고 군사 갈위가 들어왔다.

“처리했습니다.”

“그런가? 고생했네. 후……. 그 아이 등살에 내가 진짜 살 수가 없네. 없는 임무를 만들어서라도 내놓으라니.”

“하하하! 그래도 뭔가 하려는 의욕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기분 좋게 웃으며 하는 갈위의 말에 장우량은 더욱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의욕도 적당해야 좋은 거지. 이 녀석은 너무 과해서 탈이네. 괜히 없던 일도 만들 녀석이야.”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부대주도 있고 수하들이 있으니 그렇게까지야 하겠습니까? 이제 다 큰 성인이니 믿고 한번 맡겨보십시오.”

“그래야겠지. 그래, 어떻게 처리했는가?”

“외부로 나갈 일을 만들었습니다. 전양 쪽에서 올라온 보고인데, 낭인들끼리 사소한 다툼이 있어 지부 무사들이 나서서 일을 해결했다고 합니다.”

“해결했으면 끝난 일 아닌가?”

장우량의 물음에 갈위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아가씨에게 말씀드릴 때는 살짝 말을 바꿨습니다. 뭔가 미심쩍으니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럼 다녀와서가 문제 아닌가? 속였다고 또 난리법석을 칠 텐데.”

“문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없던 일도 만들 능력이 있다고. 그러니 도착하면 아가씨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허허.”

그 말에 장우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다 큰 아이이니 그러기야 하겠냐고. 수하들도 있는데.”

그러자 갈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아예 그런 일이 없을 거란 말은 안 드렸습니다. 다만 ‘작게’ 벌이지 않을까 하는 말이었지요.”

갈위의 말에 장우량이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고, 전양 쪽 지부장이 누구지?”

“고척방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 그런데 그곳으로 보냈다고? 그 사람이라면 여진이가 원하는 거면 뭐든 해줄 사람이네. 거절이라는 걸 못하는 사람 아닌가?”

“그래서 그리로 보냈습니다. 적당히 아가씨가 일을 벌이셔야 돌아오셔서 후폭풍이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미리 서찰이라도 넣어주게. 당황하지 않게.”

“이미 전서구를 띄웠습니다.”

갈위의 말에 장우량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그거 아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끔 보면 자네가 악마 같을 때가 있네.”

“예?”

“말 그대로 사악하단 말일세.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고 지부장에게 거대한 시련을 안겨줄 수 있는 건지…….”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허허, 그것참. 그 친구 고생깨나 하겠군. 나중에 몰래 포상이라도 내려줘야겠어.”

“그렇게 하시지요.”

장우량의 말에 갈위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튼 수고 많았네. 나가보게.”

“예. 그럼.”

갈위가 공손히 읍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후 창밖을 내다보던 장우량이 조용히 읊조렸다.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고척방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거리가 많지 않기도 했지만 ‘오늘 못한 것이 있으면 내일 하면 된다’를 신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밤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놓고 집무실에 있었다.

“하아…….”

고척방이 짙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서찰이 들려 있었는데 내용이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 짧은 서찰에 적혀 있었다.

최근 보고 내용을 조사하러 아가씨가 대원들을 데리고 가실 것이네. 해결이 안 된 것으로 해두게.

입이 쩍 벌어지는 갈위의 서찰.

고척방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해결된 일을 미해결로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이미 다 해결하고 현장 정리까지 끝난 상황이다.

이미 정리한 현장을 다시 복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어찌어찌 처리해 놓는다고 해도 가장 큰 문제는 장여진이었다.

고척방은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떼를 쓰든 아부를 하든 어떻게 해서든 얻어내는 그녀의 성격을.

원래 고척방도 본산에 있었다.

제법 요직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장여진과 마주칠 일도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본산을 떠나 지부로 나온 이유가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분명 한몫했다.

그렇게 지부로 떠나온 후 그는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다.

번화가가 있는 곳이 아닌지라 일거리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른 세력과의 접경 지역이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닌지라 너무나 편한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장여진이 온단다.

‘하늘이시여! 제가 편히 지내는 것이 그리도 보기 싫으셨습니까?’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결국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었다.

***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청운대원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났음에도 그들의 얼굴에서는 피곤한 기색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마치 놀러 가는 아이처럼 한껏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임무라는 생각에 실망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들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다니며 생활하던 낭인들이다.

그런 그들이 문파에 와서 바깥 구경 한번 못하고 갇혀 지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나마 편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조금 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유로운 생활에 젖어 있던 그들에게 청운대에서의 생활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찰나,

어떤 임무가 됐든 나갈 수 있을 기회가 생겼으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저마다 들떠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나가는 거냐!”

짐을 챙기던 가릉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니까 어서들 빨리 짐 챙기라고! 얼른 준비가 끝나야 조금이라도 빨리 나갈 거 아냐?”

가릉의 말을 녹엽이 받으며 다른 대원들을 독려했다. 그러자 한쪽에서 우승곽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빛의 속도로 끝내면 뭐해? 항상 보면 제일 늦는 건 대주님이시잖아.”

“그건 그래.”

우승곽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준비됐나?”

그때, 밖에서 여소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녹엽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어랍쇼?”

그녀가 찾아왔다는 것은 장여진의 준비도 끝났다는 뜻.

예상을 뒤엎는 상황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장여진 역시 대원들 못지않게 들떠 있었다. 그녀 역시 합산도문 밖으로 나가본 것은 남녕까지가 전부였다.

즉, 이번 임무 때문에 전양으로 가는 것은 그녀가 살아오면서 가장 멀리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들뜨는 것은 당연했고, 그 때문에 간밤에 잠도 설친 상태였다.

그래서 예정된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마쳤고, 대원들이 당황스러워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어쨌든 다들 빨리 나가자고!”

그렇게 말한 녹엽이 먼저 자신의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다른 대원들도 줄줄이 나갔다.

모든 대원들이 연무장에 도열해 서자, 장여진이 그 앞에 섰다.

“모두 잠은 잘들 잤나요?”

“예!”

“다행이네요. 전 선잠을 잤어요. 들떠서.”

장여진의 말에 대원들이 눈을 돌려 서로를 힐끗 쳐다보았다.

“청운대가 만들어지고 첫 임무를 받아 나가는 날이에요. 다들 마음의 준비는 됐나요?”

“예!”

마음의 준비라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바깥세상은 그들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것을.

속으로 ‘괜한 걱정 하시네’라는 생각을 저마다 가진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식전인데, 지금 당장 출발해도 괜찮겠어요?”

“예!”

“물론입죠!”

“당연한 걸 또 물으시네. 하하!”

대원들의 대답에서도 들뜬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들을 보고 한차례 웃어준 장여진이 여소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인 여소정이 대원들에게 말했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도를 받아가라!”

여소정의 말에 대원들이 또 한 번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자신들의 무기를 가지고 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왜들 그러나?”

“그럼 저희 무기는 놓고 갑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합산도문의 문도로서 대외 활동을 하는데 검을 들고 가겠다고?”

여소정의 말에 대원들은 그제야 ‘아!’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한 명씩 앞으로 나가 도를 받아 들었다.

대원들에게 지급된 도는 제법 값어치가 있어 보였다.

넓은 도신은 흑갈색이었고, 손잡이와 연결된 부분에는 또렷하면서도 멋들어진 글씨로 ‘합산(合山)’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손잡이 끝에는 붉은색의 술이 붙어 있었는데, 제법 흑갈색의 도신과 잘 어울렸다.

“다들 받았나?”

가지고 온 도를 모두 지급한 여소정이 한 명도 빠짐없이 도를 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후 장여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앞장섰고 그 뒤로 여소정이, 그리고 그 뒤로 대원들이 줄줄이 따라 나섰다.

청운대의 첫 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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