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40화 (40/141)

#040화.

네 사람의 술자리는 조용히,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중간 중간에 녹엽이 말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상천과 낭호가 만들어내는 무거움이 녹엽의 가벼움을 뒤덮고 있었다.

무겁기만 하던 술자리의 정적을 깬 건 낭호였다.

“나이 스물에 실전 경험이 많지는 않을 텐데.”

“그렇소.”

낭호의 물음에 상천의 짧게 대답했다.

“일신의 무공이 그렇게 뛰어난 것 같지도 않고.”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오.”

이번에도 상천은 짧게 대답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녹엽과 서기종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내 연검은 낭인들 사이에서도 제법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걸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애송이가 쉽게 피하고 받아내기는 어려울 텐데?”

“무투대회에서 봤으니까.”

상천의 대답에 낭호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두 번 봤다고 해서 쉽게 피하고 받아낼 정도로 내 무공은 허접하지 않다!”

“누가 허접하다고 했소?”

분노 섞인 낭호의 말을 상천은 덤덤하게 받았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아니오.”

“그럼 뭐지?”

낭호의 물음에 상천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빈 사발에 술을 채워 들이켤 뿐이었다.

한 번 마셔봤기 때문인지 처음 막천풍과 술을 마실 때보다 지금은 제법 잘 마시는 상천이었다.

“대답 안 할 건가?”

낭호가 상천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그러자 사발에 가득 담긴 술을 한 번에 벌컥벌컥 들이켠 상천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난 당신과 수많은 비무를 해봤으니까.”

“뭐?”

상천의 말에 낭호가 무슨 소리냐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무튼 그런 게 있소.”

그렇게 대답한 상천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자, 자!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알게 되겠지. 술이나 마시자고!”

적절한 순간에 녹엽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시간이 지나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는 상천과 낭호 사이에 존재하던 어색함이 조금이나마 걷혀졌다.

다음날. 정오가 막 지난 무렵.

식사를 마친 청운대원들은 연무장에 도열해 서 있었다. 그런데 상천을 제외한 다른 대원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상천이 오기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세워놓고 반 시진이나 늦게 나타난 장여진 때문에 얼마나 짜증이 났던가.

하지만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상천만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열해 서 있었다.

“또 한참 있다가 오시는 거 아니야?”

녹엽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녹엽이 먼저 꺼내자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게 말이야. 무슨 치장을 그렇게 하시는지.”

“누구한테 잘 보일 것도 아니고 그기 뭐꼬?”

“원래 여자들은 다 그런 거야. 관심없는 남자들 앞에서도 예뻐 보이고 싶은 게 여자들의 천성이지.”

“하긴.”

여기저기서 장여진에 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체 만 체하며 상천은 가만히 서 있었다.

“아, 소형제. 그런데 소형제는 무투대회에도 안 나왔으면서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나?”

그때, 녹엽이 상천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이 궁금했는지 모든 시선이 일제히 상천에게 쏠렸다.

그런 시선이 불편했는지 상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주님 제안으로…….”

“뭐? 그럼 소형제는 대주님이랑 잘 아는 사이였어?”

상천의 대답에 녹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 잘 아는 사이는 아니고 알게 된 지 두어 달 됐소.”

“그랬군.”

상천의 대답에 녹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주님도 어린놈이 좋은 거야.”

“넌 어린 여자 안 좋냐?”

“나 같아도 그러겠다.”

“영계 들어왔으니 또 얼마나 치장을 하고 오시려나?”

상천의 말 한마디가 졸지에 장여진이 상천을 남달리 생각하고 있다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천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을 때, 여소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시끄럽나?”

여소정이 도열해 있는 대원들 앞에 서서는 한마디 했다. 그러자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떠들던 대원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곧이어 장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원들의 추측과 달리 장여진은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점심들은 맛있게 했나요?”

“예!”

장여진의 물음에 대원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오늘부터 여러분이 배워야 할 것이 있어요.”

배울 것이 있다는 장여진의 말에 대원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오던 그들에게 뭔가를 배워야 하고 규율을 지켜야 하는 일은 가장 귀찮고 하기 싫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로 하고 청운대의 대원이 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부대주.”

“예.”

장여진의 말에 고개를 숙인 여소정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 물러서라.”

여소정의 말에 대원들 모두가 연무장 끝자락 쪽으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대원들이 물러서자 여소정이 도를 움켜쥐었다.

성격은 그렇지 않지만 여성스럽게 생긴 그녀가 도를 쥐고 있으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도를 풍겼다.

이미 그것을 몸소 체험했던 대원 중 몇몇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도를 들고 잠시 정면을 응시하던 여소정이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도가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검보다 더 큰 도를 휘두르고 있음에도 전혀 느리지 않았고, 펼쳐지는 초식에는 검법과는 또 다른 강맹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도법 시연은 일각 동안 계속되었다.

일각이 지난 후 여소정이 도를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짧은 시간 동안의 시연이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했는지 그녀의 이마에 약간의 땀이 맺혀 있었다.

“잘 봤나요?”

여소정의 시범이 끝나자 장여진이 대원들에게 물었다. 대원들 중 몇 명은 넋을 잃고 있었다.

“이걸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겁니까?”

서기종이 장여진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배워야 한다고?”

“난데없이 도법이라니?”

“난 지금까지 살면서 무기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는데?”

배워야 한다는 말에 놀란 대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이곳은 합산도문이에요. 도를 사용하는 문파지요. 대원들 중에 도법을 익힌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의외고 아쉽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러니 도법 하나 정도는 익혀둬야 하지 않겠어요? 앞으로 대외적인 임무도 맡게 될 텐데 기본적인 합격도 익혀놔야 할 거고요.”

장여진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생 동안 한 가지 무기만, 주먹 하나만 익히고 살아온 그들에게 이제 와 도법을 배우라 하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부대주의 시범이 제법 그럴싸했지요? 하지만 이는 합산도문의 기본 도법인 맹호도법(猛虎刀法)이에요. 어렵지 않은 도법이니 익히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몇몇 대원들이 입을 쩍 벌렸다.

여소정이 보여준 맹호도법은 보는 것만으로도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기본 도법이라니.

그럼 합산도문의 대표 도법인 십이잔혼도(十二殘魂刀)는 얼마다 대단하단 말인가?

대원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여소정이 나섰다.

“일단 오늘은 맹호도법의 전반부 사 초식의 형(形)부터 배우도록 하겠다.”

여소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명의 무인이 커다란 함을 들고 나타났다. 그 함에는 박도 열 개가 들어 있었다.

“하나씩 들어라.”

여소정의 말에 대원들이 쭈뼛거리며 박도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나마 검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도를 쥐는 데 크게 어색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권사들은 굉장히 어색해했고 어설펐다.

“일단 제대로 도를 쥐는 방법부터 가르쳐야 할 것 같습니다.”

여소정이 작게 한숨을 쉬며 장여진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생해, 부대주.”

“…알겠습니다.”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장여진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쉰 여소정이 대원들에게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장여진은 발걸음을 돌렸다.

낭인들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무공에 대한 기본이 잡혀 있는 대원들이기 때문인지 맹호도법 전반 사 초식의 형을 익히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물론 거기에는 여소정의 혹독한 수련도 한몫했다.

사 초식의 형을 모두 익힌 대원들은 모두 숙소로 들어가 쉬었다. 어서 씻고 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여소정의 훈련은 힘들었다.

모두가 씻고 저마다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숙소에서 나온 상천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백룡문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반부 사 초식…….’

상천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그의 눈앞에는 도를 든 환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펼쳐 봐!’

상천이 속으로 중얼거리자 거기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환영의 얼굴이 살짝 끄덕여졌다.

그리고 환영은 곧바로 맹호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상천은 환영이 펼치는 도법을 집중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기서 이렇게 되는 거였군.’

상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훈련을 하면서 여소정이 잘못된 부분을 짚어주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일대일로 하는 수련이 아닌 혼자서 여러 명을 봐줘야 하는 상황인지라 미흡한 부분이 없을 수가 없었다.

또한 지금 상천이 환영을 통해 또 한 번 맹호도법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단순히 형을 좀 더 완벽하게 익히기 위함이 아니었다.

내력의 운용은 물론이고 도법을 분석해서 장점을 파악하고 단월검과 융합할 수 있는 부분을 찾기 위함이었다.

한참 동안 맹호도법을 바라보던 상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규화공으로는 어림도 없겠는데?’

그동안 상천이 백룡문의 무공을 발전시켜 오면서 느낀 부분이었다.

한층 발전된 단월검과 백룡권을 기존의 규화공으로 따라가기가 버겁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배운 맹호도법 역시 규화공으로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력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적재적소에 내력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규화공으로 쌓은 내공의 양으로는 맹호도법의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하, 답답하구나.’

단월검이나 백룡권, 천유보 등은 다른 무공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그리고 실제 그것들의 장점들과 규합해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규화공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뭐하고 있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상천은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노을도 거의 다 사라지고 있었고, 뒤에는 서기종이 서 있었다.

“그냥 이것저것 생각 좀 했습니다.”

어제의 일 이후로 상천은 다른 사람들에게 반말을 사용했다. 그들도 그것을 용인했고, 상천 스스로도 그것이 편했다.

하지만 단 한 명, 서기종에게만은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그의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몸도 불편할 텐데.”

서기종은 며칠 전 낭호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를 떠올리며 상천에게 물었다. 상처도 상처이지만 오늘 그렇게나 힘든 훈련을 했으니 배는 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물은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그의 물음에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실제로 여소정이 가져다준 금창약은 효과가 뛰어났다.

어지간한 상처는 벌써 거의 다 아물어가고 있었고, 몇 개의 큰 상처도 통증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오늘의 훈련도 버텼지 안 그랬으면 진작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곧 식사 시간이다. 잘 먹어야 빨리 낫는다.”

“알겠습니다. 곧 들어가겠습니다.”

상천의 대답을 들은 서기종이 몸을 돌려 숙소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상천은 반 시진 정도 더 맹호도법을 관찰하고 난 다음에야 숙소로 돌아갔다.

물론 시간이 늦어 저녁은 먹지 못했다.

그렇게 청운대에 합류하고 한 달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0